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신춘문예 낙방기' - 윤동혁

입력 2023-07-07 06:30:00

윤동혁
윤동혁

분위기는 그때가 좋았지. 으음…

원고지에다 써서 두터운 누런 봉투에 담아 등기우편으로 보내던 그때가.

우체국엘 가야 가능하지 않았던가.

절차가 복잡할수록 사랑은 더 깊어지기 마련.

무얼 써서 어디다 보냈냐 하면, 그러니까 그게 첫사랑이었단 말입니다. 내용을 바로 공개하기가…. 꼭 50년 전 일인데 지금도 볼따구니에 열선이 지나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핏대가 일어서네요.

세월이 흐를 만큼 흘렀는대도 그 상처는 아직 살아움직이고 있으니, 인간이란 게 어쩌면 상처로 쌓아올린 성깔의 집합체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때 내가 저지른 일을 도로 무르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추호도, 짐승의 터럭끝 만치도 없어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기어코 그짓을 하고야 말 테니까.

첫사랑이 아무리 유치하고 어설펐어도 '취소'할 사람이 있을까요? 운명한테 적당히 빽을 써서 타협하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하여튼 저는 원고지에다 만년필로! 그것도 꽤 비싼 만년필에 잉크 보충해가며 열심히 썼습니다. 중학교 때, 왜 그런 수업 방식이 도입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영어 철자를 펜글씨로 썼어요. 잉크가 사방으로 튀고 번졌지요. 여름 교복 상의에는 추상적 산수화가 그려졌고요. 오죽하면 교문 앞에 '옷에 묻은 잉크를 싹 빼주는 약'을 파는 장사꾼이 상주했을까요.

나이를 먹었으면 잉크를 다루는 방식에도 진보가 있어야 했겠지만, 더구나 미제 만년필을 사용하면서도 사방에 먹물을 뿌렸습니다. 저는 구겨버린 원고지와 방바닥까지 영역을 넓힌 잉크자욱들이 자랑스러웠어요. 인문학적인 작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원고지를 구길 때는 누가 보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상을 썼습니다. 마구마구. 인문학적으로.

아직도 서로의 내밀한 나쁜 점들에 대해 정보가 극도로 미미해서 모든 게 예쁘고 듬직하게 보일 때였으니, 내가 구겨놓은 원고지와 벽에까지 칠해놓은 먹물자국도 그럴싸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아내의 눈에는. 너무 어려서 아내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는 그녀의 눈에는 말입니다.

시늉만으로도 인문학적 승리를 거두던 때였으니 행복하고 황홀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손짚고 헤엄치기의 승리는 결코 다시 오지 않으리란 걸 눈치도 채지 못했으니 그 행복은 터무니없이 안이했던 겁니다.

신혼의 아내가 곁에 있는데 첫사랑의 여인에게 연서를 썼을 리 없지요. 내가 쓴 글은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명실공히 작가 대접을 받고 상금도 챙기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헛간에 슬레이트만 얹어놓은 집이었지요. 여섯 가구가 재래식 화장실 하나를 공유하는. 겨울엔 외출할 때 자기 집 귀퉁이에 쌓아놓은 연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나, 둘 촘촘하게 세었습니다.

어쩌다 하나씩 연탄이 자리 이동을 했으니까요. 아무도 가져갔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연탄이야말로 인간 말고도 유체이탈을 하는, 그것도 빈번히 해내는 존재였습니다.

두 평 조금 더 되나? 조그만 책상에 의자 하나가 꽉 차 보이는 나의 서재에서 글을 썼지요. 어린 사위가 연탄을 아끼려고 불을 때지 않은 냉방에서 글쓰는 게 너무 측은했던지라 말로만 듣던 솜버선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장모님이요. 솜바지와 솜이 가득 찬 윗도리도 말입니다. 키 작은 게 흠 중에 첫째로 꼽히던 사위를 솜으로 돌돌 말아놓았던 거지요.

평소 문학을 지향한 적이 명백히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끼가 금방 얼음 덩어리로 변해버리는 냉방에서 '곧 문학이 될 글'을 쓴다는 게 고드름처럼 냉랭한 순수함으로 또는 그 고드름을 단숨에 녹여버리려는 열정으로 느껴졌습니다. 무지와 무모함만이 문학으로 다가가는 무기였으니, 어찌 얼굴이 뜨거워지지 않고서 그때를 회상할 수 있겠습니까.

꼭 50년 전, 추위가 슬레이트집에 일찍 쳐들어온 11월 말, 우체국에 가서 그걸 부쳤습니다. 수많은 예선 탈락을 거치며, 드디어는 신춘문예 낙방기를 논픽션으로 쓰게 된 그 첫 번째 작품을 '등기'로 신문사에 보낸 것이죠.

제목을 그따위로 붙이다니… 그러나 그게 수준이었습니다.

'신발주점'

신발은 요즘 시X로 표현하는 욕을 그 당시 청년문화의 주역이었던 우리가 제멋대로 변형해서 우리끼리 사용하던 은어였지요. 그러니까 시X주점을 무대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쓴 거예요.

나를 포함해서 학교앞 구두 수선하는 형,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의 남편이며 소달구지 운송업자인 아저씨가 등장해요. 술집 주인으로는 내가 늘 가던 '푸른 집' 아줌마가 대신 앉았고 밀주 제조를 투잡으로 하던 정체불명의 여자가 요염하게 떠들기도 합니다.

