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 떠나 자연과 함께한 은거…나 홀로 즐기는'獨樂의 공간'
독락당, 옥산서원, 양동마을
독락당(獨樂堂)은 조선의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선생이 홀로 사유하며 학문을 탐구하며 즐겼던 건축과 자연의 공간이다. 자계천을 따라서 바로 700m 거리에 옥산서원이 있다. 동방오현(東方五賢) 학자 회재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은 그의 학문을 숭상하고 따르는 후학들이 사후 20년 뒤에 건립하였다.
회재는 옥산서원에서 동쪽 12km 떨어진 양동마을의 외가 서백당(書栢堂)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삶과 사유의 건축 공간 양동마을과 독락당은 2010년 '한국의 역사마을'로, 옥산서원은 2019년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함께 등재되었다.

◆독락당, 홀로 사유를 즐기는 집
23세 과거에 급제하며 경주부윤 관직에 오른 회재는 25세에 소실(양주 석씨)을 들이면서 경주 안강읍 옥산리에 은거 생활의 별업(別業) 독락당을 짓게 된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를 제대로 갖춘 별업은 여느 사대부 집보다 규모가 크다. 태어나 자라고 정실부인이 있는 양동마을의 집을 두고 일찍이 별업을 경영하며 스스로 '독락'의 길로 들어서게 됨은 양동마을 명문 외가(월성 손씨)에 대한 콤플렉스라 말하기도 한다.
혼탁한 시절, 40세에 사림파의 정쟁으로 관직에서 축출당하며 낙향하게 된다. 분노와 좌절, 회한과 자성, 도약을 위한 시간과 공간은 이곳 독락당이었다. 사색과 학문 정진으로 선가(仙家) 도가(道家)의 정신세계를 구축하며 성리학자로 거듭나게 한 공간이었다. 자연과 함께 은거하며 생활의 이상을 실천하는 '독락'은 중국 사마광의 '독락원기(獨樂園記)'에서 기인한다.

낮은 자세로 주변의 자연에 묻힌 듯 독락당은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고자하는 은둔의 건축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 담벼락이 마당을 막아선다. 바깥마당을 거처 다시 좁은 대문간으로 들어서게 한다. 집 안 방향을 여러 갈래 동선으로 나누어서 손님을 반기지 않는 동선이다. 안채와 사랑채 계정, 그리고 오른편 좁은 골목길은 자계 계곡으로 미로처럼 분리된다.
특히 사랑채 독락당의 낮은 기단과 낮은 마루, 낮은 지붕은 답답할 정도로 낮은 집이다. 한 쪽은 맞배지붕이요 반대편은 팔작지붕인 사랑채는 권위와 격식을 떠나서 해학으로 보아야 할까? '옥산정사' 현판은 퇴계 선생의 글이다. 담장과 해우소 살창 사이로 외부 자연을 바라보게 하는 시선교감은 분명 뛰어난 공간 방법론이다.

◆독락의 백미(白眉),계정(溪亭)
사랑채를 돌아서 만나게 되는 은밀한 계정(溪亭), 비로소 집의 이름이 '독락'인 이유를 알게 된다. 세상에 둘도 없는 홀로 즐기는 독락의 백미(白眉)이다. 자연으로 열린 집이자 정자이며 내외부의 경계이다. 퇴계 글씨 현판의 '양진암(養眞庵)'은 우정을 나누었던 정혜사 주지 스님이 절집처럼 묵었다는 사랑채요 게스트하우스이다.
한석봉 글씨 현판의 '계정'은 집 모퉁이 작은 공간에서 4계절 자연을 홀로 즐기는 공간이다. 계정의 참모습은 바깥 개울 건너에서 바라보아야 온전히 드러난다. 담장과 띠 창살, 바위 생김새에 따라 세운 기둥 위에 떠 있는 정자의 멋이 자연과 함께 펼쳐진다.
임금이 하사한 어필을 보관하는 '어서각'. 중국에서 들여온 '주엽나무', '사당' 영역을 각별히 보호하고 섬겼다. 북쪽담장 쪽문은 각별히 교류했던 정혜사 주지를 만나러 가고 오는 전용문이다. 회재가 정혜사에서 기거하며 집필했던 서책 판본들은 사찰 화재로 소실되어 버렸다. 어설프게 복원된 사찰보다는 13층 탑만이 외로운 빈 절터가 곧 독락이다.

이 무렵(1528)에 양산보가 담양에 낙향하며 지은 원림 소쇄원을 떠올려 본다. 광풍각 제월당에 많은 묵객이 거쳐가며 글과 그림을 남긴 열린 공간이었다면 독락당에는 회재의 자연과 회재의 건축 공간만이 오롯이 남아있다. 독락당에서 옥산서원에 이르는 계곡 바위(5대)와 주변의 산(4산)에는 스스로 불교적 도교적 이름들을 지어서 자신의 우주관으로 삼았으며 후일, 자연경관의 영역을 확대하여 '옥산구곡'으로 불리고 있다.
절치부심의 독락당 7년 후, 경상도 관찰사로 관직에 복귀를 했으나 을사사화 정쟁에 휩쓸려 유배를 당하며 그 6년 후, 1553년 유배지 강계에서 죽음을 맞는다. 서자 이전인은 회재 곁에서 나눈 학문적 대화록 '관서문답록'을 남기며 후일까지 독락당을 지켰다.

