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 호모에스테티쿠스] <49> 구약의 '창세기': 야곱, 성경 최고의 사랑꾼

입력 2024-12-09 08:32:50 수정 2024-12-09 19:44:35

이경규 계명대 교수

라헬과 야곱 관련 이미지. 윌리엄 다이스 작
라헬과 야곱 관련 이미지. 윌리엄 다이스 작
이경규 계명대 교수
이경규 계명대 교수

성경의 인물 중에 야곱만큼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남겨놓은 인물도 없다. 그의 147년 삶은 한 편의 대하 드라마다. 그만큼 그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다. 사실, 야곱은 도덕적으로 결함이 많은 인물이다. 형과 아버지를 기만하고, 외삼촌에게 계교를 써서 재산을 모으고, 과도한 자식 편애로 가정불화를 불러일으켰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총애를 받아 믿음의 조상으로 등재되는가 하면, 그의 두 번째 이름(이스라엘)은 나라의 이름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고 신비로워서 이성적·도덕적 잣대로는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시각을 좀 바꾸어, 야곱의 인생을 문학적으로 보면 놀라운 미덕 하나가 드러난다. 바로 사랑이다. 야곱과 라헬의 러브스토리를 두고 하는 말인데, 여기에 야곱의 최고 미덕이 내장되어 있다.

야곱은 형(에서)을 속였다가 쫓기는 신세가 되어 700km가 넘는 하란(Haran)의 외삼촌(라반) 집으로 도주한다. 해거름에 하란의 우물가에서 한 아리따운 처녀를 만난다. 운명처럼 첫눈에 반하는데, 외사촌 라헬이다. 야곱은 장정 몇 명이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육중한 우물 뚜껑을 혼자 밀어제치고 라헬의 양에게 물을 먹인다. 여자처럼 피부가 매끄럽고 집에서 가축이나 돌보던 야곱에게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미스터리다. 라헬에 대한 폭발적인 격정을 말하는 사건이 아닌가 생각한다. 게다가 처음 만난 여자 앞에서 엉엉 울며 입까지 맞추는 모습이 가관이다. 당시 관습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점잖은 남자가 취하기 쉬운 행동은 아니다. 그러나 야곱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한다. 이렇게 야곱은 용기와 감성이 충만한 로맨티시스트로 하란 무대에 등장한다.

첫눈에 반한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야곱은 14년 동안 무급으로 외삼촌의 목축업을 돕는다. 뛰어난 머리와 성실함으로 외삼촌의 재산을 크게 불려준다. 원래는 7년 일하는 대가로 라헬과 결혼하는 계약이었지만, 결혼식 날 라반이 야곱에게 술을 진탕 먹인 후 신방에 라헬 대신 언니(레아)를 밀어 넣어 라헬과의 결혼은 7년 늦춰진다. 그렇게 약삭빠르고 간교한 야곱이 어떻게 저런 사기를 당했을까? 간단하다. 사랑 때문이다. 사랑에 빠지면 맹목이 되고 바보가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함에 7년을 며칠 같이 여겼다"(창29:17)고 하며 다시 7년을 기다린다.

라헬을 향한 야곱의 일편단심은 그녀가 "곱고 아리땁다"(창29:17)는 사실만으로는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집에서 쫓겨나 수천 리를 걸어 물설고 낯선 땅에 다다랐는데 운명처럼 연줄을 봤다면, 그것은 절망의 바닥에서 솟아난 빛이었고 하나님이 보낸 사인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뒤에 나오듯이 라헬은 인간적으로 문제가 많은(우상 신앙, 질투) 여자지만 야곱에게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야곱의 첫사랑은 평생 사랑이 된다. 훗날 라헬이 둘째(벤야민)를 낳다가 죽자 야곱은 베들레헴에 장사지내고 묘비까지 세워준다. 성경에 장사 지내줬다는 여자는 몇 명(사라, 미리암) 나오지만 비석을 세워 준 여자는 라헬이 유일하다.

아들이 최고의 가치였던 당시에 레아는 야곱에게 아들을 여섯 명이나 낳아준다. 그런데도 야곱의 사랑이 불임의 라헬에게서 레아로 넘어가지 않는다. 야곱의 라헬 사랑은 그녀가 천신만고 끝에 낳은 요셉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요셉을 보고서야 야곱은 귀향을 결심한다. 아들로 말하자면 그에게는 이미 10명의 건실한 아들이 있었다. 요셉의 존재는 10에 1이 추가된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그의 요셉 편애가 얼마나 심했던지 열 명의 형들이 어린 요셉을 귀여워하기는커녕 몰래 이집트로 팔아버릴 정도였다. 대를 이은 야곱의 일편단심이 놀라울 정도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처음 사랑'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지 강조한다.(계2:4) 베드로의 말처럼 야곱의 사랑은 라헬의 '온갖 허물을 다 덮어버린다'(벧전4:8). 불합리하고 맹목적으로 보이는 야곱의 사랑, 이게 사랑의 신비이고 하나님이 역사(役事)하는 한 방식이기도 하다.

야곱의 사랑은 이전의 권위적이고 생물학적인 마초들의 여성관과 큰 차이를 드러낸다. 황혼이 내리는 우물가에서 여자에게 키스하며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그의 할아버지(아브라함)나 아버지(이삭), 그리고 형(에서)한테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부인을 누이라고 속인 적도 있고 에서는 세 명의 여자를 아내로 취하지만 인격적인 관계 같은 것은 흔적도 없다. 그들에게 여자는 취하는 대상물이었다. 야곱은 성경 사상 여자를 '취함 '의 대상이 아닌 연애의 대상으로 격상시킨 최초의 남자다. 야곱을 두고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로맨티시스트니 연애결혼의 선구자니 하는 것은 공연한 수사가 아니다.

야곱의 놀라운 로맨스는 개인적 특수성으로 볼 수도 있지만 문화사적 맥락에서 보면 색다른 의미가 도출된다. 야곱의 사랑은 형 에서(Esau)가 대변하는 적자생존의 수렵 채취문화와 대비되는 혹은 그것을 극복한 농경 목축문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내일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철저히 자연환경에 의존하는 수렵사회에서 7년 후를 기약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즉, 사냥꾼 에서가 현실적으로 도움이 안 되는 여자를 사랑이란 이름으로 몇 년이고 기다린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미래를 기획하는 것은 한곳에 정착하여 가축을 키우고 농사를 짓는 야곱에 와서야 가능하다. 활을 들고 산천을 뛰어다녀야 하는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이니 축복이니 하는 미래적 개념은 눈앞의 밥 한 그릇보다 못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릴 만큼 미래를 생각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에서와 야곱의 대립은 수렵문화에서 농경문화로 넘어가는 과정을 서사화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당장 허기를 채우는 죽 한 그릇보다 장미 한 송이에 더 큰 미학적 가치를 두는 여유는 후자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즉, 야곱의 미적 경향과 로맨스는 농경 목축 문화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한다. 세계 문학사도 유사한 흐름을 보여준다. 즉, 초기에는 남성 중심의 투쟁 정복의 서사가 주류를 이루다가 점차 섬세하고 감성적인 로맨스가 등장한다. 성경이 허다한 도덕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영웅적인 인물로 띄우는 것은 그가 역사 문화적 진보의 한 축을 담당한 사람이기 때문이지 않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