담장 없는 교정, 바람에 흔들리는 그네
우람한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서면 아이처럼 생글생글 웃게 되네
학생·선생님·마을 주민들…함께 일궈낸 개교 100주년
숲이 아름다운 학교 유명세
◆참되고 바른 학교
6월의 여름, 신록이 짙고 충만하다. 대구·경북의 산하가 무성한 초록빛으로 물드는 나날이다. 이맘때면 유독 숲이 그립다. 숲 어귀에 나그네를 맞는 집이 있다면 반갑게 달려가고 싶다. 정녕 그런 집이 있다면 세상 모든 근심을 잠시 내려놓고 마음껏 쉬고 싶다. 현충일 이른 아침,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으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 초등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임고면 행정복지센터 주차장에는 인적이 없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도시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우람한 나무, 운동장, 놀이터, 그리고 아담한 학교 건물이 한 폭의 그림 같기만 하다. 담장이 없어 바로 교정으로 들어설 수 있지만 왠지 아이들이 걷던 길로 가고 싶다. 천천히 입구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길 위에는 '선생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고 가지치기를 마친 키 큰 나무들이 좌우로 도열해 나그네를 맞는다.
드디어 학교 입구에 닿는다. 그런데 문이 없다. 철문도 차단봉도 없이 숲과 길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열린 입구다. 가깝게 두 개의 돌기둥이 우뚝 서 있다. 왼쪽에는 '참되고', 오른쪽에는 '바르게'라는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임고 초등학교의 교훈이다. 돌기둥 사이로는 키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조용히 자라고 있고 그 너머로는 믿기 어려울 만큼 우람한 거목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더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경계의 문턱이 없는 이 자리에 머물고 싶어서다. 이 길을 오가던 아이들의 기척과 따스한 호흡을 조금만 더 느끼고 싶다. 아이들처럼 생글생글 웃고도 싶다. 이곳에 있으니 나도 어느새 티 없이 맑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 마음이 환히 밝아진다.

◆백 년 학교, 백 년 나무
학교는 하나의 고유한 우주다. 임고 초등학교도 그렇다. 이 학교를 드나들며 자라난 아이들은 저마다 반짝이는 별이다. 그 별들이 남긴 빛을 학교의 백 년 나무들은 가슴 깊이 새겨 왔다. 교실과 복도, 운동장 구석구석에서 움튼 아이들의 꿈을 나무들은 묵묵히 바라보며 응원했다. 그렇게 이 작은 우주는 오랜 시간 동안 아이들 곁에서 깊어지고 넓어져 왔다.
임고 초등학교는 1924년 4월 1일, '임고 공립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다. 1938년에는 '임고 공립심상소학교'로, 1941년에는 '임고 공립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꾼다. 1981년에는 병설유치원이 개원해 마을의 유아를 품는다. 1996년 3월 1일, 마침내 현재의 교명인 '임고 초등학교'를 확정하며 장구한 역사가 오늘까지 이어진다.
2003년 11월 18일, 임고 초등학교는 제4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숲이 아름다운 학교'로 널리 이름을 알린다. 그리고 2025년 4월, 영광스러운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임고 초등학교의 연혁이 놀랍도록 장하다. 그것은 단순한 연대기의 나열이 아니다. 아이들과 선생님, 마을 주민들이 함께 손을 맞잡고 일궈낸 지역 공동체의 쾌거다.
◆추억이 영그는 쉼터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거대한 플라타너스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장중하게 서 있다. '우람하다'는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늘을 향해 뻗은 굵은 줄기와 사방으로 퍼진 가지는 학교를 지켜온 수호자의 형상처럼 늠름하다. 우뚝 선 플라타너스마다 세월의 흔적과 신록의 충만이 조화를 이룬다. 플라타너스가 드리우는 너른 그늘 아래에서 아이들은 쉬고 놀며 우정을 배운다.

