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무너진 꽃턱' - 배소림

입력 2023-07-07 06:30:00 수정 2023-07-10 17:24:11

배소림
배소림

나다니엘 호손 Nathaniel Hawthorne 이 <천국행 철도>에서 언급한 <토펫>을 연상시키는 곳이었다. 어떻게 도착했는지 몰랐다. 입구에서, 눈이 하나이거나 어딘가는 기형인 사람들이 여럿 보이며 여자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말을 걸지도 않았다. 아비를 찾고 있었다. 그곳에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름 석 자를 있는 힘을 다해 외치며 겁도 없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식탁으로 보이는 직사각형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둘러 앉아있어 여자는 계속 애타게 외치며 구석구석 확인을 했다. 한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감청색의 망토를 두르고 학생모자를 쓰고 있는 건장한 그 어깨를 힘껏 잡았다. 돌아보는, 무표정한 앳된 얼굴에 순간 흠칫했으나 주저하지 않았다.

<아버지, 할말이 있어>

입을 열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이기적이며 비겁한 딸년이었다. 임종은 고사하고 입관을 보는 일도 차편 핑계를 대며 피했다. 요양병원으로 들어간 후부터 만나지 않았다. 아비는, 길섶에서 뽑혀 작은 화분에 강제로 심겨진 풀꽃처럼 갑갑해하다 맥을 놓았다. 우여곡절 끝에 치매등급을 받으며 같은 곳의 다른 층으로 옮겨진 어미는 오랜만의 보살핌에 오히려 살이 오르고 보내주는 맛난 것들을 입에 달고 지내며 짧게 자른 백발이 눈부시게 아름답더니 어느 오후, 침상에서 곧추서다 떨어지며 포슬포슬한 고관절이 조각나버렸다. 다소 북적이는 다인실 병동에서 약속한 것처럼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순간이었다.

배변문제로 채워진 기저귀를 극도의 모멸로 여기며 매일 집으로 돌아오려 악을 쓰다가 반으로 쪼그라든 아비의 모습을 마주했다가는 여자 자신이 지레 먼저 죽을 것 같아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유일하게 살가워 아비의 머리를 만지며 빗어 줄 수 있는 맏딸을 보면 반색하며 데리고 나가 달라고 매달렸을 것이고 두고 나올 재주는 없었다. 여자는 제 노릇도 못하면서 입빠르고 눈 여려 청승만 떠는 존재로 집안에서 늘 조롱의 대상이었다. 담대한 동생들이, 혹시 혼자 속 편하게 지내나 싶어 낱낱이도 전해주는 아비의 일과를 매일 듣는 일은 고문이었다.



멀리 살며 그저 일년에 두어 번 보는 사이가 되어버린 한 남동생이 주도권을 쥐고 부모를 지키고 있었지만 거듭된 파산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으로, 생각하기 싫은, 그러나 제지하지도 못한 그런 계획을 머리에 담은 것이 분명했다. 아비가 원하는 곳으로 옮기는 일에 두드러지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아비가 속으로 무척 아꼈던, 수려하고 다정했던 아들이었다. 돌아갈 곳없이, 집과 살림이 미리 그 손에 작파 된 사실을 눈치챈 아비가 더 살 희망은 없었다. 가위눌림 같은 무기력 속에서 어느 쪽을 잡지 못하고 버둥대다가 그들을 다 잃었다.

장례를 치르느라 수년 만에 완전체로 간신히 모였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는 형식 적인 인사치레도 못하는 어색하고 이상한 가족이었다. 서로의 소생들을 앞세워 나타나 비교하거나 견제하는 일에만 신경을 쓰며 행여 거슬리는 소리를 했다가는 어릴 때처럼 장소불문 하는 육탄전을 각오해야 했다. 가장 비싸게 매겨지는 맥주를 죄다 미혼인 그들의 딸들이 짝으로 놓고 대작하는 꼴을 참느라 미칠 지경이었다. 친구들이 몰려와서 성황을 이룬 동창회 같은 장례식에 고무된, 호스트 역할을 맡은 동생이 편육 한판을 더 시킬지 고심하는 사이 빈소 한쪽에 모여 아비의 전셋돈이 어디로 갔는지 그 행방에 수근대는 나머지 형제들을 발견하고 빛의 속도로 달려와 끼어드는 바람에 흩어져 다시 모이지 못했다.

나이가 들수록 어째 더 닮아가는, 복제품 같은 상주들이 그들의 유치하고 모자란 전쟁을 벌이며 진이 빠지는 통에 누구와 이별을 했는지 실감도 못했다. 각자의 계산으로 치열했던 두번의 장례를 마치고 차 한잔 마시지 못한 채 뿔뿔이 헤어졌다. 의논도 없이 아비의 통장을 임의 대로 처리하긴 했으나 그 불 같은 성정을 참아내며 어쨌든 임종을 혼자 지킨 노고를 생각해 모두 입을 다물기로 했다. 다만 어미의 푼돈까지 털어가면서 병원비가 밀린 상태는 부아가 났다. 모든 상황이 지긋지긋했다.

아비와 어미는 한동안 거의 매일, 번갈아 꿈속으로 찾아 들었다. 그들의 감정을 느끼며 살피기도 전에 사라져버리는 짧은 장면속에 아비는 어이없이 순하고 여전히 깔끔했다. 어둡고 앙칼진 분위기로 일방적인 표현을 하거나 혼자 서있어 달려가 손을 뻗으면 사라져버리는 어미를 안아보려 몸부림을 치다가 스스로의 소리에 놀라 깨어나곤 했다.

<화내지 말고 기다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꼭 찾을 거야,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

아비의 옷을 입고 여자를 응시하던 그 얼굴이 그의 아주 소싯적 모습인지, 오래전에 외따로 떼어놓은 한 작은 아이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잠의 옷을 입은 잠재 의식속에서 전혀 혼돈스럽지 않았다. 발작적인 그리움이 염치없이 치솟았을 뿐이었다.

홀로 외롭다 해도 유일하게 안도를 느끼는 곳이니 상처받을 일은 없으리라 믿어 후회 한적 없었다. 오염시킬 수 없어 가두었고 찾지 못해 멀어졌다. 그렇게 잊혀진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 곳에서 데리고 나오지 않을 것이다.



마른 벼락같이 어미의 발목을 잡았다는 아이는, 그 날도 바다로 내려와 쉴 허락을 받지 못한 닻별과 숨은 적 없는 은빛 낮달이 냉한 겨울하늘에 모습이 드러난 순간 세상 밖으로 나왔다. 뿌려 놓은 듯한 싸라기별 밭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해 쓸어 담고 싶게 황홀했다. 딸은 아비와 판박이였다.

전쟁통에 다섯이나 되는 오빠들과 부모와 흩어진 어미는 이웃집 어린 남매를 양 손에 잡고 갑자기 생긴 성근 철조망 사이로 칠흑의 밤을 타 남쪽으로 내려왔다. 오금 저리게 긴박했던 그 날의 묘사가 조금씩 달라지던 이유는 절절한 후회가 만든 착각이나 환영이었을 지 몰랐다. 살아서 더는 혈육들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사력을 다해 원점으로, 싱싱한 두다리로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을 것이다.

지나가던 이들이 한번은 다시 돌아볼 만큼 이목구비가 선명하고 자태가 출중했다는 어미에게 나이도 아래인 한 남쪽 군인이 첫 눈에 반해 무턱대고 욕심을 냈고 마뜩잖은 그 인연의 길로 급자기 몰려버린 까닭은 남쪽 끝자락 신병부대 연병장에서 그들이 잔뜩 굳은 모습으로 부대원들에 둘러싸여 결혼 사진을 찍는 것으로 무마되고 마물러졌다.

