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서를 붙여 천하에 알린 후 정적 제거? 이런 역모가 있을까
영조 31년(1755)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가 나주객사에 흉서가 걸렸다고 급보했다. 다른 곳에서 온 벼슬아치들이 묶는 곳이 객사(客舍)다. 나주객사인 망화루(望華樓) 정문에 흉서 한 장이 붙은 것이 '나주괘서사건'이다.
◆나주괘서사건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란 사전이 있다. 199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편찬했는데, "한민족의 문화유산을 집대성하여 편찬한 사전"이라고 스스로 설명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근세에 들어와서 국가사업으로 처음 기획되어 출간된 백과사전으로서 한국학 발전의 가장 초석이 될 만한 기초자료로 평가되어진다"라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나주괘서사건'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자. 이 사전은 '나주괘서사건'의 '정의'에서 "1755년(영조 31) 소론(少論) 일파가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역모 사건"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소론 일파가 노론을 제거하려면 어떤 수단이 필요할까? 군사력이 되었든, 자체 무장한 사병들이 되었든, '무력동원'이 필수다. 그리고 비밀리에 준비하다가 상대가 방심하고 있을 때 허를 찔러 거사해야 한다. 그런데 '나주괘서사건'은 나주객사에 대자보 한 장을 붙인 사건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나주괘서사건'을 6하원칙으로 설명하면 도표처럼 된다.〈그래픽〉
◆나주괘서사건은 무엇인가?
영조 31년 나주에 붙은 괘서, 즉 대자보의 내용은 무엇일까? 《영조실록》은 "글의 내용 가운데 조정에 간신이 가득해서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영조는 좌의정 김상로, 우참찬 홍봉한 등을 불러 전라감사의 장계를 보이면서, "이는 황건적과 같은 종류인데, 틀림없이 무신년(이인좌의 난) 때의 여얼(餘孼:남은 잔당들)이다. 그러나 무신년에 최규서가 고변하였을 때도 나는 오히려 동요하지 않았다"면서 웃었다. 영조처럼 감정기복이 심한 인물이 자신의 치세를 비판하는 흉서를 내보이며 웃었다는 것은 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반증이다. 영조는 승지 김치인에게 "흉서의 글씨가 인쇄한 것 같은데 왜 그런가?"라고 물었고, 김치인은 "그 본래 필적을 감추려고 한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영조는 좌포도대장과 우포도대장을 불러서 기한을 정해 범인을 체포하라고 명했는데, 아무리 인쇄한 것처럼 글씨를 썼어도 그 범인을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주 정도의 고을에서 조정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써서 붙일 인물을 추려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범인 윤지와 동조자들
영조 때 발생하는 정치적 사건들은 대부분 경종독살설과 연관이 있었다. 숙종의 뒤를 이어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은 경종을 제거하고 자신들이 왕으로 선택한 왕세제(王世弟) 연잉군(영조)을 왕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왕조국가에서 신하들이 왕을 선택하는 '택군(擇君)'은 역모행위였지만 노론은 끝내 경종을 독살하고 연잉군(영조)을 왕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왕조국가에서 왕을 독살하고 즉위했으니 파장이 없을 수가 없었다. 나주벽서사건도 그중 하나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벽서를 붙인 윤지(尹志:1688~1755)가 체포되었다. 윤지의 아버지 윤취상은 숙종 2년(1676) 무과에 장원급제한 후 병조참판과 훈련대장 등을 역임했는데, 경종을 내쫓으려는 노론에 맞서 경종을 보호하려 했던 무관이었다. 영조는 즉위 직후 윤취상을 사형시켰다. 아들 윤지는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영조 19년(1743) 귀양지가 나주로 옮겨져 30년째 유배생활하고 있었다. 범인이 밝혀지자 그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벌어졌다.
윤지와 편지를 주고받았던 전 나주목사 이하징은 영조의 친국에서 "김일경의 상소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신하로서의 절개가 있다고 여겼다"고 말해 영조를 충격에 빠뜨렸다. 김일경은 경종을 내쫓으려던 노론 4대신(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을 사흉(四凶)으로 공격하는 상소문을 올려 노론정권을 무너뜨린 소론강경파였다.
소론의 자리에서 노론과 연잉군(영조)는 선왕(경종)을 독살한 역적들이었다. 체포 순간 죽음을 각오한 이하징은 "꿈에 윤취상을 배알했다"고까지 말했다. 임천대라는 인물은 윤지가 나주에서 30여 명을 모아 계를 만들었는데 먼저 벽서를 걸어 인심을 소란시킨 후 거사하자고 말했다고 자백했다.
거사 성공의 기본조건은 비밀성과 전격성이다. 비밀리에 사람들을 모았다가 전격적으로 기습하는 것이 거사 성공의 기초였다. 그런데 불과 30명의 계를 믿고 벽서를 붙여서 공개한 후 거사하겠다는 계획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고문에 의해 만들어진 자백들일 뿐이다. 영조는 윤지와 아들 윤광철 부자를 사형시킨 후 그의 집을 연못으로 만들과 이하징·박찬신 등 수많은 사람들을 윤지와 연루자로 몰아 처형했다. 또한 이미 사망한 소론대신 조태구·유봉휘 등에게도 역률을 추가했다.
