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산나물의 귀족' 음나무(엄나무)

입력 2025-03-30 16:00:00 수정 2025-03-30 18:00:01

뾰족한 가시, 귀신 쫓는 나무?…쌉싸래·풋풋, 입맛 돋우는 나물!
경상도에선 '엉개'라고 불리는 새순…4월 중순 잎이 완전히 피기 전 채취
끓는 물에 데쳐 먹는 봄나물 대명사…사포닌 함유 '건강식품'으로도 주목

경북 예천군 은풍면 은산리에 있는 수령 350여 년 된 음나무는 가슴높이 둘레가 자그마치 5m가 넘는 노거수다. 예천군 제공
경북 예천군 은풍면 은산리에 있는 수령 350여 년 된 음나무는 가슴높이 둘레가 자그마치 5m가 넘는 노거수다. 예천군 제공

이른 봄 겨우내 잃었던 입맛을 돋우는 나물에는 냉이, 달래, 머위, 씀바귀 등이 있다. 햇살이 더 따뜻해지면 화살나무, 두릅나무, 음나무, 옻나무, 다래나무 등의 새순을 따서 나물로 먹는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음나무 새순을 '엉개'라고 부르며 오래전부터 나물로 즐겨 먹어왔다.

대구경북에서 보통 4월 중순부터 새순이 돋는 음나무는 잎이 완전히 피기 전의 부드러운 새순을 채취하여 끓는 물에 데쳐서 먹는데 쌉싸래한 맛과 풋풋한 향이 입맛을 돌아오게 한다. 이런 까닭에 봄철 산나물의 귀족으로 불리고 있으며 일부 식도락가들은 음나무의 사촌인 '봄나물의 대명사' 두릅나무 새순보다 더 좋은 나물로 여긴다. 음나무에는 인삼의 주요성분인 사포닌 등 기능성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맛뿐만 아니라 건강식품으로써도 주목받고 있다.

음나무 새순은 지역에 따라서 두릅의 아류라는 의미로 '개두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어사전에는 엄나무와 음나무를 모두 표준어로 채택하고 있고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음나무로 등재돼 있다. 아름드리 크기로 자란 나무의 목재는 가볍고 질이 좋아 옛날 나막신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 또 집안으로 침입하는 잡귀를 막을 요량으로 가시투성이 가지를 대문 위나 문설주에 걸쳐두기도 했다.

음나무의 새순.
음나무의 새순.

◆가시 많아 붙여진 한자 이름 자동(刺桐)

두릅나뭇과의 음나무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시골집과 밭 언저리나 야산에 크고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유독 눈에 띄는 나무다. 요즘 음나무 새순의 수요가 많다 보니 재배도 늘었다. 예전부터 농촌에서는 음나무 새순을 봄철 별미인 나물로 자주 먹었다. 농촌이나 산촌 사람들만이 즐기는 산채 나물이었고 도시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80년대 입대해서 배치받은 부대의 울타리에 큰 음나무가 한그루 있었으나 팔도 사나이가 모이는 병영에서 아무도 새순을 먹을 줄 몰랐다. 상병 때 봄에 새순을 따서 취사반에서 데쳐서 내무반 동료들에게 먹기를 권해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초고추장에 찍어 한 번 맛 본 동료들은 다시 찾을 정도였다. 병영에서 음나무 새순을 먹었던 추억도 40년 전의 일이다.

봄나물뿐만 아니라 여름철 삼복더위에 허약해진 기력을 충전하기 위해 먹는 이열치열의 대표 보양식인 닭백숙에 가시가 많은 엄나무 가지를 넣는다. 또 긴 잎자루를 따서 돼지고기를 삶을 때 잡냄새를 없애려고 함께 넣는다. 음나무는 이래저래 현대인에게도 쓰임이 많다.

두릅나뭇과의 낙엽활엽교목인 음나무는 높이 25m, 직경 1m 넘게 자라며 잎은 단풍나무 잎처럼 5∼7개로 깊게 갈라진다. 한여름 7, 8월에 황록색 꽃이 피는데 꿀이 많아서 벌들이 모여들며 밀원식물로 가치도 크다. 음나무는 물기가 약간 있고 토심이 깊은 곳과 계곡 근처를 좋아하며 어려서는 그늘진 곳에서 잘 자라지만 클수록 햇빛을 좋아한다.

음나무 꽃은 7~8월에 핀다.
음나무 꽃은 7~8월에 핀다.