위아래 누이들과 형제도 있는 아비가 태어난 날이 확실치 않아 의아했으나 이유는 모호했다. 무슨 반란사건으로, 쌍둥이처럼 나누고 의지한 연년생의 형을 험하게 잃었다. 인근의 이름난 예인으로 의리도 정도 많았다는 그가 영문도 모른 채 쫓기며 다락에 숨어있다가 들키는 바람에 개머리판으로 맞아 피범벅으로 끌려 나갔다. 행방이 묘연해져 시신도 찾지 못한 기막힌 분노로 불덩이를 품고 방황했던 청춘이 우연히 들어갔던 빈 성당에서 듣게 된 고요하고 장엄한 선율에 마음을 뺏기며 그의 신(神)은 그렇게 정해졌다. 불려 간 것인지 선택했는지 모른 채 어미와 딸도 동반되어서 기억에 없는 사진 속의 아이는, 깊고 푸른 눈에 코가 우뚝한, 먼 이방에서 건너온 사제 옆에 철버덕 주저앉은 자세로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가늘한 몸매를 가진 어미의 잦은 수태와 출산으로 북녘의 고향에서 이미 가까이 지냈고 함께 떠나온 그 소녀의 집에 아이가 한동안 맡겨졌다. 무척 아껴주던 그 가족을 또 다른 둥우리로 여기며 애착했지만 저녁 무렵이면 방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훌쩍이며 동생의 차지가 된 어미를 타령하듯 불러 처량맞았다. 일찍 청상이 된 소녀의 엄마를 아이가 이모라고 불렀다. 굵은 선의 중성적인 외양에 툭한 성격과 말씨로 억척스레 삼남매를 이고 진 상황이었다. 들키면 잡혀간다는 일을 시작해 신혼의 어미와 아비도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심부름을 해주다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원조로 들어오는 물건을 중간에서 받아 시장에 내다파는 장사를 했지만 빚에 쪼들리며 환갑이 되기도 한참 전인 나이에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을 때까지 형편이 괴로웠다. 그들도 성경을 읽었으며 주말이면 아이를 데리고 그네가 있는 가까운 성당으로 향했다.



말투까지 달라진 딸을 데리러 한참 만에 아비가 찾아왔다. 낯이 설어져 누군가의 뒤에 숨어 옷자락 사이로 그 모습을 살피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함께 역 한구석에 서 있던 헌칠한 젊은 아비의 모습은 강렬했다. 푸른 군복정장 위에 같은 색의 망토를 덧입고 챙 있는 모자를 깊게 쓰고 있었으며 곱슬거리는 머리칼로 이마를 가린 작은 아이는 동생에게 줄 생각인 사과 한 알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끝 안보이는 몇 개의 선로가 양방향에서 교차지점으로 접근하며 사이가 좁아지는 듯한 착시감으로 아찔하다가 얽힌 곳에서 제 방향을 찾으며 원래대로 멀쩡하게 뻗어 달아나는 모양에 눈을 떼지 못했다. 몇 발의 간격을 마주하며 잊지 않고 데리러 와준 아비가 고마웠는지 쉬지 않고 말을 걸며 아래 위를 훑어 대는 딸을 내려다보던 얼굴이 상기되어 수줍어 보였다.

격한 성질에 차분하게 시작하는 말이 설어 첫 단어를 억누르는 듯했던 아비는 외모를 가꾸는 일은 천성인 듯 숱 많은 머리를 뒤로 넘겨 붙여 늘 미끈했고 군복을 벗고 직장에 다니며 퇴근해서 돌아오면 셋방 문턱에 앉아 어미가 대야에 담아오는 물에 발을 담그고 씻게 했다. 셋방이 즐비했던 골목은 큰 길로 이어지는 기역자의 형태로 굽어 들기 전까진 한참 걸어야 할 만큼 길었다. 땅거미가 지면 또래 아이들이 쏟아져 나와 몰려다니며 왁자그르르 했다. 가로등이 없어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에 의지하며 편을 갈라 서로를 찾으러 다니는 놀이에 온 몸이 땀으로 젖었던 여름 밤이 짧고 달았다.

집도 없는 어미가 어쩌자고 동생을 자꾸 낳는지 걱정스러웠다. 계란 한 알을 구우면 아비가 젓가락으로 대여섯 번 은 나누어 주어야 할 자식들이 방을 가득 채우고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아이는 아홉 살 무렵이었다. 주말이면 성당의 넓은 마당에서 뛰어 놀며 교리공부를 했다. 아침이면 두 눈이 양쪽으로 찢어지도록 고무줄로 머리를 묶어주고 학교를 보냈던 어미는 통 말이 없고 다정하게 품어주지도 않아 옆집 오빠가 때렸다는 아이의 거짓말에는 그저 득달같이 달려가 한 애먼 소년을 울게 했을 뿐이어서 품었던 다른 의도가 무안했다. 아비와 자식들에게 몸종 같은 헌신을 하면서도 알 수 없는 냉기가 흘러 어미의 살내음이 그리워 다가서던 아이를 멈칫거리게 했으니 어쩐지 늘 미묘한 통증을 느끼는 해넘이께와 설핏 닮고 낯선 곳에서 낮잠을 자다 깨어 그 저무는 소리를 듣는 느낌 과도 비슷했다.

어미가 남동생을 낳았던 곳은 넓고 둥근 지붕이 덮여 셋방들이 붙어있던 안쪽이 어두웠다. 건너편에 고운 자매가 살았는데 아이를 예뻐라 해 주저없이 드나들었다. 언니가 아프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문이 닫히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조금 열린 미닫이 사이로 너무나 야윈 처녀가 마당에 있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고 예전과 다른 희미한 미소로 부르며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사탕도 주고 이런저런 근황을 물었지만 기운이 더 빠질까 걱정되어 눈에 들어온 앙상한 손가락 한 끝만 살짝 잡아 보았는데 며칠 후 그녀는 방에서 실려 나갔으며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로 간 것일까?>

방 한구석에 누워 잠을 청하던 아이의 머리 속에 들어온 무한의 의미는 아찔하도록 생소해 생각을 떨치느라 뒤척이다 겉잠을 잤다. 출입문이 주인집 옆에 붙어 있었던 셋집은 큰 대문을 사용하고 싶은 아이를 실망시켰다. 어쩌다 배시시 열려 있는 날에 밀고 들어가 천천히 집안을 둘러보았다. 방의 개수를 세어보고 가운데의 넓은 정원을 채운 높은 낮은 나무들을 주시하다가 아이의 이름을 늘 틀리게 발음하는 주인집 할머니가 부엌 문 앞에 둔 미역이 담긴 함지박을 발견했다. 옆에 누워있는 파리약을 한참 바라보다 집어 들더니 그 위쪽으로 몇 번 힘을 주어 분사했다. 마당과 연결된 작은 방 쪽마루로 며칠을 들락날락 하며 누가 배탈이 났는지 눈치를 보며 겁을 내면서도 조용해서 묘한 낙담이 든 속마음에 혼란스러웠다.

일요일엔 동생들을 데리고 미사에 참석해야 했지만 한동안 함께 하던 어미는 못마땅한 일이 있었다고 더는 동행하지 않았다. 초라한 행색의 노인에게 야박하게 대하는 것을 보았다는 확인 못할 꼬투리를 잡았다. 평소엔 늘 수줍은 아비도 앞장을 서질 않아서 지루하기만 한 그 시간 동안 다른 곳에서 놀다가 긴 망태에 넣어야 할 돈으로 과자를 사 먹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성당에 사는 해바라기 꽃 같은 한 수녀가 아이의 나긋한 노래를 좋아했고 고운 춤도 가르쳐주며 잔치라도 열리는 날엔 그 무대에 올리며 자식 자랑하듯 해 어미처럼 정을 부쳤다. 유일하게 속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그녀가 혼자 사는 일을 포기하고 말도 없이 떠나버렸을 때 유리종이에 생살을 비벼 댄 것처럼 쓰라려 애꿎은 땅바닥의 돌멩이만 차며 고개를 숙이고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 미리 알았으면 따라가겠다고 떼를 부리며 울었을 것이고 아비도 결코 허락을 안 할 것이니 그 편이 옳았다. 떠나는 이들은 아이의 맘 구석 크고 작은 쪼가리를 떼어 가는지 매번 생채기가 생겨 아릿했다. 그 이기적인 사람들이 생각날 때 스스로 더 깊게 도려내며 잊으려 애썼지만 한숨 자고 나면 늘 제자리였다.

고해성사를 행할 나이가 되어 설명도 듣고 연습도 했지만 죄의 가름이 순탄하지 않았다. 모든 행동의 이유를 따라가볼 필요가 있고 애초에 사람의 마음밭 얼개를 불충할 수 없도록 얽었더라면 이제 와서 잘게 따지며 옥죄는 불편한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아이가 줄을 서서 차례로 들어간 무척 좁은 방에는 칸막이가 중간을 막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긴장한 말문을 막은 것은 귀가 밝은 아이가 금방 눈치 채 버린 건너편에서 들리는 음성이었다. 변조로 낮게 깔았지만 틀림없었다. 최면을 걸어주거나 접신 같은 일까지 기대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부추겨주는 분위기는 잡혀야 했던 아이가 거의 울 지경의 실망이었다.