소달구지요? 저는 동대문구 제기동에서 하숙했는데 소가 하숙집에서 우리와 함께 살았다니까요. 외양간은 구석에 있었지만 항상 소 여물 냄새가 구수하게 풍겼다니까요. 새벽마다 소가 움직이며 방울을 딸랑거리는 소리, 바퀴가 움직이기 싫어서 억지로 내는 삐거덕 소리에 잠이 깨곤 했다니까요. 청량리역이었습니다. 행선지는.

밀주 투잡은 또 뭐냐.

누나는 밤에 유흥업소 나갔습니다. 화장이 짙은 걸 보고 다 그런데 나가는 여자라고 했죠. 밀주는 늘 담그는 게 아니고 보통은 주 1회, 원액 서너 통을 만들면 고대생들이 손님인 막걸릿집에서 가져가 물을 5배 정도 희석해서 팔았다.

김장할 때 누나는 며칠 업소에 나가지 않았어요. 수요가 엄청났으므로 공급의 책임을 져야했기 때문입니다.

하숙집엔 한 방에 두 명씩, 방에 3개인 집은 6명이고 4개이면 8명이 먹고 자고 했습니다(월 하숙비 7천원, 1969년 기준). 자기 식구도 있었으므로 1년치 김장의 분량은 엄청났지요. 그래서 하숙집 아주머니들은 순서를 정해 하루 한 집만 김장을 했습니다.

품앗이!

우린 덩치가 큰 제비 새끼들마냥 짹짹거리며 양념 보쌈을 받아먹었지요.

"학생들이 다 먹어치우면 김치가 한 달도 못가서 거덜나겠네"

아주머니들은 걱정하는 척하면서도 계속 입에 넣어주었지요. 그리고 함께 들이켰던 술, 우리는 밀주와 막걸리를 확실히 구분했습니다. 주점에선 5배 물 섞은 걸 내놓았지만 김장 때 우리가 마신 것은 두 배만 희석한, 무척 쎈 놈이었죠.

신발주점에서 밀주 누나를 이길 사람은 없었습니다. 몸매 좋아, 욕 잘해, 때때로 나랑 잘래? 이러니 다들 하하 웃으며 거리를 유지할 뿐이었죠. 누나가 만드는 밀주는 파출소 아저씨들이 제일 먼저 맛보는 술이기도 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안전하다고) 아주머니들이 웃었죠.

구두 수선 아저씨?

착해요. 술 취해서 혼자 중얼거리는 말로 추측건대 밀주 누나에게 연심을 품고 있나 보았습니다. 나이 차가 많았어도 우리는 그를 형이라고 불렀죠. 그는 술상을 뒤집기는 했어도 자신의 작업장에서 구두를 내던지는 일은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소중하게 품에 안았으니, 이 세상에서 자기가 껴안을 수 있는 사랑의 대상은 구두밖에 없다고 선언하는 모양새였습니다.

형은 과거의 경험을 꺼내보이는 법이 없었습니다. 상자에 봉인해서 어딘가에 파묻어놓은 모양인데 본인도 그 장소가 어딘지 모르겠다고 완강하게 기억 발굴 작업을 허락하지 않았죠. 형의 말투로 미루어보자면 경상북도 안동 근처가 고향 아닌가… 추측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런 거지 뭐, 조또."

세상사에 대한 그의 의견은 이게 다였습니다. 누구의 말에 동의할 때도, 동의하지 않을 때도 이 한 마디면 끝. '가화만사성'이나 '협동단결' 이런 구호 대신 그가 내걸고 있는 깃발이기도 했었죠.

"그런 거지 뭐…"를 낮은 목소리로 말할 땐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는 포용과 복종의 뜻입니다. 그러나 "그런 거지 뭐, 조또"의 뒤쪽 단어에 힘이 실리면 조폭 냄새가 났어요. 여차하면 뒤집어 버리겠다는.

통금 있던 시절이었죠. 얌전한 회사원도 술 마시다 깜빡하면 경찰서 끌려가서 개망신당하던 아득한 옛날, 그저 그렇고 그런 곳에서 술 따르는 여자라고 했지만 한 번도 외박한 적이 없다고 믿기 힘든 이야기를 푸른집 아줌마가 들려주었죠.

밀주 누나는 아침 11시가 되어서야 부스스한 민낯으로 푸른 집을 찾아가서 "언니, 라면."

해장과 점심을 겸한 브런치가 그땐 라면밖에 없었지요. 닭고기 삶은 냄새가 고소한 삼양라면. 지금도 농민들은 수어로 라면을 말할 때 오른손 엄지를 이마에 대고 나머지 네 손가락을 닭벼슬처럼 흔들어서 '닭'이라고 말한다음 국수를 건져 먹는 모양새를 합니다.

면발은 남겼으나 국물은 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후루룩후루룩 다 마십니다. 과다한 나트륨이 전날의 쓰레기를 정리하는 듯했지요.

오전 수업이 없거나 눈발이 심란하게 휘날리면 옆으로 열리는 푸른집의 도르레 문을 '또르르르' 열고서 안으로 들어서곤 했는데 매번 그 누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누나가 '보인 게' 아니라 누나를 '보러'갔는지도 모르죠.

