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김재구 경남도립거창대 총장의 어머니 고(故) 이계분 씨

입력 2025-01-30 12:43:33 수정 2025-01-30 17:58:25

자식교육의 위대함을 실천하신 존경하는 어머니

김재구 거창대학총장과 어머니 이계분씨.김재구총장 제공
김재구 거창대학총장과 어머니 이계분씨.김재구총장 제공

오늘은 설 연휴의 시작이다. 하지만 연휴도 없이 미국으로 출장을 다녀와야 한다. 지금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망망대해 태평양 상공에서 어둠이 짙게 두른 순항고도 1만2천m 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쩌면 이 높이가 어머님 영혼을 젤 가까이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래서 더욱 보고 싶고, 가슴 깊이 그립고 서럽고 눈물이 절로 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느낀다고 해서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 한다.

특히 올해는 양 부모님이 모두 타계하시고 첫 명절이니 더욱 사무친다. 나는 진실로 어머니의 일생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희미한 기억속에서 한없이 고귀한 사랑의 편린을 일부만이라도 후손에게 꼭 전하고 싶다.

어머니께서는 경북 의성군 안계면에서 5남4녀 중 장남으로 가난하였지만 성실한 농부의 아내였다. 첫 고난의 시작은 결혼 후에 큰 형님을 임신 중에 아버지께서는 경기도 연천으로 군복무를 위해 입대하셨다.

그리고 시골에서 농번기에 낮에는 밭과 논에서 일하시고, 밤에는 호롱불 아래에서 홀치기 하시던 억척스러운 어머니셨다. 또한 어릴적 기억에는 동네에 잔치가 있는 날이면 어머니께서는 집에 오실 때 싸오신 음식을 어머니께서도 배가 고플 테신데 자식 입에 넣어 주시며 행복해 하셨던 천사이셨다.

70년대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께서는 가난한 형편에 한번도 육성회비를 납부 일을 넘겨 내 시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밥을 하시면서 저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셨고 틀리면 정확하게 다시 읽으라고 하시곤 하였는데 참으로 총명하셨다.

1985년 대학 졸업 후 ROTC로 입대 직전에 대학원에 합격하여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등록금을 부탁하였다. 그 때 어머님께서 "구야 우리 형편에 대학만 나오면 되지 대학원 진학을 꿈 꾸노" 하시면서 슬피 우셨다.

그런데 그 날 해질녘에 우시장에 다녀오신 아버지께서는 "소 한 마리 값이 입학금하고 등록금하고 딱 맞구나" 하시면 돈을 주셨다. 당시 농사에 제일 소중한 소를 팔아서 자식의 등록금을 마련한 우골탑(牛骨塔)이라는 그 암울한 시대를 견뎌내신 어머님은 정말 장한 여장부였다.
그럼에도 아픈 기억을 너머 어머니께 기쁨을 드린 몇번의 추억은 아직도 내 삶에 힘이 되고 있다.
부모님께서 필생의 염원이 자식이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1987년 8월말 중등교사 발령 소식을 듣고 태양이 작렬하는 더위 속에서 밭에서 깨를 떨고 계시던 부모님께 단숨에 달려가 "발령 받았습니다"라고 외치니 어머니께서는 뛸 듯이 기뻐하셨다, 그리고 유학 시절인 1994년 아버지께서 회갑 년을 맞이하여 어머님과 함께 필리핀 마닐라로 여행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늘도 무심하게 평생을 일만 하시던 어머니께서 2018년 3월말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어머니께서 평소에 "니 아부지 보다는 내가 하라라도 더 살아야 할텐데…"하셨다.

그 말씀 속에 부모님의 깊은 사랑 담겨있음을 알고 있지만 어버지께서 그해 11월에 임종하실 때에는 어머니께서 곁을 지킬 수 없었으니…. 6년의 투병생활 끝에 올해 임종 전에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눈을 뜨셔서 자식과 후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시고 편안한 모습으로 영면하셨다.

한 평생 살았던 고향 집이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곳 어버지 옆에 어머니를 모셨다. 부모님께서는 평생을 농사로 흙과 함께 사시면서 땅과 땀을 통해 자식에게 정직함과 성실함을 가르쳐 주신 분이셨다.

어머니께서 그 토록 염원하시던 교육자가 되고 대학 총장이 되어 먼 미국으로 출장을 가면서 내 머리에는 조선중기 박인로의 시조가 맴돌고 있다.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 길이 없을세 그로 설워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