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에서 파견된 인도인 대령
영문 기자 출신 언론인·지식인
대구경북-케랄라주 협력 필요
대학원 시절 무렵의 일이다. 서울에서 국제학술대회 발표를 마친 후 KTX를 타고 대구로 내려오는데 옆자리에 할아버지 한 분이 앉으셨다. 자리에 앉은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시는 듯 보였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KTX가 속도를 높여 대구를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하면서 피로에 지친 나는 눈을 감고 잠시 낮잠을 청했다.
그때 할아버지가 갑자기 "혹시 우리말 할 줄 아시유?"라고 말을 건네셨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예, 조금요"라고 답했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일순 밝아지며 "인도분이 맞죠?"라고 물으셨다. 내가 "예, 맞습니다"라고 답했더니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하신 후, 긴 숨을 내쉬면서 "인도라는 나라에 감사하고 싶어요. 학생을 보고 갑자기 내 유년 시절이 생각났어요"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말한 유년 시절은 6·25전쟁의 비극이 일어난 그 시절이었다.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는 그 재앙에 처한 무수한 사람을 위해 구호 물자 운송을 도운 인도인 육군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인도는 1947년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했지만, 종교적 이데올로기 탓에 민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다. 국가의 독립이 국가의 분열과 함께 이루어졌던 것이다. 당시 인도 초대 총리 네루는 인도처럼 민족상잔의 비극을 겪는 한국의 모습을 보며 한국에 인도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루 총리는 유엔을 통해 627명의 의무병을 파견해 전쟁 부상자들을 도왔다. 할아버지가 말한 인도 육군의 도움이란 바로 이 원조를 말하는 것으로, 그분은 어려운 상황에서 인도가 한국에 보여준 연대감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아울러 자신이 대구 한복판에 묻혀 있는 운니 나야 인도인 대령 기념비에 가서 자주 참배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운니 나야 대령(Colonel M. K. Unni Nayar). 많은 사람이 그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한다. 한국전쟁 시기에 유엔에서 파견된 인도인 대령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그가 누구인지, 어떤 경위로 한국에 왔는지, 인도의 어느 지역 출신인지 등에 대해서 한국은 물론 인도 언론에서도 거의 제대로 기록된 바가 없다. 운니 나야 대령은 한국과 인도 관계를 상징하는 인물이면서, 특히 대구경북과 특별한 인연을 가진 인도인이다.
나야 대령은 단지 군인만은 아니었다. 그는 영국 식민지 시기부터 영문 기자로 활동한 지식인이자 언론인이었다. 그의 고향인 케랄라주는 인도에서 교육 수준이 가장 높고 치안 역시 최고로 좋은 지역으로 유명하다. 케랄라주는 또한 세계에서 신이 축복한 땅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나야 대령은 그러한 신이 축복한 땅에서 1911년에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후, 남부 인도의 명문 마드라스 크리스천 대학교에서 문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학창 시절 때부터 활달했으며 열정을 가지고 창작 활동을 하면서 기자 활동을 했다. 당시 그는 정기적으로 마드라스(현 첸나이)에서 발행되는 대표 주간 문예지에 글을 연재했다. 이후 그는 영자 신문사에서 일하는 한편, 문예지에 '나의 인생 이야기'라는 제목의 유머러스한 칼럼을 연재하여 인기를 끌었다.
젊은 나이에 수많은 글을 남겼으며 책도 냈다. 그의 대표 작품으로는 '나의 말라바르: My Malabar'가 있는데 인도 남해안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는 인도 육군 장교로 임명되었을 무렵에는 미국의 잡지에 글을 쓰기도 했다.
나야 대령은 뛰어난 지적 능력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강인해서 짧은 시간 내에 군에서 승진할 수 있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싱가포르, 버마(현 미얀마), 중동 및 북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 파견되어 전선에서 전쟁의 실제 상황을 보도하는 일을 수행했다. 인도가 영국에서 해방된 후 그는 미국 워싱턴의 주미국 인도대사관의 정보관으로 임용되어 미국과 영국의 여러 신문사에 글을 연재하며 미국 생활을 했다.
그리고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 한국 위원단의 인도 대표로 지정되어 아내와 어린 딸을 두고 한국 땅을 밟는다. 전쟁 보도 경험이 많았던 그는 대구를 비롯해 전투가 벌어지던 한국의 여러 지역을 방문하여 전황을 실시간으로 유엔에 보고했다. 1950년 8월 12일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던 왜관 근처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뢰 폭발로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인도에 유해를 옮겨 안치하고자 했으나 전쟁 중이라 끝내 고국으로 송환되지 못한 채 대구의 범어공원에 묻혔다.
선과 악 사이, 혹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그 혼란스럽고도 참혹한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은 생명을 걸 정도의 신념이 필요한 일이다.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숭고한 정신이 없으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경상북도 지사였던 조재천 지사가 그의 헌신을 기리고자 전쟁 중임에도 성금을 모아 나야 대령의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동시에 인도 정부는 그의 젊은 죽음에 대해서 깊은 애도를 표하며 '운니 나야라는 가족을 상실해서 큰 자산을 잃었다'며 검은 테두리의 특별 관보를 발행하여 보도했다.
이후 한국과 인도 간에 수교가 맺어짐에 따라 그의 아내 비밀라 데비와 딸인 파르바티 모한이 대구를 찾아와 기념비에 사랑의 눈물을 흘리고 꽃을 바치면서 기도를 올렸다. 그의 아내는 이후에도 몇 번이나 남편의 기념비를 찾아왔다. 그렇게 남편의 넋을 기리고 애틋한 마음을 새기다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편 옆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긴다. 딸인 파르바티 모한이 어머니의 유언을 수성구청에 보낸 결과, 비밀라 데비의 유해는 마침내 남편 곁에 묻히게 된다.
수성구 범어동의 KBS 대구방송총국을 조금 지나서 오른쪽 200m 정도 더 가면 범어공원이 나온다. 범어라는 단어는 '뜰 범(泛)' 자에다가 '물고기 어(魚)' 자를 넣고 만든 단어이다. 공교롭게도 인도 신화에서 비슈누 신의 첫 번째 화신이 곧 물 위에 떠 있는 큰 물고기이다. 이렇게 보면 범어공원은 인도 신화를 연상시킬 만한 이름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뜻을 지닌 범어공원의 입구에는 '나야 대령 기념비'라는 글자가 새겨진 안내판이 있다. 그 안내판에는 '불멸의 사랑! 인도와 한국을 잇다'라는 제목 아래 나야 대령과 부인 비밀라 데비의 사랑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기념비의 내용을 읽고 있으면 가슴이 저려오며, 조국에서 5천㎞나 떨어진 곳에 잠든 이 헌신자의 숭고한 정신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가 73년이나 되었고, 나야 대령이 순국한 지도 73년이나 되었다. 올해 한국과 인도는 수교 50주년인 만큼 양국 간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해이다.
나는 운니 나야 대령의 고향인 케랄라주와의 협력을 제안하고 싶다. 케랄라주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세계 50곳 중 하나로 알려졌고 '신의 개인 소유지'(Gods Own Land)라고 불리는 곳이다. 나야 대령이라는 인물을 계기로 아름다운 교류가 진행된다면 대구와 경북이 세계적 도시로 더욱더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칸 앞잘 아흐메드(영남대 박정희새마을연구원 연구교수 khanafzal@y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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