화장 안 한 얼굴에다 월남치마 아니면 츄리닝 차림이었죠. 슬리퍼 꿰찬 발을 앞뒤로 흔들면서 라면을 먹는 모습은 여성스러움의 극치였습니다. 나는 그녀의 흔드는 발을 살짝 붙잡고 발등과 발바닥을 만지작거리려는 욕정에 사로잡히지만, 그냥 소 닭보듯 무심한 표정과 몸짓으로 자리를 잡고 앉지요.

그러나 내가 아무리 무심한 척해도 마음을 이미 다 읽힌 터였기 때문에 술을 신청한다. 그런 독심술은 모든 여자가 태생적으로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늦게 알아차렸기 때문에, 나는 부끄럽고 낯뜨거운 감정이 없이는 그 시절과 그 후에 벌어진 적잖은 (연애) 사건들을 차마 회상하기 어렵다.

막걸리 한 주전자(곧 여러 주전자가 되는)를 갖다주는 푸른집 아줌마도 손님에게 무안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의 속셈을 흥미롭게 살펴봅니다.

내가 한 일은 단 하나, 열심히 퍼마시는 것이었죠. 얼굴 하나야 두 손으로 가릴 수 있다지만, 마음을 가리려면 주전자 몇 개분의 막걸리를 빠른 속도로 들이켜야 했습니다.

그러면 해결되었…던 것일까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기억의 상자에 아무 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혹시?

밀주 누나의 맨발을 붙잡고…. 그러다 귀싸대기라도 얻어맞은 건 아닐까. 양쪽 뺨을 더듬어 보기도 한다. 바지 주머니를 뒤진다. 어제 푸른집에 가기 전과 같다. 계산하지 않고 나왔다는 거지.

이래저래 푸른집의 도드레문을 엽니다. 또로록 소리와 함께 내부 풍경이 눈안에 들어옵니다. 어제와 같은 자세로 밀주 누나가 거기서 슬리퍼를 달달 떨며 라면을 먹고 있습니다. 누나가 있는 게 좋았을까. 없는 게 좋았을까. 나는 있어도 나쁘고 없어도 나쁘다고 생각했습니다.

위와 같은 사람들 이야기를 잘 엮어서, 빛나는 조연(파출소 소장 같은)도 몇 사람 등장시켜서, '장차 문학이 될 글'을 써서 신문사에 등기로 보낸 것이었죠. 그리고 그때 이상한 질병 하나가 찾아왔고, 나는 그 병을 알뜰살뜰 모시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신춘문예병'이라고 불리우는 그 병의 환자가 대한민국 도처에 수두룩허니 널려 있었지 뭡니까. 그것도 모르고 이런 희귀병은 나만 가지고 있다! 자랑스럽기까지 했었던 것이죠.

자리끼도 어는 방에서 솜옷으로 돌돌 말린 채 비장한 마음으로 써내려간 나의 첫 번째 신춘문에 응모작 '신발주점'은 많은 첫사랑이 그러하듯 딱지 맞았습니다. 그때 내가 정말로 상처받았던 것은 썩 괜찮은 작품이 분명한 '신발주점'이 마지막까지 심사의 대상이 된 예선 통과 대여섯 작품에도 끼지 못했다는 사실이었지요.

아까운 마음을 무릅쓰고 떨어뜨렸다. 아무쪼록 문학의 길을 포기하지 말고 더 정진하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뭐 이런 촌평이라도 받았어야 마땅했는데 심사평을 아무리 뚫어져라 바라봐도, 두 번 세 번 훑어봐도 '신발주점'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알았지요. 나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게 분명하구먼. 심사의원들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나?

뭐 자기네들끼리 알음알음 뽑은 게 아닐까? 문단도 많이 썪었다고 하던데….

명색이 병인지라 신춘문예병의 초기증세는 심사위원을 실력도 없고 심지어는 부정에 관여하는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름이면 고비사막이 되고 겨울이면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리던 그 집 주인이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했습니다. 3만5천 원을 5만 원으로. 월세 아니었냐구요? 전세금이라니까요, 전세!

그때 짜장면 한 그릇 값이 백 원이었지요. 그 시절에 전세금 3만5천 원은 전세라기보다는 헛간을 빌려주는 값이었습니다. 3만5천 원은 작은 돈이었지만 주인은 돈 안 들이고 헛간을 주택으로 바꿀 수 있었지요.

아무리 가난해도 마누라 있고 갓 태어난 아기가 앙앙거리는데 헛간 구조를 리모델링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견디기 힘들었으니까요.

바람 숭숭 들어오는(연탄 가스도 함께) 창문에 뭔가 덧대고, 벽에다가는 두꺼운 벽지를 새로 바르고, 슬레이트 지붕 끝에 두꺼운 비닐 차양막을 장착해서 햇볕과 눈비를 막고… 이 모든 작업이 세들어 사는 사람의 돈으로 가능했으니, 주인은 제 돈한푼 안 들이고 리모델링 하는 셈이죠.

2년쯤 되어서 그래도 사람이 살 만큼 집모양새를 갖추자 전세 요금을 올려달라고 한 겁니다. 가난한 집주인들이 그 당시 처음으로 사용한 재테크였고 그들 중 어떤 이는 십 년쯤 지난 후에 도로변 2층 건물을 사들이고 2층은 생활 공간으로, 아래층은 분식집이나 복덕방을 하는 이에게 세를 주어서 돈을 계속 모아갔습니다.

