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 기억, 그 너머의 시

입력 2022-09-22 10:32:28 수정 2022-09-24 06:58:24

나를 낮춰 너를 보리라(김혜원/ 이미지북/ 2021)

잊고 살았던 사람과 자연 같은 시인 김혜원을 만났다. 그녀는 2009년 '시조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지만, '요가명상학과'와 동양학대학원에서 '다도학과'를 전공한 다인(茶人)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래서였을까. 첫 시조집 '나를 낮춰 너를 보리라'를 12년 만에 선보였다. "어릴 때 꿈이 시조집 한 권 남기는 것"이었다는 시인은 한 편의 시라도 감동을 줄 수 있는 마음의 시를 쓰고 싶다고 한다.

총 5부로 구성된 시조집은 제1부 '밀양통신', 제2부 '감꽃 목걸이', 제3부 '조팝꽃 사랑', 제4부 '우체통 풍경', 제5부 '요양원 가는 길' 등 73편의 시가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특히 표제작 '나를 낮춰 너를 보리'는 청순하고 깨끗한 생명의 숨결과 인고의 삶에서 채굴한 차로부터 겸손의 성찰을 배우게 해준다.

꽃 피는 봄날이면 연둣빛 너도 보여/ 햇살에 춤을 추듯 바람에 술렁이듯/ 이 돌산 찾는 발걸음/ 잎잎마다 축복이다// 손끝에 전해지는 보드라운 너의 감촉/ 무딘 손 여린 살을 신명 나게 보듬다가/ 뜨거운 무쇠솥에서/ 생잎 덖는 사랑놀이// 비비고 솎아내고 말리는 멍석 위에/ 상처나 진한 향기로 보답하는 너의 헌신/ 찻자리 아득한 향기/ 나를 낮춰 너를 보리// '나를 낮춰 너를 보리' 전문

깊은 맛을 내는 찻잎 하나를 얻기 위해 나를 낮추어 찻잎을 따듯 그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 시인, 그 아름다운 마음결이 잘 발효된 차처럼 그윽하다. 시에서 시인이 현재 밀양에서 운영하는 아담한 찻집 겸 식당이 보이기도 한다. 정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들꽃에게서도 시인의 정성스러운 사랑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깊은 맛을 내는 녹차 향을 통해 겸손함에 이르는 성찰", "사람의 손이 많이 갈수록 차 맛이 깊어지듯 사람의 정성과 혼을 담아내는 전통 제다법(製茶法)에 비유해 인간의 심법(心法)에 접근한다"는 오종문 시인의 평처럼, 이 시조집은 한 편의 시에 하나의 이야기를 담아 인간의 감정을 자연과 소통시키는 탁월한 재주를 보여준다.

우리가 잊고 살았던 사람과 자연, 사물들을 시로 승화시켜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이 시조집은 각박해진 사회에서 참을성이 없어지고 충동적일 수밖에 없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현대인에게 신선한 사유를 던져준다.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무수한 대화와 만남과 상황 속에서 창작되는 시조를 통해 성숙된 인간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질문도 함께 던진다.

김용주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