엉뚱한 녀석이라고 놀려먹는, 주말마다 교리 시간에 만나는 그는 인간이 꽃보다 곱다는 턱없는 말을 했다. 도대체 어디가 그렇다는 것인지 묻고 싶어 여러 번 손을 들 뻔했다. 신이 만들었다는 말은 굳게 믿었다. 꼭두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해야 하고 먹고 배설하다 결국 늙고 병들어 죽는 처지를 사람이 스스로 원했을 리가 없었다. 양보 할 수 없는 아이의 생각이었다.

결혼을 못하니 자식이 없어 돈이 그리 필요하지 않는 사람이 먹고사는 세상일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아이에게 폄하된 그는 몇 명 되지 않은 교리반의 누구인지 분명히 알 것이니 준비했던 몇 가지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 첫날부터 그렇게 어긋났다.

자신이 거짓말을 썩 잘하는 것 같고 밉고 싫은 것을 곧이곧대로 가래 뱉듯 객출하는 버릇을 고대로 말 하기는 어려웠다. 꼭 집기는 그렇지만 말없는 어미가 분명 그런 성격이며 물려주었으니 어쩔 수 없는 형편에 무슨 방도를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그저 매번 토해내라고 하니 한숨만 나오고 속으로 달아나는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속으로 품었던 나쁜 생각도 죄라고 해 절로 드는 것을 어떻게 막는지 갑갑한 일이었고 친구들은 무슨 말을 하고 나오는지 궁금했지만 물어 볼일이 아니었다. 죄책감으로 열 댓 밤쯤 잠을 못 잘 정도로 괴로우면 어떤 일이든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 있지만 그런 후회를 경험하지 못했다.

주말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의지와 무관하게 발을 디뎠지만 기억할 수 있는 시간부터 그곳은 포기할 수 없는 공간이어서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무조건으로 원활하던 시절이 지나버린 안식처가 조금씩 불편해지고 있었다. 좁은 방의 의미를 교리적으로 이해했을 뿐 직관이나 표상의 작용이 필요했던 아이는 도무지 동하지 않는 스스로를 다그쳤으나 머리 속 이견이 물러서지 않아 별 진전이 없었다. 그저 궁금한 주변의 여러 일을 묻거나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늘어놓아 제지를 받기 일쑤였다. 장황한 서론과 다양한 수식어를 나름 구사하며 늘 이유가 많은 아이가 요약하라는 언질을 받은 날 무척 무안하고 주눅이 든 탓에 상황은 더 난감 해졌다.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쳐주지 않는다는 규율과 도무지 꿈쩍 않는 고집 사이에서 결국 딜레마에 빠졌다. 인정받지 못한다는 허전함으로 참지 못하고 입이 싼 한 친구에게 넌지시 물었는데 별 고민을 다 한다는 눈초리를 보여 괜한 약점을 보인 일에 후회스러웠다. 고해를 하지 않으면 동그란 밀떡을 받아먹을 수 없고 미사에 빠진 것으로 간주된다는 강박으로 자신을 좁은 방으로 밀어 넣기는 했지만 매번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일에 질려 고역이었다.

벼르던 일은 아니었는데 본성의 중심으로 들어가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다는 의미를 어렵고 서툴게 표현하다가 그런 것은 없다는 단호한 답에 아이가 되묻는 사고를 쳤다. 자신의 아비는 친구의 점잖은 아버지와 전혀 다르고 왜 모두 다른 성질과 모양과 처지인지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며 입밖으로 내지 못하는, 어떤 행동을 부추기는 미묘한 파장이나 물결 같은 가슴 속 움직임에 대해 설명하려다 혼이 났다. 진심이었는데 어디서 주워듣고 어른 흉내질로 관심 받으려는 되바라진 행동으로 오해를 했는지 아이가 너무 진지해서 당황했는지 알지 못한 채 더는 좁은 방으로 들어 가지 못했다.

동네에 매일 걷기만 하는 아저씨의 정신이 나간 이유가 생각이 너무 많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블록 정도의 거리만을 왕복하며 그저 팔다리를 규칙적으로 움직여 여름 반바지 아래의 다리 근육은 갈색 말의 것 마냥 탄탄하게 갈라져 보기엔 좋았지만 허깨비 같은 그가 언제 조금 더 거리를 넓혀 길을 건널 수 있을지, 아니면 피곤에 지쳐 쓰러질지 아무도 모른다 했다. 가끔 허공에다 미소를 지어 어디쯤 인지 헤매는 그 미로가 평화스럽다는 신호 같았지만 매일 깨끗한 옷을 갈아 입히고 비 오는 날엔 우산을 쥐어 주고 내보내는 가족은 그가 중첩된 출구를 알아보고 빠져나오는 일을 기다릴 것이 자명했다. 자신도 소질이 있다는 생각에 그가 보이지 않는 날엔 궁금하고 신경이 쓰였다.



모두 어딘가는 조금씩 아파 보이고 무언가를 원하고 기다리는 의문투성이 세상 속 아이가 마음이 잡히지 않을 때 타박타박 걸어 찾아가던 곳은 백 개도 넘을 것 같은 계단 위에 늘 열려 있던 빈 성전이었다.

높고 뾰족한 첨탑지붕은 동네의 어느 곳에서도 보였고 가운데가 높은 곡면의 넓은 천장을 텅 빈 공간에서 올려다보면 아름답고도 강한 힘에, 마음을 흔들던 감정이 탈없이 자리를 잡는 느낌은 평온 그 자체여서 더 좋은 곳이 없었다.

누군가의 장례미사를 위한 레퀴엠 반주 연습을 하는 시간과 맞물릴 때 아이의 천국이 열렸다. 어미의 손재주로 만들어 입힌 홍자색 바탕에 노란 꽃밥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길고 검은 머리를 쓸어 올린 채 두 발을 앞뒤로 흔들며 반쯤 누워 기약없이 반주자를 기다렸다.

보이지 않는 신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한 소리 같은 장중하고 깊은 단조의 반음이 길게 눌러지며 화음을 이루면 어찌나 가슴 한가운데가 쩌릿해 오는지 눈을 감고 온 몸의 힘을 빼면 귀만 열려 있는 착각으로 소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하늘 같은 천장으로 높이 나르며 의식만 남은 채 소멸되는 듯한 느낌에 온 속내를 그대로 내 주어야 했다.

압도적인 느낌을 길게 풀어 설명하며 누군가 속에서 울고 있는 것 같지만 동시에 위로를 함께 느낀다는 소감을 수녀에게 비밀스럽게 털어놓아 그녀를 한참 생각에 잠기게 한적이 있었다. 자기의 생각이 혼자만의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아이의 얼굴을 두손으로 가벼이 만져 주었을 뿐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한 듯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파계를 정하기 전의 고뇌 속에 별난 아이의 고백을 진지하게 들어줄 여백이 부족했을 것이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교실에 갇혀 있어야 했던 마지막 학년은 악몽이었다. 중년의 담임 교사는 아이들을 함부로 다루었고 거친 언어로 속을 상하게 했다.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자국을 가진 아이를 <얽은 년> 이라고 불러 깊게 분노했는데 어미에게 일러야 하는지 며칠 골똘히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조용히 넘어 갈 것 같지가 않아 참기로 했다. 자신이 밉게 생긴 사실을 처음 알았다. 가슴에 몽우리가 생기기 시작한 여자애들에게 젖통이 나온다고 희롱해 치욕적이었고 쉬운 시험문제를 틀렸다고 벽으로 던져지거나 욕설을 들어도 겁을 먹은 반 친구들이 죄다 입을 다물어 그 사람은 병원에도 감옥에도 가지 않고 학교에 그냥 남았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라는 어른 같은 표현을 했고 오래 잊지 못할 일로 여겼다.

좁은 굴뚝 청소를 위해 새벽 마다 재를 뒤집어쓰고 기어 들어가야 했던 어느 이방의 가난한 작은 몸집의 아이들처럼 해가 뜨는 일에 한숨을 쉬던 한 해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이 암담했다. 주변의 모든 사물이 어쩌면 그리 무채색으로 단조롭고 구질구질한지 빛이 나는 것이고는 눈을 씻고 봐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 낙담한 그 때쯤 텅 빈 성전에 누워 천장을 울리는 진혼곡의 음률에 넋을 잃던 아이에게 처음 말을 걸었다.

