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포플러 가로수가 사라진 까닭은?

입력 2024-07-24 13:13:33 수정 2024-07-24 18:47:28

강정고령보 아래 낙동강과 금호강 물길이 합쳐지는 달성군 죽곡리 두물머리에
강정고령보 아래 낙동강과 금호강 물길이 합쳐지는 달성군 죽곡리 두물머리에 '미루나무'로 알려진 덩치가 큰 이태리포플러 한 그루가 군계일학처럼 서 있고 오른 쪽에는 양버들이 강바람에 휘청거리고 있다.

♩포플러 이파리는 작은 손바닥

잘랑잘랑 소리 난다 나뭇가지에

언덕 위에 가득 아 저 손들

나를 보고 흔드네 어서 오라고♬

이원수 동시의 「나뭇잎」의 일부이다. 포플러(Poplar)는 보통 은백양과 미루나무, 이태리포플러를 가리킨다. 바람이 거의 없어도 팔랑거리는 포플러 나뭇잎 특성을 '잘랑잘랑 소리난다'고 재미있게 노래했다.

포플러 이파리는 둥근 삼각형인데, 잎자루가 잎보다 길고 납작하면서 가늘어 미풍에도 잘 흔들린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 양이면 파드득 소리를 내면서 나부낀다. 은백양이나 미루나무는 우리나라 토종 수목이 아니라 개화기에 서양에서 들여온 버드나뭇과의 일종이다.

포플러는 특정한 나무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서양에서 들어온 버드나무를 통칭하기도 한다. 식물 분류학적으로 보면 사시나무속 [포풀루스·Populus] 수종을 아우르는 말이다. 한반도에는 사시나무, 황철나무, 당버들 외국에서 도입된 미루나무, 양버들, 은백양, 이태리포플러 등이 같은 집안이다.

미루나무나 양버들은 1980년대까지도 우리나라 강변이나 밭둑 또는 시골의 학교 주변이나 비포장 신작로 가로수의 대표 수종이다. 고층 건물이나 높은 구조물이 흔하지 않았던 농촌 휑한 풍경을 키 큰 나무가 군데군데 서있어 그나마 랜드마크 구실을 해주었다. 번식력이 좋고 그늘을 잘 만들어 가로수나 조림수로도 많이 심었고 속성수로 빨리 자라기 때문에 경제수종으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씨앗의 하얀 솜털로 싸인 부분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꽃가루로 오해를 받아 "치워 달라"는 민원이 많았다. 또 주로 젓가락, 성냥개비, 나무상자, 가구를 만드는데 쓰이던 목재의 수요마저 플라스틱 제품에 밀리는 바람에 이제는 거의 심지 않는다.

이태리포플러는 장·노년층에게 가장 익숙한 포플러 종류다. 1960~80년대 하루빨리 숲을 푸르게 만들기 위해 성장이 빠른 속성수로 많이 심어졌다.
이태리포플러는 장·노년층에게 가장 익숙한 포플러 종류다. 1960~80년대 하루빨리 숲을 푸르게 만들기 위해 성장이 빠른 속성수로 많이 심어졌다.

◆어릴 적 아슴아슴한 추억

미루나무 따라 큰길 따라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따라

시냇물을 따라 한참을 가면 어려서 내가 다니던 우리학교……

「내 어린 날의 학교」의 노랫말에는 철부지의 추억이 오롯이 녹아있다. 6070세대의 마음 속 고향인 초등학교 주변이나 학교 가는 길에 수채화처럼 등장하는 게 미루나무다. 필자가 졸업한 시골의 초등학교의 위치는 옛 성터다. 성 둑에 올라서면 당시 '미류나무'로 불리던 양버들이 7번국도 신작로 양쪽 가장자리에 도열하듯 두 줄로 서있고 시간마다 흙먼지 날리며 읍내를 지나가는 시외버스의 모습이 아슴아슴하다.

양버들은 1970년대 시골 큰길의 가로수로 많이 볼 수 있었던 포플러 한 종류다. 양버들은 서양에서 들어온 버드나무라는 뜻이고, 미루나무는 미국에서 들어온 버드나무 혹은 아름다운 버들이라는 뜻의 '미류(美柳)나무'에서 나온 이름이다. 실제 원산지는 북미지역이다. 장·노년층의 귀에는 표준어 '미루나무'보다 '미류나무'가 더 익숙하다.

