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대업으로 가꾼 숲 아들에게도 산림 권했죠"
소나무 편백나무 낙엽송 키워 바이오매스 중대용 개발 진행
조림된 숲 이용 관광사업 목표
울릉도가 고향인 ㈜한신 한호철(84) 회장은 10대 때 단신으로 대구로 나와, 어려운 가정 환경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숱한 역경을 딛고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과자 공장 직원에서,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고교 교사로 사회 첫발을 내디딘 그는 창업에 도전, 위기 때마다 돌파구를 찾아가며 마침내 일가를 일궜다. 특히 1970년대 철도청 레일가공업 협력업체, 80년대 자동차용품 무역업으로 분야를 바꿔 회사를 키웠고, 90년대에는 자동차용품 100만불 수출을 달성해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문경 대규모 야산에서 산림사업을 하며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 ㈜한신은 어떤 기업인가요?
▶한신은 '한신양행'을 시작으로 40여년의 업력을 가진 기업입니다. 자동차용품 생산 및 수출입에 주로 종사하다, 2003년부터 산림사업을 주력으로 하고 있습니다. 경북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 일대 임야 260ha에서 72ha를 벌채 한 후에 수종갱신 조림을 하고 있습니다. 소나무, 편백나무, 고로쇠나무, 낙엽송 등을 키우고 있습니다. 산림용 비료 개발, 고추냉이(울릉도산 겨자냉이) 생산기술 개발 및 산약초 산업화 연구, 바이오매스 증대를 위한 조림방식 개발 등을 진행 중입니다.
중장기적으로는 100억원 이상의 직접 투자 및 유치를 통해 목재 고층 건물의 건축재 사업, 겨자냉이·고부가가치 산채 등 스마트팜 사업, 겨자냉이의 AITC성분을 이용한 퇴행성 뇌질환 개선물질 개발 사업, 겨우살이 성분을 활용한 항암물질 개발 등 바이오사업, 조림된 숲을 이용한 휴양 관광사업 등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 산림사업에 뛰어든 계기는?
▶오랫동안 사업을 하면서 부도를 맞기도 하고 세금 때문에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죠. 그러던 중 산과 나무에 애정을 갖게 됐고 산을 매입해 본격적으로 산림업에 도전했죠. 아들(한창훈 대표이사)에게도 대학 임학과 전공을 권할 정도로 산림사업에 푹 빠졌습니다. 나무는 정성을 들인 만큼 자라는 게 매력이예요. 울진 금강송으로 30여만 주 나무를 심었고, 춘양목은 수고가 10m 이상 자랐어요. 흉고 직경도 20cm 안팎이나 됩니다. 저보고 왜 멀쩡한 사업 그만두고 나무 키우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하게 됐고, 100년 대업이라는 생각으로 숲을 가꾸고 있어요. 현재 한신은 아들이 이어받아서 운영을 맡고 있습니다. 산림 관련 석·박사 출신들을 포함한 직원들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 산림사업의 어려움이 있나요?
▶무엇보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이다보니 자연의 힘에 대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병해충이나 산불 등에 대한 위험이 항시 존재합니다. 산림사업이란 장기간의 투자와 자금회전에 늘 애로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비춰 금융적, 정책적 지원은 다른 산업에 비해 현저히 뒤처져 있는 실정입니다. 예를 들면 주된 소득원이 무엇이냐에 따라 기업을 분류하기 때문에 산림사업을 주로 하고 있지만, 이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 첫 사업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대학(영남대 화공과) 졸업 후 철강회사에서 근무하다 서울 남강중고등학교에서 3년 정도 교편을 잡았습니다. 이 때 학부형으로 알게 된 분이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과 육사 동기였죠. 이 인연이 나중에 큰 도움이 됐죠. 이 분을 제가 세운 ㈜세화중기(1976~79년) 이사, 상무로 영입해서 포철을 담당시켰고, 우리가 포철 협력사가 되는데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박태준 회장과 여럿이서 함께 식사를 한 기억도 있지요.