<넌 그곳에 그냥 있는 게 안전 할 것 같아>

자신은 이제 그런 안온함을 찾을 여유가 없고 여러 괴로움이 생겨버려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전했다. 각자 따로 외로워 보이고 늘 화가 나 있는 아비와 어미는 얼키설키한 뗏목을 잡고 떠내려 가고 있는 것 같고 자신과 동생들이 그 위에 위태롭게 엉켜 있는 현실이 두렵다는 사실을 말해주진 않았다. 좀 더 자란 자신이 앞날을 감당 해 볼 것이니 오르간 소리를 듣고 마당에서 놀고 있으면 마음이 놓이고 기쁠 것이라고 설득했다. 정 보고 싶을 때 크지 않은 실바람처럼 다가오면 그 흔들림에 마음이 알아 차릴 것이라는 말치레를 덧붙인 일방적인 강요였지만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고 든든했다.

성큼 성장한 자식들이 버거워지고 감당할 능력이 빈약한 부모가 당혹스러운 시점이었다. 먹이고 학교에 보내는 일도 차고 넘치며 억제되어 있던 내면의 광기 같은 것을 노출하기 시작한 아비가 몹시 낯설고 두려워졌다. 초경을 맞은 맏딸에게 어미는 말없이 생리대를 만들어 내밀었고 마당 한 가운데 널려 있는 그 흔적에 아비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아 한동안 좁은 집안에서 피하며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아비는 성당의 곰살맞은 말쟁이 작은 아이가 사라져버려 못내 서운한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주체 못하는 정욕의 세계에 딸이 가까워진다는 거북함 만을 나타낸 오직 불숙한 생짜였다.

몇 장의 순간사진 같은 모습을 잡고 애쓰는 마음은 매한가지였지만 손발이 오글거리는 열없는 대화는 바싹 마른 무말랭이 같은 부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고 해서도 안되는, 영화나 책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장사라고 시작한 일에 외출이 잦은 아비대신 어미가 감당할 몫이 넘치고 있었다. 맨정신으로 들어오는 날이 드물었고 술이 깰 때까지 어미를 볶아 대며 소리를 질러 소녀가 된 아이는 동생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부엌이 달린 방 앞에 쪼그리고 앉아 행여 어미가 맞을까 마음을 졸이며 밤이 새기를 기다렸다.

다음날의 아비는 전날의 난리를 혼자 뭉개고 풀 죽은 모습으로 돌아가는 날들이 반복되며 모두 지쳐갔지만 일관성 없는 행동에 한쪽의 감정을 택하기도 어려웠다. 미워할라치면 불쑥 철로 변에 나타나 수줍게 웃어 마음을 흔들었고 동네 큰 애들을 따라 나섰다가 길을 잃어 파출소에서 자고 있던 아이를 찾아 등에 업고 밤길을 걷던 아비가 그 길을 다시 걸으니 넓은 등이 푸근해서 슬그머니 화를 풀어야 했다. 젓가락으로 나누어 입에 넣어주던 구운 계란은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아져 체할 지경이었다.

이웃에 사는 다섯살이라는 말라깽이 여자애가 출근하는 엄마를 잡고 승강이를 하다가 모질게 맞는 것을 목격했다. 군데 군데 금이 간 담벼락으로 숱도 없는 딸의 머리채를 잡고 밀어버렸는데 튕겨 나온 것처럼 일어나 그녀의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잡았으나 팽 돌아서는 힘에 밀려 다시 나동그라졌다. 얼마 후 흉흉한 소문이 돌았는데 그 여인이 집을 나갔으며 애는 누군가와 멀리 떠났다고 했다. 그리 될 줄 알고 미리 매일 울었다. 그 즈음 상당히 변한 아비에게 손찌검을 당하기 시작하며 어른들의 비정함이 가난 때문만이 아닌 뭔가 다른 보이지 않는 이유를 추측하는 일은, 얽혀 있지만 각기 제 갈 길로 풀리던 기차 길에서 늘 감겨 들어 흔적도 없이 부서져 버렸다.



습기도 기름기도 없는 메마른 집안은 그냥 현실적인 고독으로 가득하며 중요하고 큰 것이 비어 있는 삭막함으로 질식할 것 같았다. 어릴 적 자신이 맡겨졌던 그 집으로 돌아가 살겠다는 당돌한 요구를 했다. 이제 혼자 기차를 탈 수 있다고 우기다가 설득의 길을 모르는 아비의 화를 참지 못한 손에 잡혀 진 긴 몽둥이로 살집도 없는 빗장뼈를 그대로 맞았다. 어미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밥은 있지만 먼지만 풀풀 대는 흙마당에 꽃 나무 한 그루 없는 낡은 집도, 먼저 태어난 순서를 무시하며 호칭도 생략한 질서 없는 동생들과 한방에서 치대는 일도 지겹다는 투정은 이해 받기 어려웠다. 하나가 동네 길에서 맞는 것을 본 현장에 있던 나머지가 함께 덤벼 때려 준 일은 무의식적인 컬래버였다.

서로 유대감을 표현하는 일에도 어색하고 소극적인 행동은 어미의 방임과 관련이 있었다. 부주의하게 던져 놓은 그 날 번 돈주머니는 용돈이 필요한 것들이 번갈아 털어가는 통에 늘 계산이 맞지 않았을 텐데 반응이 없었다. 밤마다 옥신각신 하는 통에 불안병이 생겨 도대체 무슨 일인지를 따지고 싶었지만 어른들의 일 같아서 입밖으로 내지 못하는 일도 심각했다.

두어 달 후 소녀가 앓기 시작했는데 잔기침이 심해지고 숨만 쉬어도 가슴뼈가 울려 한 손으로 누르고 파리한 얼굴로 밥상머리에 앉았으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 미련하게 버텼다. 급기야 학교 운동장에서 쓰러진 딸을 정말 오랜만에 다시 들쳐 업기는 했으나 꽤 위중한 상태여서 방치한 이유를 따지던 의사의 호된 질책으로 아비가 하루도 빼먹지 못하는 면도질을 며칠 걸렀다. 자제하지 못한 자신의 매질을 떠 올렸을 것이다.

늑골의 염증으로 가슴사진이 온통 하얗게 도배가 되어 나왔다. 몇 달을 바늘이 더 들어갈 자리가 없을 정도의 주사를 맞으며 자리에 누워있었지만 아비는 얼굴 보는 일을 피했고 쏟아 부은 항생제로 모래 돌덩이가 된 변을 기운이 없어 내보내지 못하는 딸의 항문을 어미가 수저로 파주며 죽을까 염려되어 밥을 먹이고 머리맡을 지켰다.

그렇게 끝난다 해도 별 일이 아니라는 발칙한 생각으로 덤덤했고 몇 달 후에

일어나 학교로 돌아갔다. 폐를 함께 다친 탓에 삼키기도 힘든 큰 알약을 한 주먹씩 먹어야 하는 일이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반쯤 은 다락방 구석에 몰래 버리기도 했다. 낮에 아비와 어미가 번갈아 내려와 마주치기도 했던 그곳에 엎드려 겉장이 너덜거리는, 어느 깊은 산에 사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닳도록 읽었다. 글을 따라가다 보면 파랑과 노랑을 섞어 놓은 빛깔로 넘치고 바람의 숨결마저 싱그러운 그 속에서 사는 듯 희열 했지만 눈을 뜨면 그저 을씨년스러운 자신의 세상에 어쩔 바 몰라 했다. 문득문득 잔잔한 시간 속에 남겨 둔 작은 아이를 떠올렸지만 울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잘한 일이었어, 넌 다치지 말아야 해>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완강해 기억하는 일조차 조심스러웠다.



어미가 거의 도맡은 것 같은 장사가 잠깐 반짝해 빚도 갚고 세 들어 있던 땅도 샀지만 사는 곳은 여전히 허름한 가건물이었다. 말 만한 딸들을 한방에 몰아넣어 서로 미워 싸우느라 증오의 전쟁터였고 왜소하고 병약한 맏이가 늘 깔려 얻어맞기 일 수였다. 그 초라한 방이 필요해 간간이 찾아 드는 손님이 있어 함께 끼어 자야 했다. 부엌일을 도와주러 온 시골 처녀가 밤늦게 라면을 끓여 달라 요구하고 간이 맞지 않다는 트집을 잡는 막내 년의 등쌀에 질려 총각들도 드나들고 따로 방을 마련해준다는 동네 양복점으로 가버렸다.

