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세계사] 서낭당 주술…몽골초원 어워, 티베트 다르초와 룽타

입력 2023-02-03 14:30:00 수정 2023-02-03 19:56:12

서낭당·몽골 초원 돌탑 옆 '오색 천' 풍습 유래는?

몽골 어워 주술행사 재현. 중국 내몽골 자치구 오르도스 박물관
몽골 어워 주술행사 재현. 중국 내몽골 자치구 오르도스 박물관

"...성황당에 돌을 던져서 제발 남편이 신발과 댕기 사오기를 축수하면서... 순이는 이 세상 모든 재앙과 영광은 성황님이 주시는 걸루 믿는다. 아! 성황님! 성황님! 순이는 다시 한 번 그렇게 부르짖으며 느티나무 아래로 달려왔다." 1937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정비석의 『성황당(城隍堂)』 끝 장면이다.

한국학 민족문화 대백과는 서낭당을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추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 형태로, 곁에는 신성시되는 나무 또는 장승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돌·나무·오색 천 등을 놓고 지나다녔다"고 소개한다. 정초에는 액운을 몰아내고 건강과 행운이 깃들기를 빈다. 계묘년(癸卯年), 토끼 해를 맞아 유라시아 몽골초원과 티벳, 한반도에 걸친 주술(呪術)문화의 상징, 서낭당(성황당)의 기원을 문화교류사 측면에서 살펴본다.

◆몽골초원 서낭당, 어워

소설 『성황당(城隍堂)』에 순이가 남편 현보와 숯을 구우며 성황님을 믿고 살던 곳은 평안북도 압록강변 산골이다. 고려 시대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龜州大捷)이 펼쳐진 귀성과 정비석의 고향 의주에 가깝다. 압록강을 넘어 북경에서 버스를 타고 6시간. 중국 내몽골 자치구 정란치(正蓝旗)로 가보자. 고려 고종의 아들 원종이 태자 시절 1259년 몽골 쿠빌라이 칸에게 찾아가 항복을 알렸던 도시 상도(上都, 자나두) 유적이 나온다.

고려의 숨결도 어린 상도 유적지 박물관 언덕에 돌탑이 높이 솟았다. 압록강 남쪽에서 순이가 빌던 것과 같은 형태의 돌탑이다. 상도에서 북으로 올라가 몽골의 현재 수도 울란바토르로 가보자. 차를 타고 시가지 북쪽 도심을 조금 벗어나면 고갯마루에서 돌탑과 만난다. 차에서 내려 살펴보니 잔돌을 쌓은 돌무더기다.

함께 간 몽골 택시기사는 작은 돌 몇 개를 주워 돌탑에 얹고, 시계 방향으로 3바퀴 돌았다. 손을 모아 무사안전 운행과 행운을 빌었다고 들려준다. 몽골 지역 여기저기 다녀 보면 가는 곳마다 작은 돌무더기 탑들을 마주한다. 몽골에서는 작은 돌을 쌓아 길흉화복을 비는 돌탑을 '어워(Owoo)'라고 부른다.

몽골 어워. 징기스칸이 세운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 유적지.
몽골 어워. 징기스칸이 세운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 유적지.

◆유라시아 돌탑, 오보

만주 서쪽 내몽골을 비롯해 몽골초원에서 동유럽 헝가리까지 끝없는 초원지대를 초원의 길(Steppe Road)이라 부른다. 실크로드(Silk Road)에 가려 덜 알려졌지만, 유럽과 아시아를 합친 유라시아 동서 문화교류의 통로다. B.C 2천년 이후 기마문화, 고인돌의 거석문화가 그 길을 통해 흑해 연안에서 몽골초원, 만주, 한반도로 들어왔다.

B.C5세기 이후 스키타이족의 황금문화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몽골초원의 훈(흉노)족과 돌궐(튀르키예)족, 징기스칸의 몽골은 말을 몰아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짓밟았다. 몽골인들이 '어워'라고 발음하는 돌탑을 공식 학술용어로는 오보(Ovoo, Obo)라고 칭한다.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돌을 쌓아 만든 돌탑은 물론 돌 제단을 아우른다.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단군이 쌓았다는 돌제단 참성단(塹城壇) 역시 유라시아 대륙 돌 제단 즉 오보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마니산 참성단에서는 고려 시대부터 국가 차원의 제를 올렸다. 돌탑이나 돌 제단에서는 주술 의식이나 제사가 치러졌다. 몽골초원에서는 어떤 의식이 펼쳐졌을까?

몽골 어워 오색천. 중국 내몽골 자치구 오르도스 박물관
몽골 어워 오색천. 중국 내몽골 자치구 오르도스 박물관

◆돌탑 옆에 5색 천 '하닥'

중국 내몽골 자치구의 역사 도시 오르도스로 발길을 돌려보자. 초대형 오르도스 박물관은 돌탑에서 펼쳐지던 풍습을 세밀하게 복원해 놓았다. 복원된 돌탑 주변에 오색 천으로 만든 기가 꽂혔다. 남색, 적색, 황색, 녹색, 백색 깃발이다. 남색은 쪽빛, 초원의 맑고 푸른 하늘을 가리킨다. 하늘에는 붉은 태양이 빛난다. 적색 천이다.

