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 호모에스테티쿠스] <11> 파우스트, 회춘한 학자의 탐미 여정 (2)

입력 2023-06-19 11:46:02 수정 2023-06-19 15:33:03

이경규 계명대 교수

알프스 초원. 게티이미지 뱅크.
알프스 초원. 게티이미지 뱅크.
이경규 계명대 교수
이경규 계명대 교수

<파우스트> 2부에는 두 가지 중요한 미적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자연이 그 주역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이 그 주역이다. 드라마는 막이 열리자마자 찬란한 알프스의 초원이 펼쳐진다. 꽃들이 봄비처럼 흩날리고 초원의 녹색이 대기를 향해 빛을 발한다. 파우스트는 그 초원에 누워 몸의 피곤함은 물론 그레트헨에 대한 깊은 죄책감을 씻어낸다. 자연의 보편적 아름다움은 선한 자나 악한 자나 구별하지 않는다. 자연미를 대변하는 요정이 이렇게 말한다. "격렬한 마음의 분란을 잠재우고 쓰라린 비난의 화살을 돌려라. 내면의 두려움을 정화하라." 정화하고 치유하는 자연미의 효력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렇게 파우스트는 알프스 초원에 누워 자연의 치료를 받고 심신의 건강을 회복한다.

그의 다음 행보는 황제의 궁에 들어가 곤경에 빠진 황제를 돕고 연회를 즐기는 일이다. 파우스트는 연회장에서 메피스토가 마술로 불러온 희랍의 헬레나를 보고 깊은 충격을 받는다.

저게 내 두 눈으로 보고 있는 것 맞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름다움의 샘이 철철 넘치는구나. 내 공포의 행군이 이런 지복을 가져올 줄이야!

파우스트가 헬레나를 만지려고 다가가자 환영은 흩어져 버린다. 이때부터 파우스트는 진짜 헬레나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아우성을 친다. 그는 또다시 메피스토의 도움을 받아 지하세계로 내려간다. 여기서 북방(독일)의 영주가 되어 남방(그리스)의 미녀 헬레나를 만난다. 그런데 헬레나는 누구인가? 잘 알듯이 헬레나는 제우스와 레다 사이에 태어난 반신반인으로 어릴 때부터 경국지색의 미모를 드러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권력·부·명예·지혜를 다 포기하고 데려간 그리스 최고의 미녀다. 그것도 9살 된 딸까지 있는 유부녀다. 그리스는 전쟁을 통해 12년 만에(전쟁준비 2년 + 전쟁 10년) 트로이를 함락시키고 헬레나를 되찾아 온다. 남편 메넬라오스는 그녀의 과거 같은 것은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방부제 같은' 아름다움만 보인다. 미의 현전에 도덕은 무력해진다.

괴테는 이 희대의 미녀를 독일 남자와 결혼시키므로 독일의 희랍 사랑을 과시한다. 파우스트가 사건에 뛰어드는 시점은 트로이 전쟁 후 헬레나가 12년 만에 그리스로 막 돌아온 때다. 원래 이야기와 달리 괴테는 메넬라오스를 질투와 복수심에 사로잡힌 옹졸한 남자로 바꾸어 놓는다. 파리스와 달리 유부녀 탈취의 정당성을 마련해 둔다. 즉, 메넬라오스는 집으로 데려온 헬레나를 아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신전에 제물로 바치려 한다. 헬레나는 도망치고 파우스트는 그런 헬레나를 구하여 부부가 된다. 두 사람은 전설의 낙원 아르카디아로 들어가 꿈같은 세월을 보낸다.

그러나 이들에게 오이포리온이라는 아들이 태어나면서 행복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헬레나가 "성스러운 황홀이 만든 행복한 3"이라고 했던 오이포리온은 높이 뛰어오르는 놀이를 너무 좋아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너무 높이 올라 추락하여 죽어버린다. 과도한 상승 욕구와 자유에의 욕망이 낳은 결과다. 아들의 죽음에 상심한 헬레나는 '행복과 미는 결코 오래 함께할 수 없다.'라는 말을 되뇌며 다시 지하세계로 사라진다. 미의 흔적으로 허울만 남긴다.

헬레나는 그레트헨의 에로스적 자연미와 달리 예술미를 대변한다. 둘 다 眞과 善을 벗어난 순수한 아름다움을 대변한다. 특히 헬레나는 아름다움 외에 어떤 다른 덕목도 알지 못한다. 그러한 미녀를 사랑하고 지극한 자연미까지 체험한 파우스트이지만 끝내 "순간이여 멈춰라. 너는 너무나 아름답구나.'라는 한 마디를 내뱉지 못한다. 2% 부족하다. 메피스토나 독자나 제5막에 펼쳐질 善의 무대를 기다려야 한다. 말하자면, 파우스트는 眞의 막다른 골목에서 美의 샛길로 빠졌다가 다시 善의 언덕으로 올라가는, 근대 휴머니즘의 여정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라 하겠다. 아쉽지만 여기서는 주어진 주제(美)에 충실하여 善의 영토로 넘어가지는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