미루나무와 양버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에 도입된 탓일까? 일반인들은 두 나무를 구분하지 않고 미루나무라고 불렀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 걸려있네

솔바람이 몰고 와서

살짝 걸쳐놓고 갔어요

외국 곡에 박목월이 노랫말을 지은 동요 「흰 구름」에 나오는 미루나무는 양버들이 아닌가 싶다. 미루나무는 가지가 넓게 퍼지면서 자라기 때문에 수형이 약간 펑퍼짐하지만 양버들은 가지가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서 멀리서 보면 싸리 빗자루를 거꾸로 세워둔 모양새다. 꼭대기에 구름이 걸리려면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키가 높아 보이는 양버들이 동요에 더 어울린다. 나뭇잎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루나무는 잎의 길이가 폭보다 더 긴 삼각형이고, 양버들은 잎의 폭이 길이보다 더 긴 삼각 꼴이다.

금호강 하류 대구 산격대교 부근의 둔치 공원에 있는 양버들. 멀리서 보면 수형이 마당비를 세워둔 모양과 흡사하다.
금호강 하류 대구 산격대교 부근의 둔치 공원에 있는 양버들. 멀리서 보면 수형이 마당비를 세워둔 모양과 흡사하다.

◆헷갈리는 미루나무와 양버들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에 미루나무로 알려진 덩치가 큰 포플라가 강정고령보의 디아크를 지키고 있다. 몇 해 전에 후계목 몇 그루를 심고 낙동강 옛 이름인 '낙강'을 인용한 '신(新)낙강지락나무'라고 새겨진 표석도 놓았다. 장마 기간 날이 잠깐 드는 틈을 이용해 죽곡리를 찾았다. 줄기의 밑동 둘레가 3.7m 넘고 가지가 넓게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큰 풍채를 뽐낸다.

자세히 살펴보니 잎과 잎자루가 연결되는 부위에 선점이 보이지 않는 등 미루나무의 특성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이태리포플러로 보였다. 하물며 후계목은 가지가 하늘로 곧게 뻗은 양버들과 수형이 비슷한 게 다른 나무가 아닌가. 아마 양버들을 미루나무로 혼동해서 빗어진 일이리라.

대구 수성구 범어공원 자락의 테니스장 부근과 무학산 자락에도 미루나무 여러 그루 자란다는 지인의 귀띔에 확인해보니 역시 이태리포플러와 비슷했다. 대구수목원에서 발간한 「대구의 수목도감」에도 미루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대구에서 미루나무를 아직 보지 못했지만 한국 미루나무가 1970년대 한때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건이 있다.

1976년 광복절이 며칠 지난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연합군 초소 앞에 무성한 미루나무의 가지치기를 감독하던 미군 장교 두 명이 북한군 50~60명에게 도끼로 무참히 살해되는 이른바 '8·18 도끼만행'사건이다. 북한군의 야만성을 만천하에 드러낸 이 사건을 계기로 미루나무는 지금도 중장년층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

당시 포드 미국 대통령이 항공모함과 전폭기를 급파하면서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상황에 이르렀다. 사흘 뒤 유엔군이 미루나무 벌목작전을 밀어붙였고 김일성이 사과문을 보내면서 사태는 진정됐다. 지구상의 미루나무가 이 만큼 국제적인 집중조명을 받은 일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은백양과 수원사시나무를 교잡해 육종한 은사시나무의 잎 뒷면은 흰 솜털로 덮여 있고 수피 또한 은백색이라 바람이 불면 나무가 희게 보인다. 미세한 자극에도 잎이 유난히 떨리는데
은백양과 수원사시나무를 교잡해 육종한 은사시나무의 잎 뒷면은 흰 솜털로 덮여 있고 수피 또한 은백색이라 바람이 불면 나무가 희게 보인다. 미세한 자극에도 잎이 유난히 떨리는데 '사시나무 떨듯'이라는 표현은 이 나무에서 비롯됐다.

◆'사시나무 떨 듯' 유래

포풀루스속에는 우리 땅에 뿌리를 깊이 박고 사는 사시나무가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관용적인 표현에 '사시나무 떨 듯'이 있다. 잎자루가 길고 가는 반면 잎은 비교적 큰 편이라 미세한 바람에도 사시나무속 나무의 잎만이 유난히 팔랑거리는 현상에서 나온 말이다.

사시나무의 다른 옛말은 백양(白楊)이다. 경상도 일부지역에서는 사시나무를 '배양나무'라고 부른다. 수피가 하얗고 버드나뭇과 무리 중에서 가지가 위로 뻗는 나무를 양(楊), 가지가 아래로 처지는 나무를 류(柳)로 표현했기 때문에 백양으로 일컬었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백양을 무덤 위에 심는 나무 혹은 무덤을 비유하는 시어(詩語)로도 썼다.

