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달나라 전설 속 계수나무, 목서

입력 2023-11-03 16:30:00 수정 2023-11-08 15:49:15

달성공원에 있는 은목서. 일반적으로 은목서라고 부르지만 잎의 생김새나 꽃의 형태으로 봐서 구골나무와 은목서의 교잡종인 구골목서로 보인다.
달성공원에 있는 은목서. 일반적으로 은목서라고 부르지만 잎의 생김새나 꽃의 형태으로 봐서 구골나무와 은목서의 교잡종인 구골목서로 보인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비운을 빗댄 윤극영 선생의 동요 「반달」 1절이다. 옛날에는 달나라에 계수나무와 옥토끼가 살고 있다고 믿었다.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내딛는 바람에 계수나무 전설은 상상의 세계에만 남게 됐다.

◆달나라 계수나무의 전설

중국 전설에는 오강(吳剛)이라는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서 옥황상제로부터 벌을 받아 달나라로 귀양을 가서 도끼로 계수나무를 찍어 넘기는 힘든 노역을 되풀이 한다고 했다. 중벌을 받은 오강이 계수나무를 찍을 때마다 나무의 상처가 금방 아물기 때문에 처절한 도끼질은 계속됐지만 계수나무는 넘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는 얘기다.

또 『회남자』에는 항아(姮娥)의 신화가 나온다. 전설 속 명궁 예(羿)의 아내인 항아는 남편이 일찍이 신선인 서왕모(西王母)에게 부탁해 불사약을 구해오자 몰래 혼자 훔쳐 먹었다. 몸이 가벼워지자 달나라로 줄행랑쳐 달의 정기(精氣)가 되었다.

조선시대 문인 서거정이 읊은 「월중항아도」(月中姮娥圖)는 이런 전설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번 구름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간 뒤로

(一自乘雲去帝鄕·일자승운거제향)

광한궁전의 계수나무 꽃은 향기롭구나

(廣寒宮殿桂花香·광한궁전계화향)

지금까지 천고에 그걸 본 사람이 없으니

(至今千古無人見·지금천고무인견)

당 명황이 우상을 찾을 때까지 기다릴 밖에

(只待唐皇訪羽裳·지대당황방우상) <『사가시집』 제13권/시류(詩類)>

당황은 당나라 현종을 가리키며 우상은 신선이 입는 날개옷을 말하니 항아의 전설에 현종이 달나라에 올라가서 놀다가 돌아왔다는 또 다른 전설까지 시에 더해져 있다.

중국의 우주탐사 프로젝트 '항아공정(姮娥工程)'의 명칭 역시 이런 전설에서 따왔다. 과연 달나라 이야기에 단골로 등장하는 계수나무는 그냥 상상의 나무일까, 아니면 실제로 지상에 존재하는 나무일까?

대구 수성구 청소년수련관 입구의 금목서.
대구 수성구 청소년수련관 입구의 금목서.

◆계수나무의 정체성

이름에 계수나무를 의미하는 한자 桂(계)가 들어있는 나무가 여럿이 있다. 이들 나무의 공통점을 굳이 찾자면 냄새와 관련 있다.

먼저 정원수나 조경수로 흔히 심는 계수나무(Cercidiphyllum japonicum)다. 달나라 전설과의 관계는 '1도 없는' 나무다. 일본 원산의 낙엽활엽수로 이름은 가쓰라(桂)다. 20세기 처음 우리나라에 들여올 때 한자 '桂'를 보고 그대로 번역돼 '계수나무'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전설이나 고전에 나오는 계수나무와 헷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계수나무는 10월부터 잎이 노랗게 물들면서 달콤한 솜사탕 향기를 낸다. 잎을 비비거나 낙엽을 밟으면 바스라지면서 맥아당이 공기 중으로 날아가 달짝지근한 냄새를 풍긴다.

다음으로 거론되는 나무가 월계수(月桂樹)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숲의 요정인 다프네는 아폴론의 스토킹에 쫓기다 다급해지자 나무로 변해버린 나무가 월계수다. 가지로 월계관을 만들기도 하는 이 나무의 이름에 달과 계수나무를 뜻하는 한자가 들어가 계수나무와 헷갈리게 됐다. 월계수는 녹나무과의 상록 활엽 교목으로, 높이 15m 정도 자란다. 고기 요리 할 때 누린내를 없애기 위해 잎을 향신료처럼 쓰는 나무다.