첫째 아이 분유 공급이 수시로 위기에 처하자 취업 전선에 나갔어요. 첫 번째 직장이 잡지사, 두 번째가 출판사, 세 번째가 신문사였죠. 남의 글 받아보고, 남의 글 고치고, 또 내 글을 쓰는 직장이어서 신춘문예 따위는 옛날에 걷어차버린(걷어차여진) 사랑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신춘문예 출신이 버글버글한 잡지사였습니다.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출판사에선 팀장과 부팀장이 모두 필명 날리는 시인이었죠. 신문사는 말할 나위 없었죠. 내가 글을 쓰면 그것이 바로 활자로 옮겨져서 잉크 냄새가 진동하는 기사가 되었으니까. 글 끝에는 아무개 기자가 썼다며 내 이름이 박혔고요.

저명한 영화 감독과 소설가가 "기사 좋다. 글을 참 잘 쓰신다." 칭찬해주는 말을 사양도 하지 않고 꿀떡꿀떡 받아 먹었습니다.

어쨌든 신춘문예는 내가 관리하는 인생 목장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숙집 아저씨의 소달구지처럼. 그리고 그 무렵 한국 언론사의 장르와 편견이 뒤집어지는, 경천동지할 사태가 도래했지요. 컬러 TV.

1983년 컬러TV가 시작되었고 나는 다큐멘터리 프로듀서가 되고 싶었으므로 직장을 신문에서 방송으로 옮겼습니다. 신문쪽에서는 신문의 수준과 격조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간 자였으며, 방속쪽에서는 그들의 전문 영역을 비집고 들어온 틈입자였지요. 어쨌거나 나는 교양 분야의 다큐멘터리 프로듀서가 되기에 이릅니다.

신춘문예를 다시 만나게 되는 과정에서 여기까지는 절반도 되지 않는 길입니다. 사할린으로 징용 끌려간 사람이 한국 정부로부터, 모국 사람들로부터 까맣게 잊혀져서 산 세월이 무지 길었던 것처럼, 나의 신춘문예는 망각의 세월 저편에 계속 숨어 있어야 했던 것이죠. (*나는 1988년 '사할린 통신'이란 작품으로 한국방송대상 TV연출부문상을 받았다.) 신춘문예는 점점 멀어져서 아예 시야를 벗어났습니다.

쉰 살을 넘기면 모선에서 캡슐이 분리되기 어려웠으므로 늦어도 마흔아홉살에는 사표가 수리되어야만 했습니다.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만 나는 넉넉함보다 결핍이 더 요구되는 생명체였거든요.

1998년 말, 나의 캡슐은 모선에서 분리되어 암흑물질 사이를 항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외주 프로그램의 방송사 납품 비율은 5퍼센트. 나는 똑같은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방송사가 사용하는 금액의 30퍼센트도 안 되는 비용으로 '양질인데다 시청률도 잘 나오는' 프로그램을 제작해야만 했습니다.

가엽고도 난감한 사정이 신춘문예가 더더욱 잊혀지도록 했어요.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면서 작가 비용을 아끼려고 내가 직접 대본을 썼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한 편을 방송 작가에게 맡기면, 급수에 따라 다르지만 5백만 원은 드려야 했습니다.

그걸 내꺼로 만들어서 연료비에 충당했으므로 나의 캡슐은 단 한 번의 고장도 없이 방송계의 궤도를 순항할 수 있었던 것이죠. 20년의 세월을…. (그 사이에 나는 방송작가협회의 정식 회원으로 등록되었으니, 우기자면 작가로 등단은 한 셈이었다.)

일흔 살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또 궤도 이탈이 요구되었습니다. 캡슐이 많이 낡아서 고철 덩어리가 되었고 조종사도 비슷하게 낡아버렸기 때문이죠.

나는 비상 낙하산을 펼치고 캡슐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저 멀리 아래쪽으로 녹색의 논밭이 보이고 반짝반짝 샛강의 물결 반사가 눈에 들어왔어요.

연착륙이 아니어서 뼈가 몇 개 부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자력으로 캡슐에서 빠져나와 20년 만에 흙을 밟는 순간, 첫사랑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처음엔 희미해서 환청인 줄 알았지만 그것은 내가 처음 솜덩어리에 둘러싸여서 뜨겁게 사랑했던 바로 그 존재였습니다.

신춘문예라는 질병의 DNA가 망각의 냉동창고에서 살아나와 연가시처럼 꿈틀거리자, 자궁을 통과한 신생아의 팽창을 방불케 하는 문학의 빅뱅이 펼쳐졌지요.

나는 잘못했다고 사과했습니다. 신춘문예에게.

"잘못했습니다, 진짜로!"

'진짜로'가 실감나게 느껴지도록 고개를 조아렸지요.

신춘문예는 흔한 일이라는 듯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끝까지 잊혀지지 않아서 고마울 따름이죠. 공모가 뜨면 작품을 들이밀고, 당선으로 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세요."

꼽아보니 45년 만의 재회. 나의 나이는 예순여덟 살이 되어 있었습니다. 구겨진 원고지와 벽까지 튄 잉크 자국도 인문학의 흔적으로 받아들여준 마누라는 더 이상 곁에 없고요. 50이 되기 전에 모선 분리를 시도했던 것처럼, 늦어도 70에는 '문학의 길'로 접어들어야 하지 않겠나. 원고지부터 한 보따리 사다가 쟁여놓았습니다.

