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좌절 끝에 핀 들풀시조문학관, 우리 정서 나누는 '공유의 시대' 오길"

입력 2024-10-23 10:20:57

민병도 관장, 30년간 모아온 시조 자료 집대성…3년간 준비
2006·2015·2019년 지자체와 시조문학관 추진 세차례 무산
낭송회·국제 교류 등 부대행사 추진, 번역 시조집 등 꾸준히 발간
"시조문학관을 기지로 현대시조 대중화·국제화 달성할 수 있길"

민병도 들풀시조문학관 관장, 시조시인. 문학관 2층 배경의 그림은 민 관장이 직접 그린 그림이다. 최현정 기자
민병도 들풀시조문학관 관장, 시조시인. 문학관 2층 배경의 그림은 민 관장이 직접 그린 그림이다. 최현정 기자

1천년 역사를 지닌 시조임에도 체계적으로 모으고 관리하는 번듯한 국·공립 문학관이 없다는 사실에, 반세기를 시조와 함께한 민병도 시조시인은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천에 옮겼다. 공립문학관을 기획해 예산까지 확보하고도 세 차례 무산됐지만 포기하지 않고 사비로 세운 사립문학관이 26일 문을 연다. 입장료도 따로 없다.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고 쉽게 말하는 그를 보며, 이번 문학관엔 가치를 좇아 살아온 그의 인생이 담겨 있는 듯했다.

- 개관을 앞둔 '들풀시조문학관'은 오로지 민간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건립하게 된 계기와 그간의 과정들을 듣고 싶다

▶시조의 천년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대단한 국가 자산이고 민족 유산이라는 점에는 모두 공감하지 않나. 이를 어떻게 가치화하고 보존해서 미래 세대들이 빛나는 유산이라고 실감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게 책무라고 여겼다. 그러나 시대별로 그런 부분이 너무 소홀하게 다뤄지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었고, 시조에 몸 담은 지 올해로 50년이 됐는데 나부터 외면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귀중한 자료는 일단 모으고 보자"해서 헌책방, 중고 사이트를 통해 모으기 시작한 게 30년이 됐다.

차츰 자료들이 모아지면서, 이 자료들을 나와 시조 스승인 이영도 선생님의 얼이 서린 청도에 집대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2006년 청도군과 함께 시작했던 게 청도 소도읍 가꾸기 사업이었다. 민족시인의 자산을 후손에게 남기는 문화 공간을 조성하는 사업으로 예산과 설계까지 다 나왔지만 잘 안돼서 한 번 좌절을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고 규모를 키워 '국립 시조원'을 추진하려고 했다. '국립'이 붙은 관청이 100종류가 넘는데 시조와 관련된 기관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경북대 산업협력단과 프로젝트로 추진해 설계 단계까지 들어갔지만, 정책 사업 반영에서 다른 사업에 밀리면서 엎어졌다. 마지막으로 5년 전부터 다시 준비를 한 끝에 지역 균형 개발 특별사업에 선정되면서 국도비 19억, 청도군비 16억 원을 확정받았다. 그런데 착공 당시 군수가 돌아가시면서 예산 집행이 정지되고 사업이 완전히 무산됐다.

일련의 과정들을 겪으니 규모가 작아지더라도 원래의 취지를 살려, 2018년 국회를 통과한 문학진흥법에 따라 사립문학관을 짓자고 결론냈다. 3년간의 준비 기간 끝에 오늘이 오게 됐다. 어떻게 해야 일반인들이 쉽게 시조 문학에 접근하고, 연구자들에겐 깊이 연구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구조 변경도 겪으면서 현재 180점의 자료를 등록했다.

시조문학 역사를 보여주는 문학관 내부 공간
시조문학 역사를 보여주는 문학관 내부 공간

-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시조의 가치는 어떤 것이 있는가

▶단계를 거쳐서 전해지는 정제미다. 같은 언어로 쓰였음에도 이영도 선생님의 시조를 처음 접했을 때 폭이 넓고 분방한 자유시와 달리 정립된 글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그것이 우리에게 남아있는 정서라고 생각한다. 또한 긴 역사 속에 남아있는 고전을 보면 시대별로, 그 나름대로의 판단이 다 들어맞음을 알 수 있다. 가보지 않은 길을 색안경 끼고 속단하기보단, 본질과 원형에 접근할 수 있으면 좋겠다.

- 50년간 시조 시인으로서, 또 화가로서도 살아오셨다. 문학관 설계와 건축에도 도움이 됐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1차원의 백지 세계를 표현하면서도 2,3,4차원의 공간을 상상해가며 평생을 살아왔기에 공간에 예술적으로 접근하게 되더라. 그런 점에서 공간을 잘 활용하되 효율적으로 구성하려 애를 썼다. 그림이나 글이나 표현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내면에 갖고 있는 가치를 추구해나간다는 개념에선 같다고 느껴진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게 개인적으로 상호 보완적이고 훨씬 더 많은 창작을 할 수 있었다.

들풀시조문학관 내부
들풀시조문학관 내부

- 시조문학관에 앞으로 기대하는 역할이 있다면

▶역사적으로 시조는 우리글이 없던 고려시대 중기부터 기록도 안된 상태로도 200년씩 구전으로 전해져왔다. 오늘날에 와선 사람들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을 풀어주고 정서적으로 공유할 수 있던 옛 가락의 정서가 희미해졌지만, 현대 시조를 통해 사람들의 정서를 노래하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이곳에서 적어도 20년이라도 가락을 읊조리며 정서를 나누는 그런 '공유의 시대'가 왔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가벼운 책자도, 낭송회 같은 부대행사도 계속해서 진행하면서 문학관을 통해 소프트웨어를 확장해나가겠다.

- 국제시조대회도 개최하는 등 시조의 국제화를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일본의 하이쿠는 국제 하이쿠 교류협회를 설립해 전 세계 33곳에 지부를 갖고 있고 국가 차원에서 나서서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국제 행사를 통해 이들이 어떻게 국제화를 시켜왔고, 시조가 장차 어떻게 갈 것인가를 들어오고 있다. 격년제로 실시 중이며 올해로 5회째를 맞았다. K-문화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그 문화의 시초 격인 시조 문학이 주목받는 시점도 반드시 온다고 본다. 오히려 미국에서는 석 줄 안에 온 우주 세계를 담아낸 시조의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 영어로 시조를 쓰는 대회를 수년째 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발맞춰 영어·일본어·중국어로 번역한 시조집도 꾸준히 발간 중이다. 이곳이 시조의 세계화의 전진기지로서 활약하길 바란다.

지난 21일 찾은 들풀시조문학관 전경과 민병도 관장
지난 21일 찾은 들풀시조문학관 전경과 민병도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