어미와 함께 철조망을 넘은 그녀가 혼자 찾아와 울었다. 이런저런 용무로 가끔

먼 길을 마다 않고 오곤 했지만 그때는 쫓기는 분위기로 도주할 곳이 마땅찮아서가 확실했다. 얼굴이 넓고 목이 밭아 시원한 느낌은 없어도 희고 맑은 피부가 한몫 하는 깔끔한 외모는 변함없었다. 한동안 머물며 안 그래도 힘든 어미를 도와주지 않고 앉아서 밥을 받아먹어 속이 상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상한 곳만 골라 다니며 돈을 벌러 다녔는데 가끔 외간남자에게 전화를 해 달라고 시켜 밖으로 불러 내는 일 인줄 알면서도 심부름을 했다. 아이에게 다정하던, 형부라고 불렀던, 그녀의 남편이 어느 밤에 들이 닥쳐 마치 숨겨 준 것처럼 추궁하며 급하게 옆집에서 빌려 온 목돈으로 어디에선가 용하게 찾아 빼내어 데리고 떠났고 갚지 않아 어미가 한동안 갚느라 애를 먹었다.

그녀가 남긴 연 노란 날개 같은 한복 속에 몇 장의 지폐만 구겨진 채 숨어있었다.

그들은 결국 헤어졌고 엄마에게 냉정하게 거부당하며 열 살도 안된 딸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돌아서는 얘기를 남 얘기하듯 자세히 말해 주었는데 하도 덤덤해 보여 어둡고 못된 결정이었다는 대꾸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앉은뱅이 부엌에 걸어 놓은 큰 솥에서 데워지고 있던 뜨거운 물의 수증기가 아랫도리를 스치며 화상을 입고 열이 가시지 않아 통증으로 울면서도 동네 골목 엿장수의 신명 나게 쳐 대는 가위소리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박자를 맞추던 막내 딸이었다.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울며 펄펄 뛰다가 사정없이 머리를 쥐어 뜯기던 순간 죽이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엉뚱하게, 옆에서 보던 사람의 상채기로 남았다.

남동생 결혼식때 참석해 주고 뒤풀이 장소에서 신나게 춤추던 그녀가 먹고 파안대소 할 때 버려진 아이들이 잔망스레 겹쳐 떠올라 흥이 식어버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이면이었다.

이혼후의 그녀는 썩은 감자처럼 주변에 외면당하며 상하기 시작해 불과 얼마 전 세상을 등진 이모가 외딸의 그 꼴을 볼 수 없는 일이 다행이었다. 아이가 네 살 때 그녀는 십대 중반의 소녀였다. 어미가 안아 준 기억은 없는데 언니라고 여긴 그녀와의 기억은 또렷했다. 결혼 전 직장을 다니던 그녀는 머리끝에서 하이힐까지 영화에서 보는 여배우 같았다. 어쩌다 집으로 오면 삐쩍 마르고 누런 피부의 촌스러운 소녀가 된 아이는 감히 그녀에게 손을 대지도 못했고 먼지가 쌓여 마루에 앉지 못하고 서있나 싶어 부끄러웠다. 떠날 때는 전봇대 뒤에 숨어 서운함에 혼자 울었다. 무람없이 쌓인 속정情이었다.

홀 시어머니를 모신 가난한 외아들과 연애를 하고 혼인을 했는데 한동안, 셋방일 망정 무탈해 보여 보고싶으면 찾아가 끼어 자며 그녀가 낳은 아이들을 보았다. 내치지도 반기지도 않는 반응을 아랑곳 않았고 그 가족의 초대받지 않은 일원이 되어 그들의 삶 속에 끼어들며 절망과 갈등, 슬픔의 순간을 지켜보며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목격자였다.

심지어 이모가 사고를 당하던 날도 아이가 끼어 있었다. 그 마지막 날 아침의 정황에 대해 이상하게 그녀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그 해 담근 장맛이 변했는데 아깝다고 몇 번 혀를 차고 넘어갔다. 그때 옆 동네에 살던 그녀는 조금씩 지쳐가며 초조한 모습을 보였고 웃음기가 사라졌다. 딸을 업고 시어머니의 푼돈 일수를 걷으러 저녁 장사를 마무리할 무렵의 인근 시장 점포를 여러 군데 다니는 일에도 따라다녔다. 직장을 잃은 남편이 새 일을 갖지 못하며 여러 문제가 커지는 중이었다.

이모는 벌이라고 할 것도 없이 시장바닥에 옷가지 몇 벌 펼쳐 놓고 종일 앉아있다가 밤이면 어둠 속에서 강소주를 들이키고야 잠이 들었는데 전날 밤 좀 달랐다. 잘 사용하지 않는, 천장과 거의 붙은 다락 구석에서 작은 사진첩을 뒤져 들고 내려와 그 안의 사람들을 일일이 구분하며 웃거나 탄식하며 오래 들여다보았다. 이튿날 아침에 주인집 안방에서 또래 딸과 노닥거리는 아이를 크게 부르며 소리쳤다.

<야! 죽어도 고기나 좀 먹고 가자>

대학입시 준비를 하던 아이는 학원으로 향하고 이모는 시장 정류장에서 내려 버스 뒤쪽으로 빠져나와 길을 건너려다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을 피하지 못한 택시 문짝에 받히며 뒤로 넘어졌다. 병원에 누워있던 이모는 아침에 본 그대로의 차림이었고 머리 뒤쪽의 한 줄기 혈흔 외엔 자는 듯 깨끗했다. 오이지 무침과 찬밥 한 덩이 도시락을 풀어보던, 바로 달려온 어미가 내동댕이치며 안타까운 야단을 했다.

<겨우 이거 먹으려고..>

친 혈육 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었지만 어미는 자신도 지분이 있는 처지라는 듯 슬퍼하느라 다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생면부지의, 한 젊디젊은 택시기사와 심란한 머리 속으로 앞만 보며 조급하게 길을 건너던 중년의 한 여인이 한치의 어긋남 없이 치명적으로 얽혔다.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청춘의 그 기사는 넋이 나가 있다하고 어미는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있는 대로 난장판을 벌이며 살려내라고 울부짖어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생전 나타나지 않던 큰 아들이 눈물 한 방울 질금 대지도 않으며 부조금 가방을 들고 있는 아이에게 신경을 써 혼돈의 와중에 성질이 나고 기운이 빠졌다. 냉정한 사람이어서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마음 놓고 드러내는 치부에 오만정이 떨어졌다. 아이를 데리고 시내 어느 백화점에서 일하는 며느리를 찾아 간 적 있었다. 소소한 금액의 돈을 평소 답지 않게 풀 죽어 부탁하는 이모의 모습을 처음 보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물 한잔 내놓지 않고 면전에서 거절하던 냉정한 답은, 멀쩡한 직업과 외양이 부끄럽게 좀처럼 모친을 돌보지 않는 비정한 남편의 본을 딴 것 같았다. 일찍 돌아간 그들의 부친이 어떤 성정이며 모습이었는지, 내외간이 자주 다툴 때마다 자신이 끼어들면 쉬이 풀어졌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늘어놓던 어미는 왜 그들이 인척이 아닌 의자매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는지 몰랐다.



북쪽의 고향 사람 몇 명이 소식을 듣고 빈소로 찾아와 자기들끼리 귓속말로 아이가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의아해하며 가족이 아니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분명 자신을 향한 언급임을 알았지만 씁쓸한 서운함은 아주 잠깐이었다. 이모는 죽었다. 차디찬 방고래 같은 땅속으로 묻으러 가는 판에 그런 일이 무슨 대수랴 싶었다. 급하게 찾은 산중턱의 묘자리는 자갈이 많아 때가 살지 않겠다더니 정말 몇 년 후에도 도무지 푸른 것이 돋지 않던 쓸쓸한 자리였다. 한 겨울 낯때는 뭉툭한 손가락 마디처럼 유독 짧았고 어둑함이 금방 따라 덮을 기세의 무덤 주변은 썰렁하고 음산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서움을 느낀 사람들이 모두 허겁지겁 내려와 산 어귀의 국밥집으로 몰려들어갔다. 그렇게 춥고 어두운 곳에 혼자 두고 가도 되는 일인지 황망해 다리가 후들거려 뒤돌아 올려보니 꽤 높았다.