입구에서 왼편으로 걸음을 옮기면 학교의 자랑인 '우람 숲'이 돋보인다. 1924년 개교 이후, 1·2·3회 입학생들이 심은 플라타너스 11그루와 느티나무 15그루가 학교 숲의 기틀이다. 처음부터 학교에 숲이 있었을 리 없다. 누군가 심고 가꾸고 마음을 보태었기에 숲이 탄생한 게 아닌가. 졸업생과 교사들이 해마다 기념 식수를 하며 숲을 풍성하게 가꿔왔다. 그 숲은 이제 KBS, MBC 등 방송과 드라마 촬영지로 소개되며 마을의 자부심으로 사랑받는다.
최근에는 여행자들의 관심을 듬뿍 받고 있다. 학교 숲이 궁금해 찾아오는 이들의 발걸음이 꾸준하다. 이 숲을 일군 학생과 교사의 정성이 학교를 지역의 명소로 키운다, 임고 초등학교는 아이들만의 추억으로 머물지 않는다. 누구에게든 추억을 선물하는 열린 쉼터가 임고 초등학교다.
◆위로를 건네는 우람 숲
짙은 녹음이 내려앉은 우람 숲속으로 천천히 몸을 맡긴다. 고요가 흐르는 숲은 시원하고 청정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신록의 향이 몸 안 깊숙이 스며든다. 작은 오솔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뿐하다. 숲이 크지는 않다. 학교 숲이니 그럴 수밖에. 그럼에도 먼 길을 달려온 보람이 있다. 숲이 말없이 나그네를 위로하며 묵은 근심을 털어내라고 나직이 속삭인다.
우람 숲 곁에 놓인 그네와 시소, 미끄럼틀이 정겹다. 저 하늘을 향해 아이들을 실어 나른 그네, 놀다 멈춘 듯 기울어진 시소에는 아이들의 웃음이 겹겹이 배어 있다. 마침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아이들처럼 그네를 타며 웃는다. 누구든 이 놀이터에 오면 함께 뛰놀던 시절로 자연스레 되돌아간다. 귀를 기울이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환히 들린다. 그 웃음소리에 호응하듯 그네가 바람결에 흔들린다.

놀이터와 이웃한 우람한 플라타너스 앞에 선다. 두 팔을 벌려도 도무지 감싸지지 않는 크기다, 세 네 명의 어른이 있어야 겨우 품을 수 있을까. 혼자였지만 가만히 다가가 이 거대한 나무를 껴안는다. 아니 나무가 나그네를 껴안는다. 나무의 웅장한 심장 소리가 전해진다. 나무가 조용히 말을 한다.
"괜찮아, 괜찮아…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나는 한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고비를 넘겼지. 걱정하지 마, 넘어지더라도 다시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가지를 펼치면 되는 거야." 나무는 속 깊은 위로를 건넨다. 그 순간, 마음 한편에 숨겨둔 불안과 고단함이 녹아내린다.
◆신록이 짙은 숲속의 집
임고 초등학교의 건물은 단순한 교육 시설이 아니다. 마을 아이들의 하루하루를 정성스레 챙기는 다정한 '집'이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처음 글자를 익혔고 누군가는 선생님을 따라 해맑게 노래를 불렀다. 또 누군가는 책가방을 멘 채 운동장을 달리며 생애 가장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아이들의 땀방울이 켜켜이 쌓여 숲속에 배움의 집이 완성되었다.
이곳에 머물다 보니 문득 내가 신록이 된 것만 같다. 오래된 플라타너스를 어루만지고 동심이 스민 숲길을 걷고 추억이 앉은 교정을 천천히 누빈 하루다. 이게 행복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행복일까. 처음 이 학교를 찾을 땐 그저 짙은 신록이 그리웠을 뿐이다. 그런데 돌아갈 때가 되니 이 숲속의 학교가 나에게 선물을 선사한다. 그 선물은 아이로 돌아가는 추억이다.
임고 초등학교는 학교 그 이상이다. 백 년 세월 동안 아이들을 키운 숲속의 집이다. 이 집이 사라지지 않기를, 부디 오래도록 이 자리에 머물기를 바란다. 언제까지나 저 플라타너스가 아이들의 꿈을 지켜보는 버팀목이 되기를 빈다. 내 발길도 우람 숲에 포개졌으니 마음 깊은 곳에 고요한 기쁨이 인다.
사는 일이 고단해질 때면 다시 이곳을 찾을 것이다. 우람한 나무가 날 위로한 신록이 짙은 숲속 배움의 집으로.
글·사진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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