◆옥산서원, 자연 속에서 폐쇄의 건축 공간
회재 이언적 사후 20년이 지난 1572년 옥산서원이 건립된다. 서원은 지역의 사립학교였고 성균관은 한양의 국립대학이며 향교는 각 지역의 관학이었다. 사후에 건립된 서원은 회재의 의지와는 무관하지만, 삶의 배경, 학문적 사상과 건축 공간의 의미를 연관하여 바라보게 된다.
유교문화 선비정신이 유달랐던 영남지역에는 조선시대 서원의 1/3이 있었고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남은 47개 중 14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9개 서원 중 5개가 영남의 서원이다. 서원은 크게 강학(講學)공간, 제향(祭香)공간, 유식(遊息)공간으로 배치하는데 제향을 중시하거나 유식공간이 생략되기도 하지만 기본적 위계질서는 벗어나지 않는다.

자옥산 아래 자계 계곡에 자리한 옥산서원은 작은 폭포와 남쪽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낭만적 운치가 있다. 그러나 옥산서원 공간은 독락당처럼 내부 지향적이며 폐쇄적 건축 철학을 담고 있다. 역락문(외문)을 거치는 무변루는 자연을 향해 열린 누마루 건축이 아닌 방들로 채워져 있다. 안마당에 들어서면 구인당(강당), 기숙사(동 서재), 무변루 지붕 처마가 거의 연결된 듯 외부로 향하는 시선들은 막혀있다.
중정마당을 향하는 구인당 정면은 벽으로 막히고, 창호들은 내부마루를 향해 있다. 입면은 폐쇄적이며 무창(無窓) 불통(不通)의 건축이다. 서로 마주하고는 있으나 학습에만 집중하는 듯 정신적 휴식과 낭만적 유식 공간 분위기는 없다. 계곡의 풍경과 자연의 소리를 차단하고있는 폐쇄적 건축이다.
장경각(도서실) 장판각(출판)이 있고 많은 방으로 학생 수와 경제 규모를 짐작케 한다. 원만한 서원보다 큰 관리사(서원청) 규모는 인근 부자 양동마을의 배경도 있겠으며 무엇보다도 회재 학문적 배경의 크기일 것이다.

◆양동마을과 회재의 건축공간
독락당과 옥산서원에서 동쪽 12킬로 거리의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 명문가의 종가마을이다. 외삼촌 손중돈은 고위 관직을 거친 성리학자로 회재가 어릴 적부터 따랐던 멘토이자 학문적 스승이었다. 조선 중기 이전에는 남자는 처가로 장가를 간다고 했다. 명문 처가의 은덕으로 공부하고 과거를 보고 출세하는 경우가 많았다. 회재는 처가로 장가들지 않았지만 독락당은 첩실의 재력으로 짓게 된다.
물(勿)자 산지형으로 일컫는 마을의 지형은 능성줄기로 뻗어있다. 지체 높은 양반 집은 높은 산등성에 위치하고 신분이 낮은 집은 마을 아래로 있다. 방문객들은 높은 윗마을을 다 돌아보기가 쉽지가 않고 대부분 아랫마을에서 되돌아 나오기 십상이다.

양동마을에는 회재와 관련한 세 건축이 있다. 위쪽 마루 외갓집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독락당이 홀로 공간이었다면 이씨 종택 무첨당(無添堂)은 사랑채 생활공간이었다. 경상도 관찰사 부임하며 중종 임금이 하사한 집 향단(香壇)은 노모를 위해 지은 실버하우스였다. 用자 평면, 두 개의 안 마당, 세 개의 박공지붕이 시그니쳐로 나타나는 '향단'은 바로크 건축처럼 한옥 전형을 초월한 집이다.

손씨 토박이 마을에 들어선 이씨의 집 위치에 따라 두 가문의 위세를 말하기도 한다. 지금도 후손들은 월성 손씨, 여강 이씨의 선의적 문벌 경쟁을 '손이시비孫李是非)'라 표현하고, 회재의 서자 이전인 상속 연고 다툼을 '적서시비(嫡庶是非)'라는 말로 전해지고 있다.
후대에 길이 남아있는 성리학의 업적 성과들을 인문학이라 일컫는다면 회재 이언적의 삶과 사상이 배여있는 건축과 공간은 인문학적 장소이다. 그는 홀로 사유하며 학문과 삶을 즐긴 낭만적 건축주요 창의적 건축가였다.

최상대 전, 대구경북건축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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