그날 고기를 볶아 먹지 않았더라면, 주인집 안방으로 놀러가지 않았으면 몇 분을 아낄 수 있었고 그 순간을 피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에 살릴 방도를 찾는 것처럼 급기야 초 단위로 좁혀가며 횡단보도로 들어가지 않은 사실에 동동거렸지만 부질없었다. 비빌 언덕 없는 동생을 도와주라는 어미의 간곡한 충고를 콧방귀로 무시한 이모의 큰 아들은 퇴직금을 챙겨 부랴부랴 이민을 가 버렸다. 불어터진 라면 한 젓가락 먹을 시간 없는 생활에 놀라고 지쳐 우울증을 얻고 자신이 살던 서울 집의 반도 안되는 공간의 구석에서 말도 잃고 울다가 세상을 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아내도 몇 달 후 지병으로 뒤를 따랐다. 많지도 않은 나이 들이었다. 그 형제들이 다시 재회하며 관계를 봉합하고 지내던 때 여서 또 다른 비극이었다.

자식들의 관심이나 향하고 있는 쪽을 파악할 능력이나 여력이 전무한 부모와 논리적인 대화를 할 수 없었던 이유가 그들의 지적능력의 달림과 어휘력의 부족임을 눈치채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색하고 배려 없는 아비에게 오래 삼켰던 침묵을 깨며 이제 말문이 터진 것 같은 어미가 화를 낼 때마다 따라오는 말이 있었다.

<저것만 안 생겼으면>

정체 몰랐던 차가운 침묵이 굉음이었음을 그때 알았다

<내가 원한 일이 아니야>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은 어미를 너무 아프게 할 것 같아 꾹꾹 밟아 밀어 넣어야 했다. 원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퍽 미화되고 겹겹이 포장된 것이며 사랑도 축복도 없이 그저 혼돈의 정점에서 결정된 산물이 왜 하필 자신인지 길길이 뛰고 싶은 참에 원망까지 듣는 일은 억울했다. 자식이 되는 일을 허락한 적 없다고 철없이 항변했다간 얼핏 들어도 벼린 칼끝 같은 소리임이 분명하니 걸핏하면 들으면서 뜻을 알지 못해 사전까지 뒤져 본, 북쪽 사람들이 쓰는 억센 욕만 들을 일이 뻔했다.

부모가 한때 소유했고 지키지 못하고 넘겨야 했던 택지는 곧 번화가로 개발된다는 소식이 들리며 평생의 뼈아픈 일이 되었는데 임자가 아니었다고 체념하기엔 입이 벌어지는, 대를 이어 팔자가 바뀔 정도의 가치를 물정에 무르고 셈에 어두워 날려버린 셈이어서 만취한 아비의 눈은 그제 살기마저 돌았다. 저녁을 함께 먹다가 문 쪽에서 거친 인기척이 나면 모두 불에 데인 것처럼 흩어지며 달아나 숨어야 했다. 손을 잡고 기차를 함께 타 본 적 없고 안기거나 업혀 본 기억도 까마득하고 너무 일찍이 계란을 받아먹은 탓에 흘리지 않고 입으로 넣어주느라 한 손으로 괴며 조심스럽던 아비가 머리속에 없는 동생들이 당장에 느끼는 것은 오로지 심장이 조이는 공포였다.

피폐 해져가는 아비가 벌이는 어김없는 격일의 고문 같은 주정이 너무 지겹고 끔찍해 어쩌면 누구의 보복일 수 있다는 생각조차 했던 맏이는 자신이 너무 많은 이야기를 읽은 탓이라며 그 순간적인 느낌을 물리고 싶었는데 어느 날 아비의 광란에 끼어들며 어미를 방어하다가 우연히 듣게 된 몇 마디가 꼬리를 물었다. 케케묵은 과거지사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자세한 내막을 알 길 없어도 상대의 아픈 구석을 끄집어 내며 트집잡고 있는 아비는 술기운이었다고 변명했지만 속없는 어미가 일일이 이르는 횟수로 보아 상습적이었다.

삭일 수 없어 켜켜이 쌓인 어미의 분노는 독배처럼 속내를 상하게 만들며 예사롭지 않은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구성된 증강현실 속에서 동네 사람들이 무슨 이유인지 어미를 존경하며 떠 받들고 있다고 믿는 눈치였고 시장이든 병원이든 가는 곳마다 누구도 함부로 대 할 수 없는 위엄을 스스로 세우고 있어 행여 자신을 평범한 여인네로 여기는 기색이 보이면 상대가 영문을 모르는 시비를 걸었다. 입을 열면 뒤의 내용이 예상될 정도였는데 어떤 심리에 의한 것인지를 진단하기 전에 어미가 너무 안쓰러워 그 버팀목을 지적하거나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씻는 일도 아끼게 된 어미가 집착하고 은근히 늘 내세우는 미모가 무색해지고 무척 공격적으로 변해 술을 안 먹는 날은 아비가 오히려 밀리고 불쌍해 보이며 화풀이 당하는 역할이 바뀌는 일에 그들이 무척 동화되어 풀어주어도 도망가지 못할 서로의 인질로 보였다. 어미가 계획한 복수의 시나리오는 결코 시도하지 못한 채 마주앉아 들어주어야 하는 딸의 주리를 트는 용도로만 쓰였다.

인지할 수 있는 나이에 함께 지내 나름 내막을 알고 있던 그녀, 이모의 딸에게서 어미의 과거는 예고도 없이 느닷없이 튀어나왔다. 여전히 왕래가 있었고 아이가 여자로 성장할 시기를 기다렸다가 때가 되어 발설했다는 호의로 여기기엔 상황도 태도도 적절하지 않았다. 바닥 모르는 추락으로 생존을 위한 남자 바꾸기를 반복하다가 아버지 뻘의 노인과 함께 살던 때였다. 먹고 잘 곳 없는 치명적인 옹색함에서 택한 길이었다. 성기능이 사라진 상태에 몹시 아쉬워하며 둘이 어떻게 노는지 토로해야 하는 신세에 뒤틀린 심보가 일으킨 충동적인 일로 느껴져 고약했다. 된불처럼 심장을 사정없이 치고 들어온 내용에 놀란 울대가 껄떡거리며 소리를 내려 해 참느라 애를 쓰는 상대에게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무표정으로 예고도 없이 쏟아내어 모욕적이었다. 그 묵은 인연에 회의를 품은 계기였다.



폭탄 같이 터진 어미의 사연에 잠깐 의구심을 품었지만 정신을 추스르고 아비의 주정 속에 등장했던 내용의 기억으로 문장의 퍼즐을 끼워 맞추니 얼추 앞 뒤 사정이 정체를 드러냈다. 분명 왜곡된 골자의 그 진술이 신빙성이 있었으면 결과는 오히려 훨씬 순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아비에게 조금은 동의했을 것이라는 어딘지 근질거리는 의견을 내놓은 그녀는 자의를 섞고 있었다. 일방적인 폭력일수 있었다는 추측은 방정맞은 상상을 불렀는데 피하지 못한 육감이었다. 그들은 결혼을 했고 함께 한다는 피상적인 결론으로 더 깊게 파고드는 일을 거부한 것은 누구도 손상하고 싶지 않았고 꾸물꾸물 기척을 내며 기어 나오는 예감에 이미 괴로워 정리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어미는 첫 남편과 함께 남으로 내려왔으며 그 사람은 양식을 구하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아내를 무척 아껴 사람들 앞에서 주저 않고 업고 다닐 정도였다는 그가 탄 작은 배가 풍랑에 뒤집혔다. 지독한 절망의 몸부림 속에 마지막 순간의 고통을 누구에게 전했는지 짐작은 어렵지 않았다. 그 사람의 성씨와 생김새를 알려주었고 소식을 들은 어미가 방에서 엎드려 울던 모습을 기억한다고 했다. 왜 엉뚱하게 혼자 옆집 사람들과 떠나왔는지 어딘가 허술했던 대목이 풀어지며 마디 하나를 잡은 느낌이었다. 아비를 사랑했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뒤따르는 사실은 심각하고 당황스러운 의미 밖에 없었다.

아비와 어미가 골고루 섞인 양쪽을 꼬아 연결된 띠가 어떤 형태로는 끊어질 확률은 희박해 어쩌면 모든 일이 작은 아이가 딱 그런 상태로 세상으로 나오기 위한 것이었나 과장된 망상까지 등장한 머리속이 터질 것 같았다. 북쪽의 두 사람은 움직이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도 동네를 종일 걸어야 될지 모른다는 걱정속에 혹시 망자의 핏줄이었는지 묘한 기대 섞인 의문이 들었다가 이내 실소했다. 두 남자가 같은 모습일리 없었다.