한자 이름은 자동(刺桐)이다. 잎이 크고 목재의 결이 곱고 비교적 가벼운 특성이 오동나무와 닮았기 때문에 가시 '刺(자)'와 오동나무 '동(桐)'자를 쓴 모양이다.

옛 시문의 음나무는 자체 아름다움이나 존재감을 읊기보다 시후(時候)를 표현하는 방편으로 주로 쓰였다. '동창이 밝았느냐…'로 시작되는 시조를 지은 조선 중기의 영의정을 지낸 약천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태천 스님을 그리며 시 「경주에서 태천상인에 주다[慶州贈泰天上人]」를 지었다. 헤어지는 아쉬움과 그리움이 교차하는 시에 음나무 꽃을 통해 변해가는 계절을 담았다.

나는 흐르는 물과 같아 되돌아갈 수 없지만

我如流水無歸去·아여류수무귀거

그대는 뜬구름과 같아 마음대로 오가네

爾似浮雲任往還·이사부운임왕환

객사에서 서로 만나니 봄이 저무는데

旅館相逢春欲暮·여관상봉춘욕모

음나무꽃 떨어져 뜰에 가득히 아롱져 있네

刺桐花落滿庭斑·자동화락만정반

<『약천집』 권1>

◆귀신도 무서워하는 나무?

음나무의 어원과 관련 다양한 설(說)이 있다. 옛 문헌에는 음나무를 엄나무라고 했다. 『동의보감』 한글본, 『역어유해』, 『물명고』 등 옛 문헌에는 '엄나모'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상진 전 경북대 교수의 『우리 나무 이름 사전』에는 "어릴 때 험상궂은 가시가 촘촘하므로 가시가 엄(嚴)하게 생겨서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그러나 엄나무의 한자 '엄'은 옛 문헌마다 다르게 나온다. 奄木(『산림경제』), 掩木(『한약집성방』), 欕木(『역암집』) 등 한자의 소리는 같지만 뜻은 다르다. 아마 한자의 뜻과 관계없이 음만을 빌려 쓴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름 유래의 다른 견해는 유기억 강원대 교수가 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나무 이야기』에 나온다. 음나무 가시가 날카로워 귀신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막아준다는 전설과 관련돼 있다. "이 나무로 '음'이라는 육각형의 노리개를 만들어 어린아이의 허리춤에 매달아줬다고 하며 이 노리개를 '음'라고 했다고 한다." 즉 '음'이라는 부적용 노리개를 만드는 나무라는 뜻에서 음나무의 이름을 유추했다.

사악한 기운을 막기 위해 음나무를 이용한 사례는 여러 군데서 확인된다. 조선 후기 개화 정책에 반기를 든 경북 봉화 출신 강진규(姜晉奎, 1817~1891)는 「유엄목문(諭欕木文)」을 통해 음나무가 지닌 벽사(辟邪)의 의미를 풀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잡귀들의 안방 출입을 막으려고 가시 돋친 음나무 가지를 잘라서 대문 바깥쪽이나 안방 문 위쪽에 걸어두는 세시풍속이 전해온다. 여기에는 귀신이 들어오다가 가시가 목에 걸려 더 이상 들어오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무당이 잡귀를 물리치려고 굿을 할 때도 엄나무를 이용했다.

또 다른 견해는 『조항범 교수의 어원 이야기』에 나온다. 엄나무 '엄'의 어원을 '牙木(아목)'의 '牙'에 대응하는 중세국어 '어금니'와 더불어 '엄니'에서 근거를 찾고 있다. 크고 날카로운 포유류의 이빨을 가리키는 말인 '엄니'에서 '엄'을 따와 예리한 가시가 있는 나무의 이름으로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경북 안동시 길안면 안동 김씨 보백당 종택의 음나무.
경북 안동시 길안면 안동 김씨 보백당 종택의 음나무.

◆경북 음나무 보호수

경북에는 천연기념물은 아니지만 봉화군 춘양면 애당리, 예천군 은풍면 은산리,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 등에 수백 년 묵은 음나무 보호수가 몇 그루 있다.

애당리 음나무는 수령이 280년, 높이가 25m, 가슴높이 둘레가 3m를 넘는 큰 나무다. 줄기가 위로 비교적 곧게 뻗은 미끈한 수형이다. 느티나무들로 둘러싸인 당산나무 숲에서 단연 돋보여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우러렀을 것 같다. 당숲 가운데 제당이 있고 주민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정자도 있다.

