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규 계명대 교수
어느 늦가을 해거름, 멋지게 차려입은 노신사가 산책에서 집으로 돌아온다. 머리는 백발이지만 검은 눈동자가 청춘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듯하다. 모자와 지팡이를 구석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데 창 틈으로 달빛이 들어온다. 달빛이 벽을 비추니 액자 속에 한 소녀가 도드라진다. "엘리자베스!" 나직한 탄식과 함께 노인의 시간은 아득한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노인의 이름은 라인하르트, 그는 몇 살 어린 엘리자베스와 소꿉놀이까지 함께 하는 단짝이다. 학교에 가 글을 배운 뒤로는 엘리자베스에게 동화를 들려주거나 시를 적어 주며 조숙한 마음을 전한다. 두 아이는 은연중에 어른이 되면 부부가 되리라 생각한다. 세월이 흘러 라인하르트는 대학에 가기 위해 먼 도시로 떠난다. 가슴 아픈 이별이지만 둘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이어간다. 그러나 고향에 남은 엘리자베스에게 시험이 닥친다. 에리히라는 청년이 접근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라인하르트의 친구이자 부잣집 아들이다. 엘리자베스는 거부하지만 어머니는 너무나 적극적이다. 여리고 순종적인 처녀가 내외의 협공을 방어하기가 쉽지 않다.
부활절 방학을 맞아 귀향한 라인하르트는 더욱 예뻐진 엘리자베스를 보고 좋아하지만 미묘한 심경의 변화를 감지한다. 집에는 자신이 준 홍방울새는 사라지고 에리히의 카나리아가 놀고 있다. 라인하르트는 엘리자베스와 데이트하는 데 방학을 다 쓰고 학교로 돌아간다. 2년 뒤에 돌아와 청혼하겠다고 말하고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떡인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그 후 두 사람 사이의 연락은 끊어진다. 2년 뒤 라인하르트는 에리히와 엘리자베스의 결혼 소식을 듣는다. 라인하르트는 귀향하지 않고 민요나 희귀식물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민속학자의 길을 간다.
다시 여러 해가 지나고 라인하르트는 에리히로부터 자신의 호반 저택에 놀러 오라는 초대를 받는다. 그 저택의 배경에 놓인 호수가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임멘 호수'(Immensee)다. 정원을 들어서는 라인하르트와 마주친 엘리자베스는 "발에 뿌리가 내린 것처럼" 놀란다. 남편이 놀래주려고 그의 방문을 숨긴 것이다. 라인하르트도 '소녀 같은' 옛 애인을 보고 가슴에 전율을 느낀다.
다음 날 에리히가 외출한 동안 둘은 말없이 호숫가를 산책하는데 엘리자베스는 뜬금없이 "어머니의 뜻"이었다며 눈물짓는다. 친구의 극진한 대접에도 라인하르트는 서둘러 떠날 결심을 한다. 가슴이 두근거려 한숨도 자지 못한 라인하르트는 새벽 어스름에 일어나 현관을 빠져나간다. 그때 등 뒤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시는 안 올 거지요." 라인하르트가 대꾸한다. "그래, 다시는."
소설은 현시점으로 돌아와 액자에서 몸을 돌린 노인이 연구에 몰두하는 데서 끝난다. 친구의 아내가 된 옛 애인의 초상을 평생 간직하고 다니며 첫사랑을 추억하는 남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옛것을 발굴하여 정리·보존하는 수집가의 삶을 산다. 십 대의 첫사랑을 액자에 담아 두고 평생 꺼내 보는 로맨티시스트다운 일이다.
슈토름의 '호반'은 액자소설(Rahmenerzählung)의 전형으로 처음과 끝이 연결되는 원형구조가 호수와도 닮았다. 액자구도는 과거를 회상하기에 가장 적합한 서사 기법이다. 내용상으론 이루지 못한 첫사랑만큼 달콤하고도 가슴 아리는 회상은 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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