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일 경북대 교수회 의장
택시를 타고 이동하다 보면 기사가 급정거할 때가 있다. 옆 차선에 있던 차가 끼어들었기 때문이지만 이쪽이 양보하지 않은 탓도 있다. 이때 대다수 기사는 끼어든 기사 탓을 한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끼어든 기사를 비난한다. 내가 탄 택시 기사는 끼어든 기사를 비난하기 전에 내게 사과해야 했다.
나는 끼어든 기사와 거래하지 않았다. 승객에게 급정거 원인은 관심 밖이다. 책임 소재를 밝히는 것은 두 기사가 알아서 할 일이다. 승객의 관심사는 안전하게 빨리 가는 것이다. 안전하지만 늦게 가거나, 빠르지만 위험하면 승객이 짜증을 낸다.
정부와 의사 간 감정 대립이 격화됐다. 서로 말꼬리를 잡으면서 신경전을 벌인다. 의대 증원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인데 의사가 개혁에 저항한다는 말이 들린다. 그런 측면이 있다. 국민 다수가 여전히 의대 증원에 찬성하지만 그건 조건부 찬성이다. 의사를 잘 달래서 의료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조건이다.
대중(大衆)은 이기적이고 참을성이 적다. 의료 사태를 체감하면서 여론이 나빠졌다. 의료 사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부차적(副次的)인 문제다. 의료 사태로 국민이 짜증을 낸다. 짜증은 고스란히 지지율에 반영된다.
의대생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2학기 수업 출석률이 2.8%, 등록금을 낸 학생은 3.4%에 불과하다. 6개월 이상 정부가 압박을 가했고 여론이 나빴는데도 요지부동(搖之不動)이다. 의대생이 이 정도로 저항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학교로 돌아가면 배신자로 찍혀서 복귀하지 못한다는 해석이 있다. 동의하기 어렵다. 요즘 '젊은 애들'은 남의 눈치를 안 본다. 그러면 돈 때문인가? 나중에 개업했을 때 돈을 못 벌어서? 글쎄다. 의대생이 복귀하지 않는 진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베블런(Veblen)을 소환(召還)한다. 끊임없이 비교당하는 사회에서 남들의 존경을 받으려면 내가 돈이 많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한 가지 방법은 일하지 않고 노는 것이다. '빈둥거리기'야말로 확실하게 '돈 많음'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놀고먹는 사람에게는 하루가 24시간이지만, 8시간 일해야 먹고살 수 있는 사람은 하루가 16시간이다. 돈이 없는 사람은 빈둥거릴 시간도 없다. 아무나 놀고먹는 것이 아니다.
베블런은 놀고먹는 사람을 유한계급(有閑階級)이라고 했다. 대학은 유한계급의 시간 낭비가 잘 드러나는 곳이다. 돈이 아쉽지 않은 사람은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 돈이 안 되는 전공도 선택한다. 예전에 어떤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집에 돈이 많으면 학자가 되고, 집이 밥술이라도 먹으면 공무원을 하고, 집이 가난하면 회사에 취직해라." 예나 지금이나 학자나 지식인 중에는 유한계급 출신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유한계급이 인문학이나 과학과 같은 순수 학문에 전념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남과 다름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차별 욕구가 강하다. 요즘 말로 '관종'이다. 유한계급의 관심사는 재산, 명예, 지위로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학문보다 과시(誇示)가 우선이다. 평판(評判)이 중요하다. 명문 대학, 인기 학과 입학은 사치(奢侈)다. 사치는 아무나 못 한다.
올해 수시 전형으로 의대에 지원한 학생이 7만 명을 넘겼다. 작년보다 1만5천 명이 늘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의대 입학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 이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려면 삼위일체(三位一體)가 필요하다. 능력, 노력 그리고 경제력. 이제 우리 사회에서 의대 입학은 그 자체가 업적이다. 내가 뛰어나다는 증거다. 의대 입학은 과시이자 사치다. 아무나 '벤틀리'를 못 탄다고 한다. 틀렸다. 돈만 많으면 아무나 '벤틀리'를 탄다. 의대 입학은 돈만으로 안 된다. '아무나' 의대에 못 간다. 의대 입학은 '플렉스'다.
의대생 유급을 막기 위해 학기제를 학년제로 바꾸고 등록금 납부 기간을 연장했다. 출석 일수가 부족해도 시험만 통과하면 학년을 올려주기로 했다. 공정(公正)하지 않다. 엄청난 특혜다. 이런 편법(便法)을 써도 의대생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들은 화가 나 있다. '아무나' 의대에 입학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돈 때문이 아니다. '아무나' 의대에 입학하면 의대 입학은 '플렉스'가 아니다. 정부는 '요즘 애들'을 너무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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