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으로 피란 문인과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대구 향촌동은 한국 문단의 중심지이자 문화예술의 요람(搖籃)이 되었다. 이른바 '향촌동 시대'는 1960, 70년대까지 그 잔영을 드리우며 숱한 낭만적 일화를 남겼다. '깡패 시인과 춘화도' 얘기도 그때 나왔다.
'깡패 시인'이란 일본 메이지대(明治大) 유학 시절 '조선의 협객'으로 이름을 날렸던 박용주의 별칭으로, 같은 일본 유학파인 구상 시인이 향촌동에서 그를 '용주 시인'이라 부르며 자신을 '구상 깡패'라고 칭한 것에서 비롯된 풍자적 호칭이다. 박용주는 실제로 구상 시인의 권유로 시를 썼고, 이중섭 화가를 돌봐 주며 그림을 배웠다. 특히 춘화도(春畵圖)를 잘 그렸고 상당수 작품이 남아 있을 것이란 호기심 어린 풍문이 문화예술계 안팎을 맴돌았다. 지난여름 실체를 드러낸 박용주의 화첩(畵帖)이 바로 그것이다.
화첩을 공개한 사람은 4·19혁명 시인으로 유명했던 김윤식의 장남인 김약수 경산학연구원장(전 경산예총 회장)이었다. 경산 용성에 있는 고택 수리와 선친의 유품 정리 중 발견한 것이다. 박용주와 김윤식 두 사람의 깊은 교유(交遊)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김 원장은 내친김에 '박용주 선생 생애와 춘화도 화첩 발견 의의'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김 원장은 평생 불의한 주먹 한 번 휘두른 적이 없는 협객(俠客)을 '깡패 시인' '주먹 화가'로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이중섭의 화풍이 짙게 스며 있는 박용주의 작품들을 매각해 선친인 김윤식의 문학과 시대정신을 기념하는 공간을 만드는 데 활용하고 싶다고 했다.
일본 유학파인 김윤식 시인은 교직과 언론에도 종사했던 '농부 시인'이자 '혁명 시인'이었다. 직접 농사지은 땅콩을 팔러 대구로 나왔다가 2·28 학생 시위대와 마주하면서 혁명시 '아직도 체념할 수 없는 까닭은'을 이튿날 조간 신문에 공개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어 4·19를 기념하는 '4월의 종이여' 등을 발표하며 요시찰(要視察) 인물이 되자 아예 고향 용성으로 들어가 다시 농부가 됐다. 대구 '향촌동 시대'의 풍운(風韻)과 낭만(浪漫)이 어린 협객의 화첩이 대구의 정신을 대변했던 혁명 시인의 뜻을 기리는 데 값진 유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joen040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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