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혁 소설가
기록에 따르면 가수 고(故) 김광석은 6살 때 대구를 떠나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에서 살았다. 동대문구에 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생활은 서대문구에서 시작했으니 아마 신촌의 거리를 오가며 예의 그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던 와중 한국 포크의 대부로 일컫는 김민기를 만나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고 대학로의 학전소극장에서 수많은 콘서트를 열었다.
그는 생의 대부분을 서울의 강북지역에서 살았고 음악 활동의 주 무대 역시 삶의 반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김광석이 세상을 떠나고 15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 어느 순간부터 고인을 기억하고 '다시 그리는' 일은 대구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이제 대구 사람이나 외지인이나 할 것 없이 신천변에 기타를 메고 앉아 있는 가객(歌客)의 모습을 전혀 어색해 하지 않는다.
물론 초등학교를 입학하기도 전에 대구를 떠났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김광석이라는 이름을 관광지화에 이용했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김광석 골목은(정식 명칭은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이다) 그를 추모하고 재평가하는 여러 사업에서 충분히 옳은 구실을 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그곳을 잊지 않고 찾아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300여 m의 좁다란 골목길이 상업화의 수단만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주장에는 쉽게 동의할 수가 없다. 또한 김광석의 음악과 삶을 생각한다면 '3층짜리 깔끔한 기념관'보다는 낡아빠진 건물이 줄지어 있는 신천변의 골목길이 그를 기념하는 방식으로 더 적합하다는 생각도 든다.
올해 8월부터 지역 소설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무크지 '빙허'가 창간된다. 잘 알고 있겠지만 '빙허'는 대구 출신의 소설가 현진건 선생의 '호'다. 현진건 선생을 평가하는 여러 수식 중 개인적으로 이 평가가 가장 마음에 든다. 제대로 된 소설을 쓰면서도 항일운동에 앞장 선 몇 안 되는 소설가. 친구인 시인 이상화와 달리 생가 터도 보존되지 못했고, 기념관이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도로명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한 선생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무크지 '빙허'가 현진건 선생을 재평가하고 기념사업이 재도약하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선생의 대표작 '운수 좋은 날'의 주인공 김첨지는 경성의 동소문 근처에서 인력거를 끌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동소문이라는 장소는 훗날 종로구 혜화동으로 불리게 되고 혜화동은 김광석이 주로 활동했던 대학로와 아주 가깝다. 대구시 중구 대봉동에서 태어난 김광석과 대구시 중구 계산동에서 태어난 현진건 선생이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자신의 예술을 꽃피운 것이다. 그래서일까, '빼앗긴 들'의 배경은 대구라서 되고, '운수 좋은 날'의 배경은 경성이라서 안 된다는 말은 참으로 가벼운 핑계로 들린다.
왠지 현진건 선생의 공간적 콘텐츠가 만들어진다면 대구의 '계산문학로드'가 완성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구문학관에서 시작해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을 거쳐 '이상화 고택'으로 연결되는 계산동의 멋진 골목 어딘가에 '현진건의 운수 좋은 집'도 하나 문을 열었으면 좋겠다. 아! 대구의 계산문학로드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곳이 또 하나 있었네! 바로 매일신문사 사옥이다. 그 건물에서 정초에 상을 받고 글을 쓰기 시작한 샛별 같은 작가가 어디 한 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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