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욱의 대구문화 오디세이] 대구가 주역이 된 역사적 사건

입력 2025-01-19 13:58:02 수정 2025-01-19 17:34:30

오동욱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국채보상운동기념비(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제공)
국채보상운동기념비(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제공)

◆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대구 이야기'를 시작하며

대구는 아주 오래전부터 성숙한 문화적 자산은 물론, 역사성과 다양성을 보유하여 온 도시다. 선사시대부터 이루어 낸 독특한 문화를 시작으로 3대 문화권(가야·불교·유교문화)의 전통을 잇는 영남문화의 중심으로 크고 작은 족적을 다채롭게 남긴 도시다. 오랜 세월 여러 영역에서 뚜렷한 뿌리를 가져 한국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으며, 이를 통해 이 땅의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또한 국난에 임해서는 그 극복과정의 중심에 있었던 지역으로 의병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선도했으며 2·28민주운동을 통해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지평을 열었다.

한 지역의 정체성은 역사적 축적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자 미래를 위한 창조의 대상이다. 또한 내적으로는 동질성과 소속감을 강화할 수 있고, 외적으로는 차별화의 수단이 된다. 대구의 정체성은 대구만이 가지고 있는 전통과 문화를 꾸준히 재해석하고, 이것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안정적인 정책이 뒷받침되어야만 지속될 수 있고 시민들의 삶 속에 투영되고 체화될 수 있다.

망우당 공원에 있는 곽재우 동상. 매일신문 DB
망우당 공원에 있는 곽재우 동상. 매일신문 DB

과거로부터 이어온 자산을 현재와 미래 영역의 창의성을 이끌어내는 동력으로 활용해야 한다. 옛것과 새것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을 때 더 강해지는 것이 문화이기 때문이다. 이는 효과적인 지역 알리기와 융합형 문화 뿌리 이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그 참모습을 알게 되고, 또 알면 알수록 그 가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앞으로 이 지면을 빌어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대구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즉 역사자산, 인물과 사건, 예술과 공간 등을 대상으로 대구의 뿌리와 줄기의 형성 과정을 압축적으로 재구성해 대구를 더 깊이 알고 넓게 알아보고자 한다.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선 '구국의 도시'

오늘은 그 첫 번째 주제로 대구가 주역이 된 역사적 사건이다. 대구는 전통적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극복의 중심에 서 있었던 지역이다. 의병운동과 독립운동 등 다양한 구국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을 유지·발전시키는 밑거름이자 구심점 역할을 해 왔다. 고려시대 초조대장경은 불심의 힘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최초로 제작된 대장경을 말한다. 호국의 대장경이 보관되었던 곳은 팔공산 부인사다.

달성토성에 있는 광복회 결성지.매일신문 DB
달성토성에 있는 광복회 결성지.매일신문 DB

부인사 초조대장경은 합천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보다 약 200년 정도 먼저 제작되었다. 대구는 임진왜란과 조선말 위기 등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의병운동을 선도적으로 실천했다. 팔공산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동화사에 사명대사가 왜적에 대항하기 위해 승병사령부를 지휘했다. 부인사에서는 정사철과 서사원, 손처눌 등을 중심으로 의병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대항했다.

또한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인 홍의장군 곽재우와 약관 24세의 의병장 우배선 등을 중심으로 왜군의 침입에 대항했다. 조선말 명성황후 시해 후 최초의 의병장도 대구 달성 출신 문석봉이다. 문석봉의 의병활동은 향후 전국적 의병운동으로 확산되는 도화선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최초로 거병한 의병장도, 조선말 을미사변 때 최초로 거병한 의병장도 모두 대구지역 출신 인물들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의 대표적 항일독립운동 단체들이 대구에서 결성되었다. 앞산의 안일사에서 영남지역 독립투사들이 중심이 되어 비밀결사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했다. 그 후에 항일 결사 중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평가받는 '광복회'가 대구 달성토성에서 결성되었다.

경상감영공원에 있는 1900년대 선화당.매일신문 DB
경상감영공원에 있는 1900년대 선화당.매일신문 DB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대구는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그 중요성이 커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1601년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된다.경상감영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체를 관할하던 거대 관청이다. 경상도 전체를 총괄하기 위한 감영(監營), 대구도호부 자체를 관할하는 부아(府衝), 대구진관의 군사행정 조직인 진영(鎭營) 등 삼원적(三元的)인 행정체계가 수립된 것이다.

이후 대구는 정치‧경제‧군사 등 모든 부문에서 경상도 전체의 중심지가 되면서 전국 3대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경상감영에서는 전국 최초로 대구약령시가 세워지고, 대구읍성 밖에 조선시대 3대 시장 중 한 곳인 서문시장이 활기를 띠면서 지역 경제가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이후 대구는 모여드는 많은 사람과 재화·용역에 의하여 상업적 기능이 크게 강화되기 시작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전시실.매일신문 DB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전시실.매일신문 DB

◆격변의 근‧현대기, 역사적 사명 선도

대구는 조선말 애국계몽운동의 중심 위상을 차지하면서, 역사상 최초의 국민운동으로 평가받는 국채보상운동을 거국적으로 전개했다. 당시 일제는 우리나라를 경제적으로 예속시키려는 술수로 강제로 차관을 도입하게 했다. 이에 대구의 김광제와 서상돈 등이 제안해 2천만 동포가 3개월 동안 금연을 하고 그 돈으로 제국주의 일본이 강제로 빌려준 1,300만 원의 채무를 갚고자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다.

국채보상운동은 위태로운 시기 국권을 지키기 위해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전국 방방곡곡의 남녀노소 모두가 참여한 운동이다. 스스로 나라 빚을 갚아 경제적 예속으로부터 구하자는 경제주권회복운동이자 민족경제 부활의 큰 물줄기였다. 현재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된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와 함께하는 유산이 되었다.

6‧25전쟁기 대구는 대한민국 임시수도 역할을 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보루(堡壘)가 되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대한민국을 마지막까지 지켰다. 대구는 전쟁 중에 피난민을 수용해야 하는 포용의 공간이자 우리나라 정치·경제·문화뿐만 아니라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심지 역할을 했다.

2·28학생민주운동.매일신문 DB
2·28학생민주운동.매일신문 DB

또한 대구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최초의 민주화운동인 2·28민주운동을 일으켰다. 2·28민주운동은 1960년 2월 28일, 정권의 부정부패와 실정에 항거해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이 자발적이고 민주적으로 일으킨 학생운동이다. 이 운동은 한 알의 불씨가 되어 3·15마산의거를 거쳐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현재 2‧28민주운동은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효시(嚆矢)로 평가받으면서 2월 28일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된 기초를 놓은 산업근대화에서도 대구가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형성된 대한민국의 주요 산업단지로는 서울 구로공단과 부산 사상공단, 대구 제3공단 등이 대표적이었다. 대구는 제3공단과 그 뒤의 염색공단 등을 통하여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끌었던 견인차로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국가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대구에서 태동했거나 중심이 되어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구는 독립운동과 호국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 등의 구국 정신을 통해 대한민국을 유지·발전시키는 밑거름이자 하나로 통합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 온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면서,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되새겨주는 유서 깊은 도시가 바로 대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구에서는 국채보상운동과 2‧28민주운동 등과 같이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추진한 움직임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더 자랑스럽다.

오동욱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오동욱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오동욱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