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두 귀를 막고 눈감아 주는 나무

입력 2023-03-22 11:16:35

이위발 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

이위발 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
이위발 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

의심은 오해와 불신을 만든다. 그래서 '사람을 의심하지 마라'고 한다. 의심이 시작되면 꼬리를 물고 늘어질 수도 있고, 그로 인해 타인과의 관계는 단절될 수 있다. 사랑한다는 말 보다 말하지 않아 더 빛나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그늘이 되어주는 나무/ 그런 나무의 믿음을 가져야겠다/ 하늘 아래 살면서 외롭고/ 고독할 때/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고 싶을 때/ 못 들은 척 두 귀를 막고 눈감아 주는 나무처럼/ 나도 내 몸에 그런 믿음을 가득 새겨야겠다." 임영석 시인의 '믿음'에 대한 시 일부다.

잠시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을 의심해 보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그 믿음이 어디서부터 생긴 것인지 생각하는 것도 좋다. 믿음이란 것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니다. 흘러가는 강물 같은 것이라고 인식해도 나쁠 게 없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진실과 거짓의 구분 자체를 포기하고 싶어 한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믿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믿음으로 진실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진실은 흔적 뒤로 숨어 버리게 될 것이다. 거짓은 진실의 탈을 쓴 채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잠재되어 있다. 이런 것들이 자신의 정체성 일부를 형성하면서 평생을 함께 살아가기도 한다.

속담에 '삼밭에 한 번 똥 싼 개는 늘 싼 줄 안다'는 말이 있다. 상추밭에 똥을 누다 들킨 개는 얼씬만 하여도 저 개 하며 쫓아낸다는 뜻이다. 한 번 잘못을 저질렀다가 사람들 눈에 띄면 늘 의심받게 된다는 말이다.

사실 의심이 무작정 나쁜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적당한 의심은 신뢰를 두텁게 하는 역할도 한다. 의심하는 사안에 대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역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적당하고 합리적인 의심에 해당할 때 가능하다. 무작정 의심만 하는 것은 정보 습득과 인간관계 형성에 엄청난 방해가 될 뿐이다.

자연스러움이란 세상을 공정하고 공평한 시선으로 본다는 것이다. 자연스러움에 거슬리는 생각이나 말과 행위는 나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반면에, 믿음이란 나와 내 주변을 통한 소통과 이해로 받아들여진다. 마음을 낮추어서 보면 자연에서 주어지는 사랑이 빛으로 보인다. 그것은 사람에 보이기도 하겠지만 느껴지는 것은 가지각색이다.

믿어야 할 것을 믿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땐 사회적인 활동이 불편할 수도 있다. 의심이 많을 땐 정신질환이나 피해망상의 성격장애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로 인해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엉망이 될 수 있다. 특히 부부관계에서 의처증이나 의부증으로 관계가 파탄으로 가기도 한다.

유언비어나 흑색선전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면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인권 침해를 일으키게 된다. 더불어 삶 자체를 구렁텅이로 빠트리게 만들 수도 있다. 결국 가해자나 피해자가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이런 의심을 동반한 거짓은 살아가면서 전혀 보탬이 안 된다. 절대적인 믿음 또한 다른 사람을 배척해 혼란에 빠트리는 경우도 생긴다. 의심과 믿음은 상반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지만 상호 보완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믿음은 믿음으로서 의심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윌리암 오슬로 경의 말을 흘려듣지 말아야 한다. "믿음이 없다면 사람은 아무것도 해낼 수가 없다. 그것이 있다면 모든 것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