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신경영 30주년 (상)] 이건희의 '질(質) 삼성'…초격차의 시작

입력 2023-06-07 16:56:40 수정 2023-06-07 21:22:56

이건희, 독일서 삼성의 저품질에 충격…"마누라, 자식 빼놓고 다 바꿔보자"
대구서 시작한 삼성, 1993년 매출 28조원-〉 2022년 302조원…약 10배 커져
"저질 제품은 죄악" 이건희, 애니콜 화형식·라인스톱제도 도입
위기의 삼성, 글로벌 경제 위기 속 투자 확대…재계 "창조적 파괴 필요"

고(故)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선언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고(故)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선언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분명히 위기고 우리가 못난 것을 알아야 한다. 등허리에 식은땀이 난다. 이대로 가다간 망한다."

고(故)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은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에서 '후쿠다 보고서'를 읽고 측근에 이같이 말을 했다. 당시 후쿠다(福田) 전 삼성전자 정보통신 디자인 고문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일본에 비해 상품의 질, 기획력, 개발시간 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내용이 담겼다.

▶ 이건희, 독일서 삼성의 저품질에 충격…"마누라, 자식 빼놓고 다 바꿔보자"

당시 일본을 추격하던 이 회장은 독일에 도착해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직원들이 세탁기 덮개 여닫이가 규격에 맞지 않자 즉석에서 덮개를 칼로 깎고 조립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6월 7일 "마누라, 자식 빼놓고 다 바꿔보자"는 절박함 속에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을 했다. '초격차' 삼성의 시작이었다. 독일에서의 신경영 선언이 있던 해인 1993년 삼성전자의 연간 매출은 약 28조원, 자산은 41조원 정도 회사였다. 시가총액도 3조원 규모였다.

▶ 대구서 시작한 삼성, 1993년 연간 매출 28조원-〉 2022년 302조원…약 10배 커져

그러나 현재(2022년 기준) 연간 매출액 302조원, 자산 448조원으로 10배 넘게 불어났다. 시가총액은 431조원, 계열사를 합치면 612조원 규모다. 당시 '반도체 제왕'이라 불리던 인텔이 현재 약 164조원(시가총액)으로 삼성이 약 4배 정도 커진 상황이다. 세계 반도체 시장 전체로 봐도 대만 TSMC, 미국 엔비디아와 1~3위를 다투고 있다.

'초격차' 삼성을 위해 이 회장은 '질적 성장'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당시 이 전 회장은 "내 말은 양과 질의 비중을 5대 5나 3대7 정도로 가자는 것이 아니고 아예 0대10으로 가자는 것이다. 질을 위해서라면 양을 희생시켜도 좋다"고 말했다.

▶ "저질 제품은 죄악" 이건희, 애니콜 화형식·라인스톱제도 도입

1995년 삼성 구미사업장 운동장에서 애니콜 등 불량품 15만대를 전량 폐기하는 모습. 당시 불량제품에 불을 붙이면서
1995년 삼성 구미사업장 운동장에서 애니콜 등 불량품 15만대를 전량 폐기하는 모습. 당시 불량제품에 불을 붙이면서 '애니콜 화형식'이라고도 불렸다. 삼성전자 제공

신경영 선언 후 삼성의 품질개선 의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가 '불량 무선전화기 화형식'이다. 당시 떠오르던 무선전화기 브랜드 '애니콜'을 1995년 3월 당시 무선전화기 15만 대, 150여억 원 어치의 제품을 전량 수거해 폐기 처분했다. 이 전 회장은 "삼성이 수준 미달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라고 질타했다.

일선 현장에선 '라인스톱 제도'가 도입됐다. 생산 현장에서 불량이 발생할 즉시 가동을 중단하고 제조 과정의 문제점을 해결한 다음 재가동하는 제도다. 라인스톱 제도 후 전자제품의 경우 신경영 선언이 있었던 1993년보다 불량률이 최대 50%까지 줄었다. 한 품목이라도 세계 제일로 만들자는 신경영 철학이었다.

▶ 위기에 처한 이재용의 뉴 삼성, 글로벌 경제 위기 속 투자 확대 시도

현재 이재용의 '뉴 삼성'은 당시 '신경영선언' 상황과 비슷하다. 글로벌 경기 침체의 장벽을 다시금 넘어야 한다. 현재 삼성은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 미중 갈등 속 완성품 수요 급감으로 전례 없는 보릿고개를 넘고 있다. 삼성전자의 올 1분기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95.5% 급감한 6402억원이며, 주력인 반도체 부문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악인 4조 5800억원의 적자다.

삼성은 이러한 위기를 기회 삼아 투자를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기존 메모리 점유율은 공고히 하고 파운드리(위탁생산)에서 TSMC를 넘어 1위를 탈환하겠다는 각오다. 2042년까지 300조원을 투입해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할 계획이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은 당시 신경영 선언과 같은 글로벌 경기침체 상황에 있다"면서 "그때와 다른 점은 삼성이 혁신하기엔 너무 커진 기업이기에 기존 삼성 가치 사슬 간의 창조적 파괴가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삼성은 올해 별도로 신경영 선언 30주년 행사를 진행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