기요의 상자를 열어버린 여인에 대한 어미의 분노가 극에 달해 한동안 시끄러웠지만 어미의 나이는 끝내 의문으로 남았다. 비슷해 보이는 젊은 시기에 임의대로 만든 가호적 내용에 아비가 개입한 것 같지 않았다. 어미의 주장과 간극이 넓은 숫자가 나왔지만 확연하게 보이는 쪽이 진실이라고 끌어당겼다. 별 의미는 없었다. 어느 시기부터 드러나는 외양의 차이는 생잡이로 혹사된 이유 때문만이 아닌 숨길 수 없는 자연스러운 흔적이었다. 단순하고 배려가 없었을 아비의 성욕을, 일찍 마른 껍질이 되어 버린 어미가 필사적으로 기피하며 그들의 밤이 매일 난리통이었다. 자궁에 병이 생기며 성적 매력을 잃어버린 아내의 상태에 분명 짜증이 났고 내내 외도를 하면서 지난 일을 새삼 들먹이는 본심이 질투인지는 애매했다.

어디까지 알면서 넘어간 것인지 살면서 내내 꼴록꼴록 했던 모양이었고 자신이 무척 투명한 처지였고 다소 억울하다는 의미로 할퀴는 짓이 졸렬했다. 아비의 실눈은 헛웃음이 나 쟁여 놓았다가 술이 깬 날 따져볼 것이라 여러 번 마음먹었지만 그런 날은 아침부터 딴 사람처럼 부끄러워해 늘 허사였다. 대화라는 것을 시도했다 해도 아비는 피했을 것이고 따라다니며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기다리던 굴절의 시점에 열리며 늘 사방으로 흩어졌다. 부서진 창 틈 사이로 갑자기 세찬 바람이 훅 들어와 펼쳐 놓은 책 몇 페이지가 놀라 후다닥 넘어갔고 가뭇없는 청춘이 그 사이에 있었다.

열 다섯이 되기도 전에 자신이 학교 앞의 대여점에서 더 빌릴 것이 없을 정도의 숱한 책을 읽었고 언어에 관심과 재주를 보이며 탈없는 선택을 할 때쯤 기저와 내력의 입력 값으로 오류라는 듯 훼방꾼은 바로 나타났다.

같은 반의 새로 사귄 친구가 엄격한 아버지를 용하게 피해 다니며 들락거리는 곳에 자신의 사복을 입혀주고 꼬여 어느 밤 묘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입구에서부터 울리는 굵은 진동은 전신의 감각을 자극하는, 경험하지 못한 이성과의 접촉 같이 달짝한 흥분을 일으키며 진통제처럼 잠시 통증을 덜어주는 종류였다.

내면의 집중과 몰입을 요구하고 진을 빼며 오장이 무클해지는 오르간의 음률과 판이했다. 친구는 애인과 밀담을 나누느라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버려 혼자 뻘쭘하게 주변을 살피다가 마침 무대위로 올라와 야릇한 춤을 추기 시작한 한 미소년에 눈길이 멎으며 홀리듯 얼어버렸다. 분명 처음 와 본 곳인데 언젠가 이런 분위기의 장소에 있었고 즐겼다는 기시감으로 솜덩어리 같은 기운이 목구멍으로 올라와 호흡을 막고 한기를 느끼는 듯 아래턱을 떨었다. 숨겨져 박힌 심지가 올라오며 불이 댕겨진 듯했다. 더는 책을 잃지 않았다. 또 다른, 알 수 없는 감정의 세찬 끌림으로 요란하게 소용돌이로 휘말렸다. 선택의 기로에서 늘 휘말려 드는 묘한 영향력에 대해 곰곰이 생각 해 볼 때면 이미 일은 벌어지고 되돌릴 수 없어 후유증으로 절절 매느라 어느 지점으로 향하고 있는지 의문조차 가질 여력이 없었다.

집안의 여식들은 죄다 술에 중독되었거나 그렇게 될 사람들과 얽혔다. 불변의 법칙처럼 희한하게 한 발도 아비를 벗어나지 못했다. 서로의 페르소나이며 한 가지에 달린 이파리 들로 바람이든 볕이든 무작위로 되비치거나 함께 흔들리면서도 그렇게 여겨지는 일에 자존심을 들먹이며 동의하지 않아 우애라는 것을 나누지도 못했다. 반듯하고 풍부한 것은 불편하고 어딘가 깨지고 부서진 결핍과 상처 쪽에 애착을 두는 일의 결과를 따질 수 있는 현실감이 빈약하기도 했지만 부모에 대한 열등감과 형편은 진심과 능력이 있는 상대를 알아서 뒷걸음치게 했다.

걸핏하면 집을 나가던 막내 년이 스물도 되기 전에 만삭이 되어 먼저 결혼을 시켰다. 어릴 적부터 치장하는 일에 목을 매더니 동갑내기와 어린 부부가 되고 한숨 돌리기도 전에 어떤 시기인 줄도 모르고 낮술에 취해 동네에서 소란을 피던 남편이 어디로 끌려가 몇 년을 생이별했다. 살아서 돌아오긴 했지만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아볼 수도 없는 꼴이었고 동생은 이미 변심해 어린 것들을 따로 시가로 보낸 뒤였다. 유산으로 막대한 돈을 물려받고서도 능력 없는 팔랑귀 남편의 결론은 파산과 술중독으로 인한 요절이었다. 마흔을 넘기지 못했다.

또 다른 딸이 허락도 없이 이혼하고 아비의 집으로 돌아와 늦게까지 퍼질러 자곤 해 누가 누구와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구분도 어려운 와중에 오월이면 붉디붉은 덩굴장미가 벽을 타며 감아 대던 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술에 젖은 아비의 말더듬 증세가 부쩍 심해졌다.



무척 만만하고 온순하다는 이유 하나로 만난 남자와 결혼을 감행하기로 했다. 공식적으로 집을 떠날 수 있는 길이었다. 여자가 강렬하게 매료되는, 혈관이 솟은 아래팔과 큰 손이나 잘 생긴 목덜미, 억센 턱수염 어느 것 하나 못 가진 그저 미끈둥하고 허여멀금한 인물이었다. 다만 사람 좋은 웃음으로 호감을 아니 가지는 이가 없었고 너무나 점잖은 태도에 아비가 허락했다. 늦어 진 군복무 기간으로 살아갈 능력을 확인하는 기회를 놓쳤고 지나치게 둥근 이마가 핑계처럼 막판에 새삼스레 걸리며 파투 내고 싶은 충동이 꺼림칙하게 달라붙었지만 수년을 보아온 사이로 이미 너무 멀리 들어와 있어 계속 가는 것이 덜 복잡했다. 도무지 이골 나지 않는 살기 어린 주정속에 끝내 내비친 맏딸로 향한 서글픈 증오가 발길을 재촉했다.

남자의 생모가 그 예전에 집안에서 내쳐진 죄목은 <남편의 대의를 꺾었다> 는 궤변이었는데 친정에서 더 가져올 것이 없다는 저의가 숨어있었다. 족보와 제기를 양 옆구리에 낀 달변가인 그 부친에게 휘말린 여인들이 수두룩했다. 돼지우리에 던질 망정 주지 않아 사생아로 만들 수 없는 그네들이 남겨야 했던 배다른 형제들이 우글거리는 집안에서 남자가 자랐다. 갑자기 사라진 엄마를 찾아 다니며 함께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수저를 들어야 했던 여덟 살배기 남자아이에 대한 연민은 주제 넘은 오지랖이었다. 더는 홀로 늙은 노모를 애틋하게 여기지 않았고 두번의 저녁을 원하지도 않으며 생도지방으로 재봉질로 모은 돈만 주기적으로 확인하며 털어가는 중이었다.

함께 산다는 일은 가끔 만나 커피 마시고 영화보고 서로를 탐하고 헤어지는 단순한 요소가 아닌 전체를 요구하는 구조였다. 누가 누구의 알고리즘으로 휩쓸렸는지 맞아 떨어진 조건을 추적해 볼 여유는 남자가 책임지기를 거부한 발등에 떨어진 당장의 생계에 밀려 멀리 달아났다. 바로 드러내 보인 남자의 숨겨졌던 습관인 도박으로 주변이 초토화가 되며 얼키설키 뒤얽힌 빚이 칡덩굴처럼 나타나 방패삼은 여자가 무변의 공간으로 던져지며 퇴로의 열쇠를 삼켜버린 꼴이 되었다. 각자 서로 다른 감정과 처지가 뒤늦게 드러났다. 별 개념 없는 결혼에 자루도 없는 양날의 검을 휘두르며 내부가 분열된 남자는 방향 모르는 앙갚음 중이었다.

혹시 자신의 집안에서 무슨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옮긴 것이 아닌지 의심 할 정도의 반전에 여자가 반쯤 정신이 나갔다.