원주 남부시장 2층의 어두컴컴한 사무실…햇볕이 전혀 들지 않아 음지식물도 키울 수 없는 방이었죠. 그래도 전통시장 육성법이란 게 있어서 전기요금 할인이 꽤 되었고 보증금 2백만 원에 월세 20만 원. 그 이상은 지불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햇살과 바깥 풍경 그리고 창문 열어서 공기 순환시키기 등등을 포기했습니다.

남부시장은 재래시장 위에다 8층짜리 아파트를 올려놓으면서 이 도시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 되었으나 35년 역사가 무색하게 상권은 바닥을 치고 있었지요. 그러나 번창하는 시장보다 쇠락하는 장터에서 건질 이야기가 더 풍성할 것이었지요.

두 번째 도전작의 소재는 장터 인생. 현대판 '주막'쯤 된다고 해둡시다. 그런데 이 녀석이 먼저 찾아오네요. 신춘문예병의 증세 가운데 '자뽕'이란 게 있습니다. 제멋에 겨워 뿅 간다는 것인데 원고지 첫 장을 채우기도 전에 고약한 환각 상태에 빠져버리는 현상이죠.

여섯 명의 심사위원 모두가 한목소리로 칭찬하며 '남부시장 흥타령'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심사위원장은 나를 가리켜 '등단 과정이 전혀 불필요한, 이미 훌륭한 작가'라고 극찬합니다.

더구나 칠순을 불과 1년 앞둔 전직 다큐멘터리 피디라는 전력이 드러나자 인터뷰 요청이 쇄도한다. NHK방송에서까지. 나는 유창한 일본어를 사용해도 되겠지만 국격을 생각해서 통역을 거치기로 한다.

누가 옆에서 '그만 꿈 깨'라고 흔들어주지 않으므로 환각이 환각을 부르는 절대 환각상태에 도달합니다.

어쩌다 나의 글을 읽게 된 김주영선생이 불타는 황혼을 축하한다면서 우리 문단에 '벼락 같은 축복'이 내렸다고 말해주었을 때 나의 희열은 절정에 달했다.

"주막도 세월의 풍상을 겪는다. 장터를 소재로 한 이 단편은 나의 문학정신과 뿌리에서 서로 만나는 느낌이다. 내게서 넘쳐나는 영양분을 가져갔지만 또한 내게 모자란 미량원소들을 제공한다."

모든 문학 작품은 결국 자기 자신의 이야기라고 하니까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겠지요. 나이를 확 줄여서 서른다섯 살 청년의 고뇌와 정체성 혼란에 대해 이야기를 할 참입니다.

나는 유학인지 피신인지 구별도 모호한 일본 생활을 10년이나 하고서 돈은 한 푼도 못 벌고 시간 낭비·무능·피해의식을 잔뜩 짊어지고 돌아온, 국경을 넘나든 루저입니다.

일본에서 독립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다는 꿈은, 끔찍한 교통사고의 결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찌그러진 소형 경차처럼 훼손되었으나 카메라와 몇 종의 장비가 건재했으므로 돌아와 결혼식 전담 촬영기사가 됩니다. 웨딩찍사라고 부르는.

평일엔 버리기 아까운 돌잔치, 해외여행, 야유회 등등의 영상기록(VHS나 6mm)을 USB로 옮겨주고 길이에 따라 만 원에서 만오천 원 정도 받았지요. 어느 날 '군의문사유가족회'가 가져온 시신 해부 영상물을 옮기며 구토합니다. 그때부터 술 마실 때 안주는 맹물만… 순대나 삼겹살 이런 거 못 먹게 되었습니다.

슬픔이 씨줄이고 참는 게 날줄인 매일매일을 종이꽃으로 사는 여인. 남부시장을 통틀어서 수익을 가장 적게 올리는 상인, 흙아줌마. 상호가 '흙'입니다. 매출이 적은 정도가 아니라 보증금 까먹는 수준입니다. 그녀에게 희망이 있다면 몇 년이라도 아프지 않게 살다가 시나브로 스러져버리는 삶의 마감이라고 해요.

심방중격결손이 그녀가 품고 있는 병의 이름입니다. 좌심방과 우심방을 나누는 벽(중격)에 구멍이 나 있는 선천성 심장병. 쉬 피로하고 호흡 곤란해지고…

심부전증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는.

여주 가마에서 구워낸 도자기를 받아옵니다. 재래시장과는 구색이 맞지 않는 상품이라 어떨 땐 일주일에 딱 한 점(그것도 저렴한 장식용)을 팔 때도 있습니다. 다들 품목을 바꿔보라고 해도 요지부동, 오로지 흙을 빚어서 불에 구운 도자기만 팔지요.

빈대떡 골목 일대는 술 마시는 노인들 세상입니다. 옛날 할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모두 휴대폰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디지털 초보 전사들이다. 쫄쫄이티와 반바지에 헬멧을 쓰고 입장하시기도 하죠. 비싼 산악자전거는 밖에 묶어두고서.

노인들은 죄다 정치평론가입니다. 때론 사법권을 행사해서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려고 영장 발부도 서슴지 않지요. 그러나 그들은 남자였고 불나방의 생태계 밖으로는 나갈 수 없는 존재, 주모의 향기에 취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작은 가게 하나하나가 도시국가입니다. 투명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고 평화로울 땐 병사들이 철조망 가시 사이로 담배를 주고받으며 환담을 나누지만, 누군가 호루라기를 불면 불길이 치솟고 포탄이 작렬하지요.

전투는 언제나 국지전이고 소일거리의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그래도 옛날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나 볼 수 있었던 '머리끄댕이 육박전'을 아주 가까이에서, 박력 있는 쌍소리와 함께 감상할 수 있지요.