이름에 계(桂)가 들어간 녹나무과의 계피나무들도 중국 남부에서는 계수나무라고 부른다. 육계나무라고도 불리는데, 톡 쏘는 매콤한 나무껍질을 한약재로 주로 이용되며 약간 단맛과 향기도 있다. 한자 이름에 '계(桂)'가 들어갈 뿐 전설 속 계수나무와는 사돈의 팔촌도 못된다.

그러면 전설 속 계수나무의 정체는 어떤 나무일까?

달나라 계수나무의 원형으로 중국 남쪽 유명 관광지인 계림(桂林)이 고향인 목서(木犀)가 지목됐다. 품종에 따라 9월부터 10월까지 개화하여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가 일품인 상록수다.

경남 양산시 통도사 경내 불교전문강원인 황화각(皇華閣) 앞에 있는 금목서.
경남 양산시 통도사 경내 불교전문강원인 황화각(皇華閣) 앞에 있는 금목서.

◆가을에 존재 드러내는 계수나무

당나라 시인 왕유는 「춘계문답」(春桂問答)에서 계수나무의 존재가 가을에 드러난다고 읊었다.

봄에 계수나무에게 물었다

(問春桂·문춘계)

복사꽃과 자두꽃은 지금 향기 풍기며 피어나 한창이고

(桃李正芳菲·도리정방비)

햇살 있는 곳마다 봄빛 가득한데

(年光隨處滿·연광수처만)

어찌하여 그대만이 홀로 꽃이 없는가?

(何事獨無花·하사독무화)

봄 계수나무 대답하기를

(春桂答·춘계답)

봄꽃이 얼마나 오래 갈까

(春花詎幾久·춘화거기구)

바람서리 휘몰아쳐 잎이 질 때에

(風霜搖落時·풍상요락시)

나 홀로 빼어남을 모르는가 했다.

(獨秀君知不·독수군지부)

여기서 언급된 계수나무는 목서(木樨)가 아닌가 여겨진다. 목서는 추위에 약한 상록수다. 옛날 조선 한양의 선비들은 목서를 직접보지 못했지만 상서로운 나무로 취급했다.

조선 실학자 정약용이 당시 잘못 쓰이고 있는 말들을 바로잡아 놓은 책 아언각비』(雅言覺非)에 계수나무의 설명이 나오는데 이는 바로 목서를 말한다. "계수나무란 남쪽지방의 나무다.(중략) 중국에도 또한 오직 강남(江南)지방에만 이 나무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계수나무가 없다. 기준(奇遵)의 시에 이르기를 '쓸쓸하게 단풍진 계수나무 숲 속에서, 하루 밤새 얼굴이 몰라보게 쇠약했네(蕭蕭楓桂林、一夕容顏衰)'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실을 읊은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기준은 조선 전기 문신이다.

선현들은 계수나무 꽃의 희고 맑은 향기는 소나무의 변함없는 지조와 짝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조선 중기 문신인 이기(李墍)가 명사들의 사적, 일화, 기담, 전설 등을 엮은 『송와잡설』에는 고려 말 목은 이색이 태조 이성계의 요청으로 당호를 송헌(松軒)으로 지어준 일화가 나오는데 계수나무 꽃을 언급했다.

"목은이 계화(桂花)는 가을에 희고 깨끗하며, 계수나무의 짝으로는 소나무만한 것이 없다 했다. 공(이성계)이 중히 여기는 것이 절의(節義)이므로 변치 않음을 숭상한 것이다. 그래서 자를 중결(仲潔), 당호를 송헌이라 했다."

국립대구박물관 동쪽 생울타리의 구골나무. 11월 초순에 하얀 꽃이 핀다.
국립대구박물관 동쪽 생울타리의 구골나무. 11월 초순에 하얀 꽃이 핀다.

◆목서의 꽃향기는 축복

선조들이 말한 계수나무 즉 목서는 나무껍질의 색상과 무늬가 코뿔소[犀牛·서우]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에서는 정식 명칭 대신 일반적으로 구이수(桂树)나 구이화(桂花)로 부른다. 일본에서도 모쿠세이[木犀]로 부르고 있다. 중국에서는 목서의 향이 강하다고 해서 구리향(九里香)이라는 별명을 부르기도 한다.

