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초대석] 이름의 소중함을 아는가?

입력 2022-11-21 11:39:08 수정 2022-11-21 15:57:06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전 주러시아 대사)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전 주러시아 대사)

최근 우리 정치인들의 행태, 특히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단 공개 여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공방을 지켜보며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다. 우리 어릴 적에는 귀가 따갑게 들었지만 이제는 생소하게 들린다.

우리는 이름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인가? 어찌 보면 이름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듯하다. 그래서 비명에 간 젊은이들을 사회가 함께 추모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름을 공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의 동의도 없이 공개된 명단에서 이름을 빼기 위해서는 요청하는 측이 가족임을 증명해야 한다며 애통해하는 유족들의 억장을 다시 무너뜨린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5·18 유공자로 특별 대우를 받는 사람들의 명단은 공개하기를 거부한다. 몇 해 전에는 역시 공금으로 지원을 받는 전교조 교사들의 명단을 공개한 죄로 국회의원이 수천만 원의 벌금을 문 일도 있었다.

이름에 대한 이러한 미묘한 집착과 이중적 태도야말로 우리 사회가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얼마나 깊이 병들어 있는가를 보여 주는 분명한 증거가 아닌가 한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 사람이 사회에 내보이는 모습 전부의 압축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언어의 경우 "제 이름은 ○○입니다"라는 말은 "저를 ○○이라고 부릅니다"로 대치되며 러시아인들의 긴 이름에서처럼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성과 함께 또는 성 대신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름만 보면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래서 이름을 명예롭게 관리하고 지키는 일은 인간답게 사는 데 필수 조건이며 매명, 곧 이름을 팔거나 더럽히는 것은 구걸이나 죽음보다도 더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내 이름을 깨끗하게, 최고 가치로 간직하는 것이 소중한 만큼 남의 이름도 존중해야 함은 물론이고 남의 이름을 마구 팔아서도 안 됨은 물론이다.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 가운데서도 자기 자식의 이름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한 분들이 있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퇴임 후 회고록 출판이나 강연 초청을 거부하기로 유명했다. 저들의 관심은 트루먼 개인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에 관한 고급 정보에 있으며 자기는 나라의 자산을 자기 것인 듯 팔아먹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우리나라에서 이름 팔기가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가는 상상 이상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온 천하가 지켜보는 앞에서 눈 한 번 깜박 안 하고 거짓말을 해 자기 정체성을 허문다. 그런 인물을 당 대표로 내세우며 그의 개인적 비리에 대한 조사를 야당에 대한 탄압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민주당도 이미 이름, 곧 정당으로서의 정체성과 정당성을 팔아 버렸다. 하지만 매명 매직은 그런 정치적 차원에서 그렇게 분명히 보이는 양식으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이름을 파는 일은 우리 모두의 일상생활에서 계속 일어나며 그것이 거듭되면서 거대한 사회적 불신과 정치적 파탄이 빚어지는 것이다.

어느 사회나 배운 사람들이나 높은 공직에 있는 사람들의 말에는 무게를 실어 주고 믿는 경향이 있고, 우리나라도 적어도 최근까지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을 악용하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 읽어 보지도 않은 법안에 자기 이름을 다는가 하면 언론인들은 편파 보도를 특전으로 여긴다. 교수가 자기 학생들이 쓰거나 번역해 놓은 책에 자기 이름을 단다. 고문이니 자문위원이니 하는 사람들이 그 단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자기 이름이 올라가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고 여행사들도 유명 신문사 이름을 팔아 고객을 유인한다. 이런 작은 거짓과 매명이 습관화되면서 거짓말 잘하기의 최고 달인이 세계 최고 명문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교수로부터 "김대중 대통령 이래 최고의 지도자"라는 찬사를 받는 나라가 된 것이다.

자기 이름은 물론 남의 이름, 그것도 유명을 달리한 젊은이들의 이름까지 함부로 팔거나,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각종의 특혜를 누리면서도 자기 이름에 대해 책임을 지지 못하거나 아예 이름을 밝히기조차 거부하는 행위가 달리 살길이 없어서 몸을 파는 이름 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행위보다 나을 것이 있는지 생각하고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이름을 잃거나 빼앗기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는 것임을 선진국 국민을 자처하는 우리 모두가 다시금 상기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