시장은 생각보다 더 치밀하고 종합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문지방 넘을 힘만 있으면 그저 올라타려고 하는 노인도 있으므로 호색적인 본능을 채워주고 약간의 생활비를 가져가는 꽃뱀들(이미지하고는 어울리지 않게시리 할머니급이다)의 서식처이기도 했죠.

꽃뱀과 주모들은 주고받는 관계지요. 늙은 소년들은 꽃뱀이 살랑살랑 다가와 엉덩이를 내려놓으면 갑자기 씀씀이가 대범해집니다. 안주가 많이 남아 있는데도 새로 한 접시 더 내오라고 소리쳐요. 술 취한 늙은 소년은 꽃뱀이 끌고가니까 회전율에도 지장이 없다는 겁니다.

술이건 밥이건 꼭 서서만 먹는 아저씨가 있었고, 자기를 비하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붓는 떡집 아줌마 이야기도 듣는 대로 메모했지요.

어느 신문사가 운이 좋아서 한국 문단을 시끄럽게 하고 해외까지 소문이 날 나의 작품을 받을 것인가. 그러나 신문사 선택에 고민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원고지 그대로 응모작을 받아주는 신문사는 딱 한 곳뿐이었으니까. 50년 전 처음 응모했던 그곳에 원고를 보내자마자 신춘문예병이 심각한 증세를 드러냅니다. 내가 보낸 원고가, 당선이 확실한 그 글뭉치가 길을 제대로 찾아갈까.

생전에 그림을 한 점도 못 팔았다는(동생이 사준 건 빼고) 빈센트 반 고흐를 불러와 옆에 앉혀놓고 한 시대가 작품을 수용하는 태도에 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지요.

의심과 불안이 한여름 칸나꽃처럼 새빨갛게 피어납니다.

12월 중순(15일쯤)에 당선자를 개별 통보한다고 했으므로 15일께부터는 시상식에 참가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갑니다. 생전 처음으로 굽이 높은 구두를 맞추었어요. 키가 5센치미터는 커보였으므로 다른 당선자들과 기념 사진을 찍을 때 균형이 크게 무너질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수상 소감. 무지 겸손한 자세를 취할 것인지 아주 짧게 한두마디만 내뱉고 침묵을 지키는 건 어떨지, 바람도 비도 가는 곳을 말하지 않는다고 선문답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12월20일이 지나자 환각은 착란으로 변합니다. 신문사에서 당선 발표를 24일 성탄절 전야로 정해서 극적 효과를 높이려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50년 전 밀주 누나 앞에서 하염없이 퍼마시는 것으로 불균형과 어색함을 뒤덮으려고 했던 것처럼 똑같은 자세로 그때만큼 퍼마시며 26일, 27일, 28일…

심지어는 12월31일까지도 통지를 기다렸지요.

50년 전 그때와 똑같았다. 무척 아깝지만 할 수 없이 밀쳐낼 수밖에 없었다는 격려의 말도 없었다. 나와 나의 작품은 꽃밭을 가꿀 때 뽑아서 저만치 내다버린 잡초였다. 발효가 지나쳐서 늙은 소나무의 밑둥에 뿌려버린 막걸리였다. 나는 인간의 음주 형태 중에서 매우 불쌍하고 비굴한 자세로 술독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새해를 맞고서 나는 내가 결코 추하게 늙지 않는다! 다짐하면서 모든 열등감과 분노, 좌절을 없애기 위한 단체를 비밀리에 조직했습니다.

'신춘문예 심사위원 암살단'

그래, 훌륭한 작품을 알아보지 못함으로써 장차 출중한 문학이 될 글들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한 죄,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인문학적 범죄다. 처단하는 게 마땅하다, 그런 논리로 말입니다.

내가 암살단을 꾸리겠다고 하자 둘째 딸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아빠, 제1호 단원이 될께요."

그 아이는 동화로 필명을 날리고 싶어했는데 신문사, 잡지사 안 가리고 글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보다 더 많이 떨어졌지요.

우리는 통화하며 수준 이하의 심사위원들이 끼치는 폐해를 다각도로(분노에 차서) 분석하며 한국 문단의 불안하고 비관적인 미래에 대해 격의없이 슬픔을 나눴습니다.

나는 공존할 수 없는 감정, 이를테면 밤에는 영하의 추위가 혹독하고 낮에는 태양이 지글거리는 사막의 날씨를 동일 소재의 옷 한 벌로 버텨야 하는 신세였죠. 그런 마음을 어찌어찌 추슬러가며 중간에 꺾이지 않고 다음 작품을 쓰기로 했다. 지금 나는 '쓴다'고 하지만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그때 이 작품을 '집필하였다'라고 말할 날이 오리라.

이번엔 사실화가 아니라 추상화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일이 잘 풀리려나 훌륭한 책친구도 사귀게 되었지요. 그는 산수화 속 인물이며 침묵으로 인생을 말하는 현자, 요즘 세상엔 그다지 쓸모없는 인간이지요. 상행위를 한다기보다 그저 소일하기 위해 차려놓은 책방에 늙은 소처럼 가만히 앉아있었습니다. 워낭소리도 울리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책방? 헌책방입니다. 90평이나 되는 뻥 뚫린 공간에 종류별로 책을 분류해놓긴 했어요. 이미 지난 행사의 심사위원을 암살하는 것보다는 이제라도 문학 공부를 하는 편이 유익하고 현실적이리라. 그리고 대여섯 명의 심사위원 중에서 누가 나를 제일 심하게 내리깠는지 알 수 없는 뿐더러 그렇다고 여섯 명을 다 저격할 수도 없지 않은가. 오늘부터 백발의 문학 소년이다, 나는.

