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일 칼럼] 정치 개혁도 사람이 문제다

입력 2023-02-19 15:28:44 수정 2023-02-19 16:42:15

경희대 교수

노동일 경희대 교수
노동일 경희대 교수

한국 정치에도 한 때 민주주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전투구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인 작금의 정치상황을 보면 믿을 수 없지만 말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1988년 제13대 총선에 따른 여소야대 정국 상황이 만든 모습이었다. 1987년 대선에서 양 김의 분열로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었지만 그의 정치적 기반은 허약했다. 그 결과 총선에서 민정당은 125석, 김대중(DJ)의 평화민주당 70석, 김영삼(YS)의 통일민주당 59석, 김종필(JP)의 신민주공화당 35석 등 군웅할거 시대가 열렸다. 여소야대라는 현실과 전반적인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정치권의 작동 원리가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집권 여당이 독식하던 국회부의장과 상임위원장을 정당별 의석수대로 배분하는 관례가 생겼고, 대부분의 법안과 예산 등이 대화와 협상으로 처리되었다. 국회선진화법 이전, 야당의 극한 투쟁이 필요 없었던 유일한 때라고 한다. 각 정치세력들이 자신들만의 주장과 목소리를 내면서도 상호 대화와 타협을 통해 민감한 현안을 해결해 나가는 정치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집권층으로서 껄끄러울 수 밖에 없는 5공 청문회 등이 도입된 것도 그런 배경에서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짧게 막을 내렸지만 13대 국회 초반 펼쳐진 정국은 한국 정치에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른바 다당제의 긍정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에서 정치 혹은 선거 제도 개혁을 말할 때면 항상 '다당제'를 내세운다. 지난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소동이나 지금의 중대선거구제 도입 논의도 마찬가지다. 소선거구제 대신 중대선거구로 다당제가 실현되면 한국 정치의 빛나는 시절이 도래할까. 누구나 알듯 답은 "아니올시다"이다. 아마 정치인들조차 속으로는 믿지 않을 것이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사기극으로 정의당을 최대 피해자로 만든 주범들이 여전히 중대선거구제 논의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가. 국가보다 자신이 속한 정파의 유불리만을 생각하는 그들이 선거구 획정 보다 백배는 이해관계가 복잡한 중대선거구제 합의에 도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혹여 의견이 일치한다면 지난 번 같은 누더기 제도를 만들어 지금보다 더 저질 정치인들이 국회에 진입할 통로가 될 것이다.

우선은 제도를 바꾸어야 다당제가 될 것이고, 다당제가 되면 정치가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부터 근거 없는 환상이다. 앞서 본 4당 체제는 과거 제도하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 4당 체제의 가장 중요한 동력은 1노 3김 등 역량 있는 정치지도자와 그를 중심으로 한 의미 있는 정치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제도를 바꾸어 의미 있는 정치 세력이 생겨나는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정치 세력이 있어야 제대로 된 다당제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제17대 총선에서 10석을 얻어 기염을 토한 민주노동당에 이어 20대 국회 국민의당 돌풍은 기억이 생생하다. 지역구 25석, 비례대표 13석, 38석의 강력한 제3당이 국민의당이었다. 결과는 어떤가. 제대로 된 지도자와 정치인이 없는 돌풍은 한바탕 바람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 준다.

지금 여야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런 지도자, 그런 정치인은 찾을 수 없다. 경제위기가 몰려오는 상황에서도 대통령실과 여당은 내부 싸움질에, 야당은 대표 방탄에만 몰두하고 있다. 초거대 야당은 양곡관리법, 노란봉투법, 김건희 특검법 등을 일방적으로 밀어 붙이는 중이다. 실현되면 좋고, 아니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유도하여 여론을 돌릴 수 있으니 좋다는 생각이다. 나는 여러 번의 시리즈 칼럼을 통해 거대 담론 대신 국정운영의 디테일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정치 개혁도 마찬가지이다. 거대 중앙당을 없앤 후 원내로 들어가야 하고, 흥청망청 쓰는 국고보조금을 줄이고, 아침마다 국민 스트레스 지수를 높이는 당내 회의 중계를 없애는 등 디테일을 개선해야 한다. 돈을 노린 가짜뉴스를 양산하는 저질 정치인을 심판하는 것도 필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사람이다. 4당 체제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경험을 했다면 좋은 제도가 아니라 그걸 운용한 정치인들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