약속한 것처럼 줄줄이 현실과 갈등을 빚는 자식들이 자신의 숭고한 희생을 값없게 만든 사실에 원망을 쏟아내며 어미는 스스로 구축한 질곡 같은 철벽 속 리플리가 되어 허언과 거만함으로 지탱했다. 잊으며 살아내는 일이 겨워 술에 주도권을 넘기고 정신을 잃은 아비를 일으켜 철로변에 힘겹게 세웠고 어미의 굽은 등을 반듯하게 받쳐주며 쪽빛 하늘을 지붕삼은 햇살지기 마당에 서서 하교길을 맞아 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들은 이미 사라진 것 같았다.

세번의 중풍도 아비의 삶에 대한 강한 욕구에 저항하지 못했다. 정욕과 술을 빼앗긴 아비는 후유증으로 거의 집밖을 나가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그들 만의 일정과 습관을 반복하며 지루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좀처럼 청소를 하지 않아 악취가 진동하고 엉망이 된 살림을 건드리지 못하게 고집을 부리는 어미는, 수습되지 못한 여러 감정의 껍데기의 숙주로 잡혀 지탱하는 듯했다. 그러나 더는 피할 수 없는 그 날이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 서늘하게 세상과 차단할 안개였다.

거주의 흔적을 확인할 때 무안스럽게도 길게 찍혀 나오던 이동의 기록은 물속에 뿌리가 있는 나무로 태어났다는 사주를 무시 못한 여자의 요소와 가족의 한뎃잠자리조차 개의치 않는 파괴적인 남자의 기질이 기막히게 합을 이룬 시너지였다. 기한이 지나면 보증금을 다시 만들어 옮겨야 했던 동네 마다 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부러 마주치지 않는 길로 돌아가면서도 편치 않은 낯빛이던 여자가 결국 어느 날 빈 성전 구석에 앉았다.

땡볕이 내려 꽂히는 중복 허리였다. 어디든 과하게 열렬한 사람들이 있는지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건 넨 한 여신도가 몇 번 마주치더니 혼자 추측하고 허락도 없이 신청한 면담자리에 등 떠밀려 얼떨결에 앉게 되었다. 칸막이가 없고 넓은 공간이라는 것 외엔 그때껏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트라우마를 가진 장소로 여겨져 바짝 긴장하며 당황했고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진땀이 나며 난감했다. 나이를 가늠키 어려운 풍채의 사제는 별 의심없이 믿음에 관한 고민을 시작해 주기를 기다려 주었다. 준비하지 못한 일이라고 털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날 것인지 잠시 생각하던 여자가 세찬 따귀를 맞은 것 마냥 느닷없이 소나기 같은 서러운 울음을 터트리며 고함을 내질러 정적은 깨어졌다. 미처 자제할 틈 없이 봇물이 터졌다.

<왜 바라만 보나? 왜 구해주지 않는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가? >

난동에 가까운 질문은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는지 일인극처럼 일방적으로 흐르며 고발 같은 고백이 혼란스럽게 이어졌다. 울음이 딸꾹질로 이어지며 토막나는 내용은 혼자 사는 이가 듣기에 무척 불편했지만 여자는 오랜 시간 전지전능함의 대리자에 이입하지 못한 사죄를 하듯 격렬하게 속을 열어젖혔다. 마루타처럼 잘리고 찔린 상처를 미친 듯 쏟아내며 종잡을 수 없는 덫을 설명하려 호흡을 다시 가다듬던 여자의 빗맞은 시선이 정면으로 움직이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금테 안경 너머 곤혹스럽게 흔들리는 눈과 마주친 순간이었다. 서로가 놀랐다. 그동안 혹시 말하기 곤란한 문장마다 무슨 새로운 체계가 세워져 암호화가 되었나 의심이 든 동시에 얼음 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수치심에 정신이 번쩍 들며 벌떡 서려다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거리는 자세로 바로 뛰쳐나갔다. 문 앞에서 누가 팔을 잡은 것 같았지만 화가 난 사람처럼 뿌리치고 앞만 보고 허둥지둥 달아났다.



여자가 자신이 요주의자로 간주된 사실을 알게 된 일은 그 날 후 같은 봉변을 앳된 젊은 후배가 행여 당할까 걱정하는 대화를 뒷전에서 직접 듣게 된 탓이었다. 적나라했지만 그만한 내용에 그런 반응은 젊지 않은 연배에 처음 들어 본 내용이라는 증거 같아 여자가 느낀 수치심만큼 반발이 올라왔다. 자신이 괴물이 된 것 같은 당혹감으로, 결코 고상한 죄가 있을 수 없고 양쪽이 다 인간인 상황에서 어느 쪽에서 분명 은유나 비유법을 사용하며 암묵적이 되었다는 추측으로 좌절을 덜려 했다. 그러나 사달을 낸 것은 확실 해, 그 예전 작은 아이가 주말마다 치르던 생된 노심에 면목없는 짓이었다. 안달하던 여자가 어느 새벽 여명 무렵의 열차에 기어이 몸을 실었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연착없이 도착한 어린 시절 살던 곳은 생기가 덜하고 빳빳한 풀기가 빠진 듯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아이가 있는 성전은 그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고목처럼 묵묵히 서 있었다. 높은 건물들이 생겨 낯설어진 주변에 둘러싸여 축소된 듯한 착시감은 어리둥절할 정도로 좁아 보이는 마당에서부터 느껴졌고 기억 속보다 훨씬 개수가 적은 계단에도 의아해하며 중간 몇 걸음 정도 평평한 곳에서 교리문답 일등상을 어미가 보는 앞에서 받았던 일을 끌어 냈다.

말없이 떠난 그 수녀가 오르간으로 반주를 해 주면, 주홍빛으로 달구어져 퍼지는 용광로 같은 저녁노을을 힐끗 보다 눈이 부셔 한 박자를 놓치며 노래를 불렀던 뒤편의 교실이 아직 남아있는지 궁금했지만 일부러 들러 볼 기운이 빠지고 있었다. 큰 숨을 몇 번 내쉬던 여자가 계단으로 올랐다.

늘 열려 있던 쪽의 문을 온몸으로 밀고 들어가면 빈 공간은 고요한 아늑함으로 반겨주었고 함께 들어온 바람은 앞장서 돌아다니며 미세한 소리를 허공으로 게우곤 했다. 운동장만큼이나 넓었던 곳은 세월에 삭아 쪼그라든 마냥 반 정도는 좁아 보여 같은 곳인지 의심스러웠다. 이층의 성가대 자리에 놓여있는 기타와 타악기를 잠시 보더니 오르간이 사라진 일은 꽤 오래 되었다고 알려주는 피아노의 낡고 긁힌 부분을 손으로 두어 번 쓸었다. 이곳 저곳을 확인해보다가 아이가 누워 있던 위치의 자리를 어림잡고 깊숙이 기대 앉았다. 잠을 설쳤고 첫차를 타느라 짙은 가을의 새벽 냉기에 떨었던 몸이 풀리는지 내려오는 눈가풀을 견디며 애를 쓰더니 잠이 든 모양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잠들어 있던 여자가 청소 도구를 들고 무리 지어 들어온 신도들의 기척에 퍼뜩 깨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주섬주섬 떠날 채비를 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부조를 통해 들어온 볕의 색조가 바뀌어 있었다. 밖으로 나와 방향을 잃은 사람처럼 서있는 여자의 뺨을 상크름한 바람 한줄기가 스치며 머무르더니 머리카락 몇 오라기를 흩날리게 했다. 금방 두 눈이 그렁그렁 해지더니 투둑투둑 굵은 눈물을 떨구며 오래 움직이지 않았는데 오래 전의 작은 아이처럼 입이 양쪽으로 길게 벌어지며 촘촘한 치아를 드러내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여자는 말을 아꼈다. 안쓰러운 작은 아이를 더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저 편히 지내기를 원한다. 더는 알고 싶은 일이 없다. 변명과 이유를 제외하고 낱낱이 인정하는 일이 살점을 도려내는 것 같다. 아비와 어미는 자신들의, 각자 의미가 다른 눈물을 돌려보냈지만 날것 같은 사랑은 더욱 애달펐다.

누군가는 화를 풀어야 하고, 그 의지를 강하게 입력한 여자의 알고리듬이 지진이 난 듯 흔들리고 당황하며 어떤 절충안을 내밀지 지켜볼 것이다. 조급한 불안도 두려움도 없다고 거듭 되뇌었는데 정말 그렇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