예천군 은산리 음나무는 사과 과수원 옆에 느티나무와 함께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수령 350여 년, 가슴높이 둘레가 자그마치 5m가 넘는 노거수로 1972년 8월에 보호수로 지정됐다. 줄기가 몇 아름드리나 되는 거목을 주민들은 잡귀나 전염병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목으로 여겨왔다.

오랜 풍상을 온몸으로 겪은 노거수답게 큰 가지가 부러지는 등의 생채기가 남아 있어 외과 치료를 받았다. 여름에는 그늘이 넓어 마을 주민들과 길손들의 시원한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음나무 아래 독립만세운동비와 선정비, 영세불망비 등의 공덕비 4기도 눈길을 끈다.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의 음나무는 고갯마루의 옛 성황당 자리에 우뚝 서 있다. 가는잎음나무로 수령 200년, 높이 12m의 몸피를 자랑한다. 가는잎음나무는 음나무와 비슷하지만 잎을 보면 갈라진 부분이 깊고, 뒷면에 흰털이 있다. 잎의 갈래 조각은 음나무보다 좁으며 긴 타원 모양이고 톱니가 있으며 끝이 뾰족하다. 가지가 굵고 잿빛이며 폭이 넓은 가시가 많다. 생육 특성은 음나무처럼 어릴 때는 다른 나무 밑에서 생육하다가 성장하면서부터는 빛을 좋아하는 성질이 있다. 토심이 깊고 비옥한 곳에서 생육이 좋고 키는 약 25m까지 자란다.

음나무 굵은 줄기에는 가시가 없거나 무디지만 어린가지의 가시는 날카롭다.
음나무 굵은 줄기에는 가시가 없거나 무디지만 어린가지의 가시는 날카롭다.

◆가시 돋친 나무와 가시 돋친 설전

식물의 가시는 끝이 날카롭고 뾰족하게 목질화돼 단단해진 것을 아울러 부르는 말이다. 가시는 잎이나 턱잎이 변한 엽침(葉針), 껍질이 변한 피침(皮針), 가지가 변해서 된 경침(莖針) 등으로 나뉘며, 그 역할은 외부의 공격이나 해코지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음나무의 가시는 찔레나무나 장미, 산초나무와 같은 피침으로 힘을 줘서 밀면 나무껍질에서 떨어진다.

음나무의 가시는 맛이 좋은 음나무 어린 순이나 잎사귀를 노리는 초식동물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생존의 수단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음나무는 굵고 오래되면 줄기에 가시가 거의 없어진다. 어린나무나 사람이 인위적으로 가지치기를 많이 해서 키가 작은 음나무에는 가시가 전체적으로 빼곡하게 덮여 있지만 깊은 산속의 음나무는 가시가 비교적 적고 무디다. 왕성하게 성장하는 어린나무는 가시를 달아 그 위엄을 뽐내지만 줄기의 지름이 한 뼘쯤으로 굵어지고 키가 십여m쯤 자라게 되면 아래쪽의 수피부터 차츰 회색으로 짙어지며 가시는 거의 사라진다.

몇 년 전부터 가시 없는 음나무가 농촌에 보급돼 가시에 찔리지 않고 음나무 순 수확을 쉽게 할 수 있다.
몇 년 전부터 가시 없는 음나무가 농촌에 보급돼 가시에 찔리지 않고 음나무 순 수확을 쉽게 할 수 있다.

나무가 가시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을 거꾸로 생각하면 아직 외부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 정치권에서 정파의 이익을 위해 가시 돋친 설전을 서슴지 않는 건 아직 덜 성숙했기 때문일까?

조선시대 삼정승을 모두 역임한 박순(朴淳, 1523~1589)의 시 「여산군에서 행사 스님과 이별하며[礪山郡別行思上人]」를 감상해 본다. 엄나무 꽃 떨어지니 음력으로 6~7월쯤으로 짐작되며 이별의 안타까움이 음나무 새순처럼 쌉사래하게 묻어난다.

왕명으로 멀리 가는 길을 어찌 멈출까

王程那得駐征騑·왕정나득주정비

근심 밖의 푸른 산은 거의 석양빛

愁外靑山幾多暉·수외청산기다휘

금마석성 그대와 이별하는 지금

金馬石城相送處·금마석성상송처

엄나무 꽃 떨어지고 부슬부슬 비 내리네

刺桐花落雨霏霏·자동화락우비비

<『사암선생문집』 권1>

『대구의 나무로 읽는 역사와 생태 인문학』 저자·나무칼럼니스트 chunghaman@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