대구 달성공원의 향토문화관 서쪽에 굵은 목서 몇 그루에서 10월 중순 무렵 하얀 꽃이 핀다. 맑은 향기에 이끌려 근처로 가면 가지가지 마다 작은 꽃들이 입 자루 아래나 맨가지에 소복하게 매달려 가을철 벌과 나비를 유혹하고 있다. 목서의 향기가 얼마나 좋은지 샤넬 No.5 향수의 원료라는 소문이 날 정도다.

목서는 물푸레나뭇과의 목서 속(屬) 나무의 총칭이기도 하고 목서(Osmanthus fragrans)라는 종의 이름이다. 목서의 종류에는 목서와 금목서·은목서, 구골나무, 구골목서, 우리나라 남쪽 자생종인 박달목서가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금목서와 은목서는 목서의 변종으로 잎의 생김새는 장타원형이며 잎 가장자리에 뾰족한 톱니(거치)가 없다. 금목서에는 9월 중하순 주황색 꽃이, 은목서에는 하얀색 꽃이 핀다.

대구의 공원이나 화단의 목서나 '은목서'라는 팻말을 달고 있는 나무의 대부분은 식물학적으로 따지면 구골목서(Osmanthus × fortunei Carrière)다. 구골나무와 은목서의 교잡종으로 10월 중순부터 흰 꽃이 피는데, 꽃잎이 뒤로 말리고 두 수술이 긴 것이 특징이다.

잎을 보면 구골나무와 은목서의 절충형이다. 구골나무는 잎 가장자리에 날카롭고 큰 가시 못잖은 톱니가 있다. 구골나무의 잎을 보면 가끔 호랑가시나무로 오해받기도 한다. 목서는 잎이 밋밋하거나 상반부에만 작은 톱니가 있는데, 구골목서는 톱니가 촘촘하고 대신 톱니 길이는 짧다.

꽃은 11월이나 12월 초 날씨가 쌀쌀할 때도 핀다. 그래서 국립대구박물관의 일부 생울타리는 11월에 상큼한 향기를 풍긴다.

대구수목원 온실에 있는 목서.
대구수목원 온실에 있는 목서.

◆불교의 선문답 목서향

목서향(木犀香)을 통해 자연산수에서 진여 법성을 깨친 불교 선문답 일화가 전해진다. 중국 송대에 편찬된 불교서적 『오등회원』(五燈會元)에 이야기가 나온다. 송나라 문인으로 소동파와 더불어 '소황(蘇黃)'으로 불린 정견은 문장뿐만 아니라 구도(求道)에도 일가를 이뤄 '산곡도인(山谷道人)'이라고 불렸다. 그가 회당(晦堂) 조심(祖心) 선사를 찾아갔을 때다.

어느 날 산곡이 회당 선사을 따라 산행을 하면서 불법의 요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자네한테 하나도 숨기는 게 없네."

산곡이 사족을 붙여가며 풀이하려고 하자, 조심 선사가 말했다.

"그게 아니네. 조금 있다가 자네에게 설명해주겠네."

마침 목서 꽃이 활짝 피어서 향기가 온 계곡을 꽉 채우고 있었다. 조심 선사가 산곡에게 물었다.

"목서나무 꽃향기가 나지 않나?"

"예, 납니다."

"내 자네한테 눈곱만큼도 숨긴 게 없네."

이 말을 듣자 산곡은 있는 그대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세계인 도의 편재성을 깨쳤다.

조선 후기 문신 이유원이 엮은 『임하필기』에도 「꿈속에서 게(偈)를 지은 일」에 목서향과 백수자(柏樹子·뜰 앞의 측백나무)를 언급돼 있다.

경남 양산시에 있는 불보(佛寶) 사찰 통도사의 불교전문강원인 황화각(皇華閣) 앞에 오래된 금목서와 은목서 두 그루를 수 년 전에 본 적이 있다. 도량에는 나무 한 그루도 그냥 심어진 게 아니구나 싶다.

이종민 언론인 chunghaman@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