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석 대구문화예술진흥원 박물관운영본부장
현재 대구근대역사관 기획전시실에서는 '대구에서 만나자-1910년대 광복을 꿈꾼 청년들' 특별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1910년대 대구를 중심으로 일제의 무단통치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비밀결사 조직 광복회(光復會)를 재조명하기 위해 전시를 기획했다. 이것은 대구시 공립 등록 박물관 3곳이 대구문화예술진흥원 박물관운영본부로 통합된 이후 새로 준비한 기획 전시다.
올해 우리는 꿈, 청년, 열린, 광복 등의 단어에 주목했다. 많은 사람이 가진 편견 가운데 하나가 "대구는 분지이기에, 분지에 갇혀 살아서 폐쇄적이고 보수적 기질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구 지역을 분지로 보는 견해는 정설이 아닐뿐더러, 환경결정론적 시각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대구 지역 지형을 잘 살펴보면 남과 북에는 산지가 발달돼 있지만 동서로는 트여 있는 개방적 평원 도시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잘못 알려져 대구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런 점은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대구에서는 오히려 '열린 도시' 대구가 만들어 낸 많은 역사 사실을 찾을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광복회 활동이다.
광복회는 대구경북에 본부가 있었고 조선 8도에 지부가 있었으며, 만주에까지 조직을 뒀다. 전국적 조직인 광복회 중심지가 대구였다는 사실은 대구가 결코 폐쇄적인 도시가 아니라, 열린 도시였음을 잘 알려 준다.
광복회 총사령으로 추대되는 고헌 박상진은 1912년 대구 본정 거리(현 경상감영길)의 대구경찰서(현 대구중부경찰서 자리) 앞에 상덕태상회를 열었다. 이것은 만주의 독립운동 지원 자금을 마련하고 독립운동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경찰서 앞에 상회를 설치한 것에서 박상진의 대담함을 엿볼 수 있다.
당시 국내에서는 더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의병 계열과 계몽운동 계열이 힘을 합치는 것이 역사적 과제였다. 이것이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 결성을 통해 이뤄졌다. 대구에서 보수와 진보가 열린 마음으로 연합했던 사실은 매우 주목된다.
광복회는 의병전쟁의 투쟁 방법과 계몽운동이 지향한 공화주의를 채택했다. 독립전쟁의 길과 중국의 신해혁명(1911)에서 나타난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결합한 것이었다. 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 단체로는 유일하게 전국적 조직을 갖추고 의협 투쟁을 전개했다. 광복회는 국내외 곳곳에 활동 거점을 만들고, 만주의 독립군 기지를 지원하고자 했으며 사람과 자금을 보내는 사업을 펼쳤다. 부사령 김좌진 장군을 만주로 파견했다.
이후 광복회는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친일 부호로부터 군자금을 강제 징수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런 일들로 말미암아 박상진을 비롯한 많은 광복회원들이 피체됐다. 그 후 재판을 받고 박상진, 김한종, 채기중 등 여러 분이 사형 순국했으며, 긴 시간 옥고를 치른 분들도 많았다.
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빈자리를 굳건히 메웠다. 그 투쟁은 우리 민족의 힘이 3·1운동과 의열투쟁으로 계승되는 기반을 만들었다. 우재룡, 권영만 등 붙잡히지 않은 분들의 활동은 계속됐다. 또한 후배들이 선배들의 광복을 향한 꿈을 이어 받아 선배들이 했던 방식을 계승해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전시실에서는 광복회의 활동을 비롯해 그 후배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아무 날, 아무 시에 대구에서 만나자'였다고 생각해 전시 제목을 그렇게 정했다. '대구에서 만나자'고 약속하며 광복의 꿈을 꾸었던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열린 도시 대구를 새롭게 만나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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