"수레 몰아 동문 위로 올라가서, 북망산 묘지를 멀리 바라보니, 백양나무는 바람 속에 소소히 울어 대고, 넓은 길 양쪽에는 송백이 줄지어 섰네"[驅車上東門 遙望郭北墓 白楊何蕭蕭 松柏夾廣路]라는 인생무상을 읊은 한나라 「고시」(古詩)가 출전이다. <『문선』(文選) 권29>

고대 중국에서 죽은 사람의 신분에 따라 묘지에 심을 수 있는 나무를 정해줬는데 군주의 능에는 소나무를, 왕족의 무덤에는 측백나무, 고급 관리는 회화나무를, 학자는 모감주나무, 서민의 무덤에는 사시나무를 각각 심었다고 전해진다. 신분사회에서 백성은 벌벌 떨면서 굴종된 삶을 이어가라는 암시처럼 보인다.

고려시대 문호 이규보도 「옛날을 생각한다」(寓古)에 "아무리 친구와 말하고 싶은들, 유명이 다르거니 어이하리, 백양나무 바람은 쓸쓸한데, 석자 무덤만 솟았구나"[雖欲與人語 其奈幽明異 白楊風蕭蕭 三尺墳空峙]라고 묘지에서 소회를 읊었다. <『동국이이상국집』 권14>

한편 그리스신화에 포플러와 관련된 슬픈 이야기가 있다. 태양신 헬리오스의 아들 파에톤이 태양마차를 함부로 몰다가 세상이 멸망할 위기에 이러자 제우스가 벼락을 던져 파에톤을 어쩔 수 없이 죽였다. 파에톤의 누이들이 동생의 시신을 찾아 장례식을 치른 뒤 계속 슬퍼하다가 포플러로 변했다고 한다. 포플러의 잎이 심하게 팔랑거리는 이유가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누이들의 처절한 몸부림 때문일까?

클로드 모네의 포플러를 소재로 한 작품.
클로드 모네의 포플러를 소재로 한 작품.

◆포플라 잎의 떨림 예술로 승화

서양의 화가들은 햇빛을 받은 포플러 이파리들이 바람결에 살랑거리는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예술로 승화시켰다.

인상파 화가로 빛의 물결에 따라 풍경 연작으로 유명한 클로드 모네가 1890~1891년 사이에 포플라를 소재로 그린 연작은 빼놓을 수 없는 걸작으로 꼽힌다. 프랑스 고향 지베르니 집에서 몇km 정도 떨어진 엡트(Epte) 강둑에 줄지어 선 포플러 나무를 화폭에 담았다.

같은 풍물이라도 날씨, 계절 등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의 섬세한 떨림을 표현해 '빛의 화가'라 명성을 얻게 됐다. 모네가 작품을 계속 완성해 가는 동안 나무 주인인 리멧(Limetz) 마을에서 포플러를 목재로 팔아버렸다. 모네는 이 나무를 산 업자에게 돈을 주고 나무들을 그대로 뒀다가 연작을 마무리한 다음 목재상에 넘겨줬다고 한다.

한여름 낙동강 강바람이 두물머리의 포플러 이파리를 스치자 '떼창' 하듯이 파르르 환호한다. 강렬한 햇볕에 따라 손짓하는 듯한 이파리들의 율동은 윤동주의 시 「창공」이 떠올리게 한다.

그 여름날

열정의 포플러는

오려는 창공의 푸른 가슴을

어루만지려

팔을 펼쳐 흔들거렸다. (하략)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언론인 chunghaman@korea.com

<키워드>

사시나무= 학명은 Populus tremula L. var. davidiana (Dode) C.K.Schneid. 속명 Populus는 라틴어는 '인민, 평민, 대중'이라는 뜻으로 영어 people의 어원이다. 종소명 davidiana는 중국 식물 채집가이며 선교사인 A. David의 이름에서 따왔다. 은사시나무는 은백양나무와 수원사시나무를 교잡 육종한 나무다.

미루나무=학명은 Populus deltoides W. 종소명 deltoides는 '삼각형의'라는 뜻으로 잎의 모양에서 따왔다. 빨리 자라는 대신 수명이 70년으로 짧은 편이다.

양버들나무=학명은 Populus nigra L. 종소명 nigra는 흑질이라는 뜻.

이태리포플러= 포플러와 미루나무의 교잡해 육종한 수종으로 유럽에서 들여온 수종.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 경제수종으로 식목을 장려됐던 품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