황색 천은 땅, 녹색 천은 초원을 상징한다. 백색은 무엇일까? 말젖이다. 기마 민족에게 말젖은 생명과도 같다. 초원 곳곳에서 마주하는 돌무더기 옆 나무 기둥에도 주로 남색의 푸른 천을 비롯해 녹색, 흰색, 황색, 적색의 5색 천을 매단다. 한민족 문화 대백과에 소개하는 서낭당의 돌무더기와 신목(神木)의 오색천은 몽골초원 어워와 닮은꼴, 판박이다.

오색천을 몽골인은 '하닥(Khadag)'이라고 부른다. 하닥이라는 오색기를 꽂고, 돌탑을 돌고, 99마리 말젖을 발효시켜 만든 마유주를 바치고, 절을 하면서 기원행사를 치른다. 몽골초원에서 서쪽으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알마티를 비롯해 각지에 천을 매달아 주술행위에 활용하는 사례를 목격했다. 몽골초원을 넘어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 돌탑 옆에 천을 매는 풍습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네팔 카트만두 보드나트 사원 룽타. 힌두교 국가 네팔에 있는 티벳불교 성지다.
네팔 카트만두 보드나트 사원 룽타. 힌두교 국가 네팔에 있는 티벳불교 성지다.

◆히말라야 산맥 주변 티베트와 네팔의 룽타, 다르초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가장 큰 불교 사원 보드나트(Bodhnath)로 가보자. '보드(Bodh)'는 '깨달음', '나트(Nath)'는 '사원'을 가리킨다. 깨달음의 절, 보드나트 사원은 온통 오색천으로 뒤덮였다. 우리네 초등학교 운동회 때 운동장을 가로지른 만국기와 비슷하다. 가로로 길게 내건 줄에 천을 매단 형태의 깃발을 '룽타(Lunh ta)'라고 부른다.

카투만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유원지, 원숭이 사원으로 가도 절 내부는 물론 산 아래에서 산꼭대기 절까지 룽타로 뒤덮였다. 네팔은 부처님이 태어난 나라지만, 지금은 힌두교 국가다. 인구의 87%가 힌두교도다. 보드나트 사원, 원숭이 사원은 티베트 불교의 성지다. 룽타는 네팔이 아닌 티베트 기원의 풍습이다. 나무를 세우고 천을 매단 '다르초(Darchorg)' 역시 티베트 주술풍습의 하나다.

네팔 카트만두의 티벳불교 원숭이 사원 룽타.
네팔 카트만두의 티벳불교 원숭이 사원 룽타.

해발 8천848m 에베레스트는 중국 지배하 티베트와 네팔 국경에 자리한다. '에베레스트' 이름은 19세기 측량 담당 영국인 조지 에베레스트(G. Everest)에서 따왔다. 에베레스트 본인은 자신의 이름 명명에 반대했지만, 영국 왕립지리학회가 1865년 그의 이름을 붙여 세계 최고봉으로 지정했다. 티베트에서는 '초모룽마(Chomo Lungma, 어머니 신)'라고 부른다.

중국어로 '쭈무랑마(珠穆朗瑪, 주목랑마)'다. 1953년 5월 29일, 뉴질랜드 출신 영국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네팔 인 셸파 텐징 노르게이가 네팔의 남쪽 사면에서 처음 오른(중국 티벳의 북쪽 사면 등정은 1960년) 에베레스트 정상에 다르초가 세워져 있다. 히말라야 산맥이나 티벳 각지 고산지대에서는 지금도 울긋불긋 천이 휘감긴 다르초를 세우거나 룽타를 늘여 달고 소원을 빈다.

몽골 어워. 중국 내몽골 자치구 정란치 상도(자나두) 유적지
몽골 어워. 중국 내몽골 자치구 정란치 상도(자나두) 유적지

◆티베트불교 풍습 몽골 제국으로 전파

고대 인도신앙에 선신(善神) 데바(Deva)와 악신(惡神) 아수라(Asura)가 싸운다. 이는 불교에서 부처님이 설법 내용을 천에 적어 악신을 물리치는 형식으로 진화한다. 천을 활용했던 부처님의 행위가 현실에서 불경을 적어 소원을 비는 풍습으로 정착된 것은 11세기 경이다. 7세기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치며 최강 국력을 형성했던 티베트왕 송챈캄포는 불교를 받아들여 티베트불교를 창시했고, 여기에서 천에 소원을 적는 풍습이 나왔다.

13세기 지구상 최강 제국을 일군 몽골이 티베트를 점령하고, 티베트불교를 받아들인다. 이때 티베트의 풍습을 배운다. 몽골초원의 돌탑에 천을 매단 나무 다르초가 더해지며 어워, 즉 몽골식 서낭당이 완성된다.

국립민속 박물관 서낭당
국립민속 박물관 서낭당

서낭당의 기원에 대해 우리 민족 고유 전통설, 6세기 중국 남북조 시대 선비족의 북제(北齊) 때 성(城) 수호신인 성황(城隍) 영향설이 있다. 몽골 유입설도 눈여겨볼 만하다. 1259년 이후 공민왕(재위 1352년-1374년) 재위 초까지 1백여년 고려는 몽골의 속국이었다.

원종의 아들 충렬왕부터 고려왕은 몽골 대칸의 사위였고, 고려 왕자들은 외가인 몽골 원나라의 대도(북경)에서 자랐다. 몽골식 변발에다 몽골어를 사용했다. 다양한 몽골 풍습과 함께 서낭당이 유입됐다는 것이다. 유라시아 문화교류와 다문화 측면에서 서낭당의 새로운 면모가 엿보인다.

역사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