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이 깃든 터를 그리며
오솔길을 오른다. 오래된 마을을 지나 산기슭이 품어 키운 오솔길을 오른다. 무성한 숲과 풀들이 딛고 일어선 개울엔 그들만의 삶이 흐른다. 새가 우는 소리,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좋다. 나무가 키운 그늘에 몸을 맡기니 걷고 있으면서도 쉼이 차곡차곡 쌓인다. 목적한 곳이 있어 멈추지 않는 걸음일지라도 한없는 여유와 쉼이 깃든다. '쫓기고 있는가? 아니다.', '여유로운가? 그렇다.'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고 답을 하며 어느새 마음의 안정을 취하고 있는 나를 본다.
쫓기듯 살았다. 하루도 여유롭지 못했다. 쉴 수 없었다. 그땐 미래가 온통 불투명했다. 막막한 미래 속에 단 하루도 게으를 수 없었다. 나를 돌아볼 여유도, 나를 위로할 쉼도 없었다. 반 백을 훌쩍 넘어섰다. 어느새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해졌다. 남은 생(生)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이쯤에서 내일을 생각해 본다. 더 이상 아등바등하지 않기를 바란다. 여유롭기를 바란다. 쉼이 깃든 마음 편한 터를 만나기를 소망한다.
◆우리도 러브하고 싶다면
이른 새벽, 번잡한 도시를 떠난다. 쉼이 필요하다. 그런 곳이 있을까? 있을 것 같다. 무작정 안동으로 향한다. 길안면 묵계리, 어느 숲속에 앉은 집을 만나고 싶어서다. 분명 내가 찾는 쉼이 깃든 집이리라. 한 드라마 장면에서 또렷하게 잡힌 한 채의 정자가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다.
남녀 주인공은 그 집 앞에서 말했다. "우리 러브 합시다." 모든 게 정지되었다. 가슴 한구석에 무지근한 통증이 일며 감정의 소용돌이가 충만하게 차올랐다. 숱하게 지나간 어느 장면보다, 어떤 대사보다 이 집 앞에서 이루어진 이 짤막한 대사가 오랜 여운을 남긴 게다. 이 집이기에 가능했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미움과 증오와 슬픔은 사라지고 오직 사랑하고 싶은 마음만 남는다. 세상 고난과 시련을 겪어온 이들마저도 불안과 분노와 슬픔에서 무장 해제될 만큼 여유와 쉼이 스민 집이 아닐까 생각했다.
만휴정(晩休亭)이다. 조선 중기 문신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 지은 집으로 살림집 외에 한적한 곳에 따로 지은 별서 정자다. 만휴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김계행의 살림집 '묵계종택'과 김계행과 응계 옥고 선생을 배향하는 '묵계서원'이 있다.
◆만고의 청백리, 보백당 김계행
김계행은 유교적 의리를 바탕으로 한 강직한 인물이었다. 호는 보백당으로 "우리 가문에는 보물이 없으니,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다."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가만히 보니 만휴정이 보물이다. 요란하게 잘 지은 정자여서가 아니다. 만휴정이 청결한 쉼을 품고 있어서다.
김계행은 50세의 나이에 사헌부 감찰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비록 늦은 나이였으나 지치지 않는 열정과 충직한 자세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신하로서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의 간언을 부담스러워한 조정이 그를 고령 현감으로 좌천시키기도 했으나, 그곳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20년 가까이 임금을 충직하게 받들며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김계행이 벼슬을 그만둔 직후, 세상은 격변한다. 보통 격변이 아니다. 사람이 떼로 죽어 나갔다. 김계행은 연산군 초기에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여러 번 간언한다.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계행은 낙향을 선택한다. 연산군이 폭정과 사화를 일삼기 시작하자 세상은 점점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연산군이 일으킨 사화 때문에 출중한 많은 사림들이 목숨을 잃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김계행은 몇 번의 옥살이를 했으나, 다행히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세상이 그를 살린 셈이다.
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폐위되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사화의 후유증은 두려울 정도로 깊었다.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무고가 횡행하는 잔혹한 시대였다. 잔혹하고 뒤숭숭한 격변의 세상을 김계행은 만휴정에 파묻혀 쉼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휴정에서 살아온 날을 회고하며 느꼈을 김계행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자못 궁금하다.
◆원림의 집, 만휴정
만휴정은 원림 속에 깊이 파묻혀 있다. 숲이 감싸 안아 멀리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을을 지나 경사가 완만한 언덕을 천천히 오르다 보면, 계곡 너머로 겨우 처마 곡선만 고즈넉하게 드러낸다.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이고, 새소리가 들려온다.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조급함은 이곳의 평온함과 여유를 방해할 뿐이다.
원림은 정원과 다르다. 원림이 자연적이라면 정원은 인공적이다. 원림이 전통적이라면 정원은 근대적이다. 한국인의 집은 본래 원림의 집이다. 원림은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미를 추구하지만, 정원은 인간의 손길로 가꾸어진 인공미를 강조한다. 그렇기에 원림이 더 마음에 든다. 흔히 원림을 호남문화의 사례로 이야기하지만, 이렇게 영남 땅 안동 길안에도 원림이 있다.
만휴정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한다. 아슬아슬하지만 위험하지 않다. 아래로는 얕은 계곡이다. 바위에 부딪히는 물소리가 좋다. 계곡물은 송암폭포가 되어 더 아래로 흘러내린다. 다리 위에서 잠시 살아갈 날을 그려보는 것도 좋다. 여기서 만은 모든 미래가 환할 것만 같다.
발아래의 물살이 지금껏 쉼 없이 살아온 시간을 씻어내듯 경쾌하게 흐른다. 외나무다리 끝에 작은 문이 활짝 열려 나그네를 반긴다. 큰 문이 아니다. 별서이므로 굳이 크게 만들 이유가 없다. 그저 사람 한 몸 들어설 크기면 충분하다. 작은 문은 오히려 만휴정의 아늑함과 소박함을 돋보이게 한다.
만휴정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면 세상만사의 근심이 사라진다. 원림의 풍경만 온전히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계곡 물소리가 어우러진다. 눈이 시원해지고 귀가 트일 것 같다. 자연이 주는 위로가 이런 것인가 싶어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는 것이 근심의 시작이다.
우리는 얼마나 불필요한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 고통받는가. 어디 근심만인가. 만휴정 밖의 저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나 과한 근면과 성실을 요구한다. 그 과한 근면과 성실로 살다 보니 나 역시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어떻게 이 자리에 만휴정을 세웠을까. 만휴정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원림의 풍경이고, 귀에 들리는 것은 맑고 청량한 물소리다.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따스하게 내 몸을 감싸고,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는 마치 나에게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라고 속삭인다. 만휴정에 앉아 있으면 나 역시 김계행처럼 청백한 삶이 그리워진다.
어디 그뿐인가. 마음이 서서히 풀어져, 이곳에서는 몸을 뉘어 깊은 숙면에 빠질 수 있을 것만 같다. 세상 모든 일을 뒤로 하고, 오직 이 순간의 쉼에 몸을 맡긴다. 쉼이 가득한 안동 길안의 만휴정에서 나는 여유로운 위로를 받는다. 만휴정에 이르러 비로소 무념의 쉼에 이른다.
글사진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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