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기록여행] 여인네 발길 끊긴 서문시장

입력 2023-02-02 13:41:23 수정 2023-02-02 17:39:11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4월 9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4월 9일 자

'~주인에게 슬쩍 말을 건네 본다. "죽을 지경이죠"하자 그 주인은 댓자로 한바탕 근심을 털어놓는 판인데 나중에 알고 보면 기자가 이 집에 앉은 지 30분은 되었으리라만 그동안 한 사람의 손님도 없는 것으로 그 말이 전연 허튼 말이 아님을 짐작하였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4월 9일 자)

서문시장의 다른 이름은 큰장이었다. 대구를 대표하는 장으로 그렇게 불렀다. 인근의 김천장을 큰장으로 부른 데서 보듯 규모를 따져 붙인 이름이었다. 큰장이 서는 만큼 서문시장은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요지였다. 그러다 보니 군중 집회처럼 주목받는 일을 벌이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대구에서의 3‧1 만세운동이 1919년 3월 8일 큰장에서 시작됐음은 우연이 아니었다. 해방 후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 반탁운동을 펼친 곳 역시 서문시장이었다.

서문시장은 일찍이 대구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조선 시대 3대 시장에 꼽힐 정도로 큰 시장이었다. 서문시장은 일제 강점기에 자리를 옮겼다. 대구읍성의 서쪽에 위치해 서문시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품목과 물량이 다양하고 많다 보니 서문시장은 시장물가의 흐름을 알 수 있는 나침반이었다. 일제 강점기 쌀값도 서문시장의 거래가격이었다. 해방 후에 수시로 조사한 물가 시세 역시 서문시장이 기준이었다.

서문시장은 대구경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척도였다. 계절적으로는 한 해가 시작되는 봄에 소비가 살아나면 한해의 경기가 좋을 것으로 여겼다. 반대면 불황으로 인식했다. 일제 강점에서 벗어난 지 5년째 되는 해에 서문시장의 기사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서문시장은 이불과 그릇, 건어물, 해산물 등 다양한 상품이 거래되고 있었다. 게다가 섬유 관련 제품은 이미 서문시장의 대표상품이었다.

시장 입구로 들어서면 산처럼 쌓인 베와 무명의 포목이 방문객을 맞았다. 방안의 삼면 벽에 재어놓은 선반 위와 방바닥 반쯤은 색색 가지의 비단 옷감으로 채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겹겹이 쌓아놓은 옷감의 양을 지폐 부피로 비유했다. 당시 1천만 원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거금이었다. 1천만 원의 지폐로 옷감의 부피를 빗댔다. 옷감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는 비유였다.

으레 봄이 되면 시장은 활기를 띠었다. 겨우내 움츠렸던 사람들의 봄나들이와 연관이 있었다. 점포마다 나들이옷을 잔뜩 진열하기 일쑤였다. 봄옷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으면 상인들도 저절로 기운이 났다. 한 해의 경기가 나아질 것으로 짐작할 수 있어서다. 봄 상품 중에는 단연 여성들의 옷이 꼽혔다. 봄옷 판매가 높으면 화장품과 악세사리 등도 잘 팔렸다.

1950년에는 봄이 됐어도 여인네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상인들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봄에 여인네들이 시장을 찾지 않으면 한해 장사가 시원찮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지나간 가을보다 20~30% 가격을 내려도 소용이 없었다. 두 달여 뒤 터진 6‧25전쟁을 예감해서일까. 손님이 없어 죽을 맛이라는 가게주인의 말은 괜한 엄살이 아니었다.

당시 시장에는 국산보다 외제의 선호도가 높았다. 옷도 마찬가지였다. 진열된 여자들 봄 치마 중에는 일본의 밀수입품이 많았다. 가격은 한 마에 최고 1만 원이 넘었다. 천 원짜리처럼 싼 옷은 품질이 좋지 않았다. 양품점도 일본제품이 인기가 있었다. 일본제 넥타이는 하나에 1천 원에서 3천500원이었다. 국산 넥타이는 이보다 저렴한 500~2천500원이었지만 종류가 많지는 않았다. 미국제는 가장 비싼 4천500원이었다.

화장품도 옷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일본제 백분은 400~1천여 원이었다. 여성들 사이에 분의 대명사로 꼽혔던 코티분은 한 개에 9천 원이나 했다. 남자들이 멋을 내는데 필수복장이었던 신사 양복도 대부분 외국산이었다. 영국, 일본, 이태리 등에서 들어온 옷감이었다. 양복감은 일본제보다 영국제를 최고로 쳤다. 영국산 신사 봄양복 한 벌을 지으려면 13만 원쯤 들었다. 서울의 17~18만 원대에 비하면 그나마 싼 편이었다. 국산은 한 벌에 4~5만 원이었다. 옷감이 비싸다 보니 양복집은 중고양복을 수선해 입는 경우가 흔했다.

서문시장은 늘 천태만상의 물건이 즐비했다. 비교적 품질이 좋은 제품 중에는 국산이 드물었고 가격도 비쌌다. 저렴하면 품질이 뒤떨어져 소비자의 선택폭이 좁았다. 1950년 봄처럼 경기가 좋지 않으면 팔리지 않고 재고로 쌓이는 물건도 많았다. 게다가 상인들은 해가 갈수록 오르는 세금 걱정도 컸다. 장사는 안됐어도 이전보다 3배 이상 오른 5만 원의 영업세를 낸 가게가 수두룩했다.

상인들은 계절이 시작되는 봄철 상계의 분위기에 민감했다. 봄에 장사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로 한해의 장사를 가늠했다. 서문시장 상인들은 철이 되면 시장에 얼굴을 내미는 잘난 사람보다 철마다 옷 하나 사러 오는 보통 사람을 반겼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