경기도 김포에 레일가공 공장을 지었어요. 인도에서 받아온 철도 레일을 대형 장비로 변형 조립 가공해서 철도청에 납품했는데, 철도청 1위 레일가공업 공장 등록이 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았죠. 당시 5, 6곳 경쟁업체가 있었지만 우리 회사 장비가 가장 대형이어서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포항제철에 쇠물 운반 차량을 납품하기도 했고요. 당시 국민은행 ADB차관 기금 1호로 선정될 정도로 사업이 잘 됐고, 미국 ABEX사와 기술제휴까지 맺었죠.
- 사업에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레일가공 분야에서 잘 나갔죠. 1979년 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하는 고속철도화 사업에 우리 회사가 선정돼 레일가공 분야를 맡게 됐습니다. 고속철도가 운행하면 기존의 레일은 견디지 못했죠. 고속철에 맞는 철도 레일 가공 기계를 일본 기업으로부터 사들여 투자를 했습니다. 그런데 박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고속철도 사업이 하루아침에 중단돼 버렸습니다. 중소기업신용보증회사로부터 1억2천만원 보증서까지 받았지만, 하루 차이로 부도처리돼 보증서는 종잇조각이 됐고 폐업할 수밖에 없었어요. 집까지 압류됐죠. 잘 하던 포철 협력사 일이나 계속하지 왜 고속철에 투자해서 망했느냐고 주변에서 핀잔도 많이 받았죠.
- 그 다음 도전한 게 자동차용품 유통업인가요?
▶재기를 위해 사업아이템을 물색하며 3년 정도 일본에 살았어요. 당시 일본에서 이탈리아제, 일본제 크락션, 방향제 같은 자동차용품들이 잘 팔리는 모습을 보고, 국내에 들어와 자동차용품 무역업체인 '한신양행'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관세법, 부가세법 등 경영상 어려움으로 몇 년 가지 못해 폐업했어요. 그러다가 1990년에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에 ㈜한신을 설립해서 이탈리아, 일본 등 세계 유명 자동차용품업체와 대리점 계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최대 연매출이 500억~600억원에 달했고, 직원 수도 100여명이 넘었죠. 100만불 수출 탑 수상한 게 1994년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중국 업체들이 저가덤핑 공세를 하면서 점차 사업이 어려워지기도 했습니다.
- 경영 철학을 소개해주신다면
▶저는 울릉 저동초등학교, 울릉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4형제 중 셋째로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교 진학은 포기했습니다. 당시 중학교에선 등록금을 못내면 시험을 못쳤어요. 1, 2등하던 성적이 푹 떨어졌죠. 할 수 없이 대구로 건너가 공장에 다녔습니다. 축음기공장, 열쇠공장, 과자공장에 다녔는데, 과자공장 다닐 때 기계에 오른손이 빨려 들어가는 큰 사고를 당해 지금도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야간 상고를 2년 만에 졸업한 후에 큰 뜻을 품고 영남대 화공과에 입학했어요. 1년 간 휴학한 후 울릉도에 돌아가 저동초등학교에서 야간 학교를 개강하기도 했고, 서울 남강중고 교사로 일할 때 구로공단 내 야간학교를 개설하기도 했습니다. 못 배워 힘겨워하는 이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그때부터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제 좌우명은 '기부 많이 하는 기업이 되자, 베풀기 위한 배움을 갖자'입니다. 영대장학회 장학금을 비롯해 여러 사회복지단체 기부금, 향후회 후원 등으로 기부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기회 닿는 대로 더 많은 기부를 하고자 합니다.
- 고향 울릉도를 자주 찾아가시나요?
▶울릉도에서는 16년만 살고 그 후 외지에서 계속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시절 고향 동네 냇가에서 동무들과 목간(목욕)하던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해요. 그 물이 얼마나 맑았던지요. 나이가 들수록 고향 생각이 깊어집니다. 지금도 저동초등학교 동창회(2회), 울릉도 향우회에는 해마다 꼭 갑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5권의 자비 출판도 했습니다. 오늘도 걷는다, 이 또한 감사하리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등 그동안 살면서 느낀 감정과 생각들을 종이에 옮겨 적었습니다. 그중에 울릉도 사랑이란 책도 있습니다. 앞으로 (주)한신을 사회에 기부 많이 하는 기업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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