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혜 수필가
밀봉된 봉지를 열자 고소한 커피 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간질인다. 모양이 예쁘고 상처가 없는 것으로만 골라 커피콩 60알을 센다. 그라인드에 넣고 돌리자 사그락 사그락 감미로운 소리가 나른한 아침을 연다. 90℃ 정도로 식힌 물을 천천히 부어 2분 30초간 정성으로 내린다.
커피는 맛보다 향으로 먼저 먹는다. 커피 향이 안개처럼 집 안 구석구석으로 번져 나간다. 첫 모금을 머금자 쌉쌀하고 은은한 단맛이 몸의 감각을 깨운다. 맛이 일품이다. 창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며 다시 한 모금, 음악을 틀며 한 모금, 그리고 앉아서 음미한다.
베토벤은 커피를 유난히 좋아했다고 한다. 매일 이른 아침 깨끗한 원두 60알을 정확하게 세어 분쇄기에 갈아 커피를 내리며 하루를 시작했다고. 그의 방은 항상 악보나 종이가 흩어져 어지러웠으나 책상에는 악보 한 장과 커피 추출 용구가 놓여있었다니 커피에 대한 그의 애정을 짐작할만하다.
60알의 커피가 아득한 시간을 훌쩍 넘어 베토벤과 나를 잇는다. 같은 방식으로 커피를 내리고 마시며 그의 음악을 듣고 삶을 더듬어보게 되었다. 천재 음악가, 괴팍한 성격, 청각장애인 등 수식어가 많이 따라다니는 사람, 수많은 작품을 썼음에도 한 번 그린 악보는 머리속에 다 있다고 한 그 천재성이 부럽다.
얼마 전 노트북이 고장 난 일이 있었다. 인터넷을 뒤져가며 아무리 열어보려 해도 깜깜한 화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평소 백업을 습관처럼 해놓으라는 가족의 조언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태만했던 것이 문제였다. 부랴부랴 수리점에 들고 가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바탕화면에 늘어 둔 글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문서도 80% 정도밖에 살리지 못했다.
아득해졌다.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수십 편의 글과 문장 중 기억나지 않는 게 더 많다. 잃어버린 것은 늘 과대평가하게 되는 법인가. 찾은 것보다 더 아까운 문장들을 잃어버린 것 같아 노트북 구석구석을 뒤지고 메모 노트를 펼쳐보아도 헛수고다. 잃어버린 작품 때문에 노벨문학상은 물 건너갔다고 애써 농담했지만, 우매함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베토벤에게 커피는 창작의 자양분이었다고 한다. "한잔의 커피를 만드는 원두는 나에게 60가지 영감을 준다"는 말을 남긴 것을 보면 과언이 아닌 듯하다. 그와 같은 농도의 커피를 같은 속도로 마시면 그의 천재성에 발뒤꿈치쯤 따라갈 수 있으려나.
음악에 문외한인지라 오래 들어도 클래식은 어렵다. 그러나 자꾸 듣다 보니 좋아진다. 특히 생활 속에서 듣는 베토벤은 정겨워 '엘리제를 위하여'는 대중음악처럼 익숙하다. 그것이 베토벤의 사랑 이야기인 줄도 모른 채 따라 흥얼거리기도 했다.
아침에 만나는 천재의 커피도 정겹고 감미롭기는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싱겁게 느껴지던 베토벤의 커피 농도가 이제는 입맛에 딱 맞다. 익숙해지면 좋아지는 법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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