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농구 잘하는 선수' 안 나오는 이유…중·고연맹 기록지 부실한 탓

입력 2025-03-06 08:51:53

정확한 실력 측정 불가…입시 위해 득점에 치중한 선수 나올 수밖에 없어

남자농구 대표팀. 대한민국농구협회 제공
남자농구 대표팀. 대한민국농구협회 제공

'25점 10리바운드 5어시스트 3스틸 2블록슛.'

지난해 9월 열린 제54회 추계 전국남녀중고농구연맹전 남고부 결승전에서 맹활약한 한 선수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 선수가 슛을 몇 개나 던져 25점을 올렸는지는 알 수 없다. 얼마나 실책을 저질렀는지도 기록지에는 나오지 않는다.

10개 리바운드 가운데 공격 리바운드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도 전체 경기 영상을 따로 보지 않으면 알 길이 없다.

현재 중학교와 고등학교 농구 경기에서는 필드골 성공률, 실책, 공격리바운드 등 기본적인 지표가 집계되지 않는다.

6일 연합뉴스 취재에 따르면 한국중고농구연맹은 이틀전 상위 단체인 대한민국농구협회, 한국대학스포츠협의회(KUSF)와 이 같은 '기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를 진행했다.

중고농구연맹 측은 "일단 올해 안에 가능한 몇 개 대회만이라도 추려서 성공률, 실책, 공격·수비 리바운드를 세분화해 집계하는 쪽으로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연맹과 협회가 현 상황을 개선하려는 건 부실한 기록 집계로 유소년 선수들의 농구 실력이 정확히 측정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실제로 세부 지표가 나오지 않아 대학 입시에 쓰이는 경기 실적에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등 일부 공격지표만 '과대 계상'돼왔다는 게 농구계의 주된 인식이다.

잦은 실책을 저지르고, 무리하게 많은 슛을 쏴도 지표로 나타나지 않으니 '난사'에 가까운 플레이를 펼쳐도 기록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득점력이 뛰어난 선수'로 입시에서 좋게 평가받을 여지가 크다.

현장 관계자들은 경기 흐름을 읽고 공수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농구 잘하는 선수'가 나오기 어려운 구조라는 데 입을 모은다.

최남식 중고농구연맹 사무국장은 "입시에 유리한 개인기 위주 플레이가 많아져 현장에서는 팀플레이가 위축되고, 수비나 전술 이해도를 가르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고 밝혔다.

이어 "작년에 KUSF와 함께 전반기 3개 대회에 나선 일부 팀에서 3점 슈터라는 선수들의 성공률을 분석해봤는데 두 자릿수가 나오는 선수들이 많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청한 지방의 한 중학교 농구부 지도자도 "몇 개를 쏘던 점수만 많이 올리면 되는 상황이다. 지금 기록지는 살펴보는 의미가 없는 수준"이라며 "지도자로서는 딜레마"라고 말했다.

학계에서도 농구 발전을 위해 유소년 기록 세분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몇 년 전부터 나왔다.

용인대, 서원대 연구진은 2022년 발표한 논문에서 공정한 입시를 위해 경기력을 정확히 측정할 지표가 필요하나 현행 기록지로는 이를 산출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손대범 KBS 해설위원은 "입시에 필요한 기록만 챙기다 보니까 스크린, 공 없는 움직임 등 기본적인 게 등한시되는 분위기"라며 "대학에서 이를 새로 가르쳐야 하고, 또 프로에서도 다시 가르쳐야 하는 악순환이 나오고 있다"고 진단했다.

속공 득점, 경기 속도 등 세부 지표를 제공하는 KBL과 달리 중, 고교 농구 현장의 기록이 미비한 건 결국 인력과 예산 부족 탓이다.

프로농구는 기록 집계 등 경기 운영을 담당하는 인력으로 10명 이상이 한 경기에 배정된다.

반면 중고 경기에는 4명만 투입된다. 이중 순수하게 기록만 맡는 인력은 사실상 한 명이다.

현재 중고연맹과 협회의 계획대로 기록 집계를 일부 대회만 추려 도입하는 수준을 넘어 보편적으로 정착시키려면 안정적인 '돈줄'을 찾아내야 한다.

대한민국농구협회 관계자는 "프로처럼 하려면 기록원들이 많이 필요하다. 프로와 달리 중고 대회는 하루에 많게는 10경기까지 한 번에 진행된다"며 "인력을 마련해 대회 장소로 출장까지 보내려면 비용 문제가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이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여러 단체와 작년부터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며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하는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협회가 예산을 마련해 기록 집계를 시작하더라도 대학들이 입시에 준용하지 않으면 현장의 변화를 끌어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회의론도 나온다.

각 대학이 경기 실적을 평가할 때 실책, 성공률을 활용하지 않고 기존처럼 주요 지표만 중시하면 득점 위주의 플레이를 장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프로 선수 출신의 한 유소년 지도자는 "나도 프로에서 와서 처음 기록지를 보고 의아했다"면서도 "성공률과 실책 등 지표 도입은 어려운 부분이다. (협회 행정과 별개로) 입시 기준이 바뀌지 않으면 그에 맞출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