씩씩거리며 방황하던 나의 영혼은 서 씨의 헌책방에서 평온을 되찾게 됩니다. 사랑을 '학습'한 후에 첫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학은 사랑과 다르다는 걸 할 수 없이 깨닫게 됩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곰팡내 나는 책과 책 사이를 헤엄쳐 다녔는데 그 바다 밑에는 난파선도 가라앉아 있었지요.

발굴을 계속하니 놋수저가 나오고 옛날 동전도 눈에 띄였습니다. 1999년 제 30회 동인문학상은 하성란이 받았구나. '곰팡이꽃'으로. 지은 지 15년 된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유통되는 쓰레기의 실크로드, 또 그것의 오장육부가 치열하고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지요.

1967년생 하성란은 상 받았을 때 서른두 살이었네. 지금은? 2020 빼기 1967은…와, 쉰세 살이다. 나는 나이도 글도 팽팽한 서른두 살의 하성란을 단돈 천 원 주고 산 책에서 만난 것이죠.

이 책에는 또 이윤기의 '두물머리'가 전년도 수상작가 자격으로 실려 있었습니다. 그때로부터 10년도 전에 64세로 타계했으나 나는 51세의 그와 글 속에서 손등을 서로 어루만져주며 막걸릿잔을 나누기도 했지요.

장마가 숨고르기를 하던 흐린 어느 날. 똘이네서 한 잔 하는 자리는 내 마음속에 막 자리잡은 영혼의 보물선을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형님, 대바구니로 물 퍼 올리는 짓거리 그만 하랍니다."

그만 하렵니다가 아니고… 그만 하란다는 것입니다. 나도 들어서 안다. 지금껏 가계는 요양보호사인 아내가 꾸려왔다는 것을. 헌책방 문을 닫는 것은 너무 적게 벌어서가 아니라 임대료다 뭐다 빠져나가는 것이라도 막아보자고 하는 일이라는 것을.

부검도 실시하지 않고 부랴부랴 시신을 처리하는 것처럼 서 씨의 헌책방 대성서점은 문을 닫았습니다. 향년 아홉 살, 10년도 못 채우고서. 조선왕조실록과 브리태니커 사전이 그 무게를 저울로 달아 폐지로 실려나가는 모습은 보기 딱했지만, 나는 이미 건진 게 많이 있었지요.

현길언 한수산 전상국 이청준 조성기 박완서 은희경 신경숙 한강… 닥치는대로 뽑아서 사무실로 옮겨놓았던 것입니다.

이쯤해서 고백하고 넘어가렵니다. 위에 열거한 작가들의 작품을…단 한 편도 읽어 본 적 없다는. 그러기도 힘들 텐데 말이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이런 글과도 처음 만났지 뭡니까. 한강의 '채식주의자'도 외국의 무슨 큰 상을 받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첫 대면이었고요.

함박눈 펑펑 쏟아지는 벌판에 발자국 하나 없으니 내가 뛰어다니면 그게 바로 작품이 되리라. 그러니 통산 세 번째 응모작은 추상화가 될 수밖에 없었죠.

사다 모아둔 책 중에서 나를 도발한 작가는 단연 김애란. 2008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표지에서 그 얼굴과 만났어요. 사진이 아니라 캐리커처.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의 농후한 지성미를 풍겼지만 겉표지 날개에 적혀 있는 소개글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1980년생. 스물여덟 살의 나이였던 것이죠.

애란이 막 태어났을 때 난 신문기자 3년차, 술이라면 전당포에 기자증을 맡겨서라도 퍼마시던 시절입니다. 예술가적 풍모의 음주가 아니라 술독이 아니면 숨을 곳이 없는, 보잘 것 없고 불쌍한 청춘이었습니다.

그녀가 여고를 졸업하던 해, 나는 30년 넘게 호강하며 온갖 특혜를 누렸던 신문방송계를 떠나 낙향했는데 여러 가지 핑계를 붙일 수 있었으나, 서울을 떠난 건 역시 시골에서 퍼마시는 막걸리가 더 편해서였죠.

수상작 '칼자국'. 내 마음에도 그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습니다. 칼국숫집 딸인 그녀는 어머니의 뒤태에서 곧 사라져 갈 부족의 그림자를 봤다고 했지요. 어머니의 칼에서 사랑이나 희생을 보려 한 것이 아니었다고, 거기서 그냥 '어미'를 봤으며 그때 그녀는 자식이 아니라 '새끼'가 되었노라고 썼지요.

추상적으로 쓰겠다고, 뭐가 뭔지 잘 모르게 쓰면 뜻밖의 호평이 쏟아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심호흡을 한 다음 나이는 들었지만 전형적인 꼰대가 아니다!라고 소리쳤다.

나는 김애란과 NFT(대체불가토큰) 계약을 맺고 그녀와 함께 일본 야쿠시마로 떠난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 일본에서 처음 그 이름을 사용하도록 한 아름다운 섬.


쓰다 보니 추상적이라기보다 환상적으로 흘러가더군요. 애란은 원숭이와 대화하고 사슴 등에 올라탑니다. 6천 년 수령의 삼나무 속을 비집고 들어가 이틀이나 나무로 지내기도 하죠.