◆영조를 비판하는 과거 답안지
영조는 같은 해 4월 태묘(太廟:종묘)에 나가 역적들을 모두 토벌했다고 고하고 5월 2일에는 역적토벌을 축하하는 토역(討逆) 경과(慶科)를 베풀었다. 그런데 과거시험장에서 영조의 치세를 비난하는 시권(試券:과거답안지)이 제출되었다. 또한 답안 대신 역적을 고변한다는 〈상변서(上變書)〉를 제출한 과거응시생도 있었는데, 《영조실록》은 "임금이 다 보지 못하고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말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영조는 보여(步輿)를 타고 종묘에 가서 엎드려, "나의 부덕으로 욕이 종묘까지 미쳤으니 내가 어떻게 살겠는가?"라고 울었다. 과거답안지들은 모두 경종독살설에 대한 내용들이었을 것이다. 영조는 역적으로 토벌하는 군사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갑주(甲冑)를 입고 친국에 임했는데, 《영조실록》은 이때 영조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전하고 있다.
「이때 임금이 크게 노하고 또 매우 취해서 윤혜의 수급(首級:머리)을 깃대 끝에다 매달고 백관에게 돌아가며 조리돌리도록 명하면서, "김일경과 목호룡의 마음을 품은 자는 나와서 엎드려라"라고 말했다.……임금이 일어나 소차(小次)로 들어가 취해 드러누웠다.(『영조실록』 31년 5월 6일)」
분노 속에서 술까지 마신 영조는 이성을 상실했고, 두 사건과 조금이라도 연루된 인물은 모두 죽였다. 사도세자가 이 사건 7년 후인 영조 38년(1762) 뒤주 속에 갇혀 죽게 된 것도 영조와 노론의 광기에 맞서 무고한 인사들을 조금이라도 구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경종에 대한 충심
아무런 방어수단도 없이 죽어가는 소론인사들에게 남은 것은 사육신처럼 경종의 충신이라는 심적 확신뿐이었다. 영조는 그해 5월 16일 좌의정 김상로에게, "연달아 없애 다스려도 조금도 징계되어 그치지 않으니 장차 어찌해야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김상로는 "이는 반드시 큰 소굴이 있어서 적(賊)들이 이를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고, 영조는 "내가 반드시 그 소굴을 찾아낸 후에야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겠다"고 다짐했다. 이 모든 사건의 뿌리가 자신과 노론이 경종을 독살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 사건의 '경과 및 결과'에 대해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윤지는 거사 전에 우선 인심을 동요시키고자 1755년 1월에 나주객사에 나라를 비방하는 괘서를 붙였고, 푸닥거리로 민심을 현혹시키며 동지 규합에 힘을 썼다. 그러나 거사 전에 괘서가 발각되었다. 이로써 윤지는 전라감사 조운규에게 체포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영조의 친국(親鞫)을 받았으며, 그해 2월에 처형당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비밀수사를 통해 윤지가 붙인 괘서를 발견했다는 식의 설명이다. 《두산백과》는 이 사건을 '나주벽서사건'이라고 부르는데 그 설명은 마찬가지다. 이 사전은 '요약'에서 "1755년(영조 31) 소론의 윤지 등이 일으킨 모역(謀逆)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우선 민심 동요를 위하여 1755년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나주객사에 붙였는데, 이것이 윤지의 소행임이 발각되어 거사하기 전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마치 윤지가 세력을 모아 거사하려고 했는데 비밀수사를 통해 거사를 미리 막았다는 식의 설명이다.
나주객사에 벽서 한 장 붙인 사건과 영조의 치세를 비판하는 과거답안지가 제출된 사건으로 사형 당한 인사는 200여명, 귀양 가거나 가족으로 연루되어 노론가의 노비로 전락한 인사들은 300여명에 달한다. 영조는 같은 해 "의리와 사정을 밝게 비추어 보살핀다"는 뜻의 《천의소감(闡義昭鑑)》을 발간했다. 경종을 내쫓으려 한 노론 4대신은 모두 충신이고 경종을 독살하려했던 김용택 등도 모두 충신이라는 내용이었다.
영조가 임금이고 노론이 집권당이던 270여년 전에 편찬한 《천의소감》은 그렇다고 치고 대한민국 국고로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왜 노론의 일방적 입장만 수록하고 있는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두산백과》의 '나주괘서(벽서)사건' 설명은 노론 당원 교육용 교재지 객관적 내용을 담은 사전이 아니다. 노론의 마지막 당수가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인데, 이들의 역사관이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의 주류로 행세한다는 사실만큼 비극적인 사실도 찾기 쉽지 않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6하원칙으로 보는 나주괘서사건
누가 / 소론일파가
언제 / 영조 31년 2월 4일에
왜 / 노론을 제거하려
어디서 / 나주객사에서
어떻게 / 대자보 한 장을 붙여서
무엇을 / 노론을 제거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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