"으악, 저런 식사 형태라니!"

그녀는 보게 된 것입니다. 원숭이가 응가한 것을 사슴이 낼름 집어먹는.

"저건 말이지 자신의 영양 부족을 해결하는 방식이야. 이 섬엔 사슴이 너무 많아서 뜯어먹을 잎사귀가 부족해"

"숲이 시퍼렇게 우거졌는데요?"


"잘 봐. 사슴 얼굴 높이께는 아무 것도 매달려 있지 않잖아."

애란이 얼굴을 좌우로 움직여 주변 숲을 바라본다. '과연'이라는 메시지를 발견하고 늙은 가이드는 신바람이 난다.

"사슴은 늘 배고프지만 원숭이는 배가 빵빵하게 차 있는 거야. 열매가 지천으로 매달려 있잖아.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원숭이의 배설물에서라도 제 몸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는 게 지금 바로 네 눈에 보이는 식사 형태인 거지."

나는 실제로 야쿠시마에 오래 기거하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유명한 국내 프로그램에 3부작으로 방송되었습니다. NHK도 촬영하지 못했다는 사슴의 원숭이 배설물 섭취를 찍는 데 성공했었고요. 실제 경험에 김애란을 요정으로 합성시켰던 겁니다.

우산이끼가 포자 주머니를 터뜨리면 노란 포자들이 산탄총알처럼 사방으로 마구 튀어나가지요. 이번엔 원고지가 아니라 A4용지에다 '타자로 쳐서' 전자우편으로 보냈고, 그 작업을 대신해준 야쿠시마 촬영팀의 카메라 감독이 "환상입니다. 상금 타시면 야쿠시마로 놀러갑시다."라고 말했으므로 나의 가슴은 등단을 축하하는 색색 포자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녔습니다.

환상으로 버무렸다고 해서 그에 걸맞는 대답이 날아오지는 않았어요. 원고지나 A4용지나, 등기나 메일이나 어떤 형식이냐에 상관없이 언제나처럼 꽃밭 가꿀 때 뽑혀서 버려지는 잡초였습니다.

분노와 좌절, 부끄러움이 시속 4백km의 속도로 원을 그리며 주위를 돌았다. 사무실 집기와 원고지가 하늘로 솟구치고 나는 스스로 제 가슴을 약탈했어요. 그러다가 떠내려가는 목조주택 지붕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겼습니다.

"왜 성질을 부리는 거지? 뭐가 창피한 거야? 너는 최선을 다했고 합당한 대접을 받았던 것뿐이야."

시간은 누구나 알고 아무도 모른다더니 세월이 흐르면서 뭔가 달라지긴 한 모양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이 수치심이라면 그리고 그것의 소환을 받고 내 앞에 나란히 서 있는 것들이 굴욕감과 분노라면…그것들이 나를 괴롭히도록 내버려둘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

2021년 신춘문예에도 글을 보냈습니다. 예전에 근무했던 신문사에, 퇴사한 지 40년이 지나서. 그때도 꿈을 꾸었지요. 병이 쉬 떨어지겠어요?

이번엔 당선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자는 놀랍게도 우리의 대선배입니다. 선배의 귀환을 놀라움과 존경으로 환영합니다. 후배들은 당연히 이런 식으로 축하해 줄 것이었습니다.

지난 몇 차례의 응모 결과와 '이하 동(同)'이었다. 12월 15일이면 당선자에게 '개별 통지'가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12월 31일까지 기다렸다. '그래도 아까웠던 작품이었다'는 촌평이라도 실렸으리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심사위원 소감을 찬찬히 훑어봤다. 몇 번이나.

2022년 신춘문예에도 글을 보냈지요. 이번엔 진보 좌파로 이름을 날리는 신문사였습니다. 지방 국립대 일본문학과를 졸업한 젊은 여자가 오사카에서 겪은 여러 가지 일들이, 나의 일본 체험을 아바타로 해서 한일관계를 깊숙이 찔러보는 야심작이었죠.

나와 나의 작품을 내팽개치는 사람들은 좌와 우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이번엔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많이 슬펐습니다. 더 이상 심사위원 탓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나는 탈락에 적합한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구나. 꽃밭에 어울리지 않는 잡초가 분명하구나.

2023년 신춘문예에는 글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보낼 수 없었어요. 숨고르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또 마주칠 차가운 외면이 지긋지긋하기도 했고요.

주절주절 첫사랑에 대해 말했는데 실컷 읊조리고 나서 알게 되었습니다. 열정이라고 했지만 상식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것도 기껏해야 다섯 번의 시도밖에 없었는데 대단한 러브스토리인 양, 누가 들어도 감동받아야 마땅한 서사라고 우겼다는 걸 알게되었지요.

사랑하는 '문학이 될 글들'과 나의 거리가 아득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024년 신춘문예에 응모할 거예요. 이제 겨우 여섯 번째 작품인 걸요 뭐.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올리겠다고 맘 먹은 걸요 뭐.

그리고 이런 경지에까지 도달했지 뭡니까. 과거에 매질하는 방법으로는 신춘문예 낙방만 한 게 없지 않을까 하는. 호미질 두 번만으로 꽃밭에서 뽑혀지는 잡초 신세라고 해도 낙방기가 계속 이어지는 한, 나는 여전히 쓸모있는 노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