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안의 클래식 친해지기] <10> '베토벤 바라기' 슈베르트

입력 2022-03-21 10:21:18

유대안 대구시합창연합회장
유대안 대구시합창연합회장

오스트리아 빈의 중앙묘역에는 빈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음악가들의 묘지가 있다. 이들 묘역 중앙에는 모차르트의 가묘를 비롯해 왼쪽에 베토벤, 오른쪽에 슈베르트의 묘비가 눈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고대 그리스양식의 슈베르트 묘비는 승리의 여신이 슈베르트에게 월계관을 씌어주는 형상이 부조되어 있다. 슈베르트는 자신이 죽은 후 시신을 베토벤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그대로 이루어졌다.

생전에 슈베르트의 집은 베토벤의 집과 불과 2km정도밖에 되지 않은 거리에 있었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베토벤을 찾아뵙지 못했다. 베토벤이 죽기 일주일 전 병상에 누워있는 베토벤을 친구들과 함께 겨우 찾아갔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에게 자신이 쓴 악보를 수줍게 건넸다. 베토벤은 악보를 받아 찬찬히 읽어본 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자네를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자넨 분명히 세상을 빛낼 위대한 음악가가 될 테니 부디 용기를 잃지 말게…."

슈베르트는 이 말을 듣고 밖으로 뛰쳐나오면서 흐느꼈다. 그토록 존경하던 베토벤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음을 느낀 슈베르트는 슬픔을 이길 수 없었다. 두 거장의 만남은 이것이 첫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1828년, 슈베르트가 방문한 지 일주일 만에 베토벤이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슈베르트는 최초의 음악회를 베토벤 서거 1주년 기념음악회로 마련했다. 평소 형편이 여의치 않던 슈베르트는 이 음악회의 수입금으로 피아노를 구입했다. 하지만 처음 마련한 피아노를 제대로 쳐보지도 못하고 그해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죽기 바로 전에는 베토벤의 환각에 빠져 자신이 베토벤인 양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토록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추앙한 것을 넘어 베토벤 후기 음악의 낭만적인 양식을 흡수했다. 나아가 베토벤의 음악을 수용하고 그 음악을 자신의 음악으로 용해시키고 발전시켰다. 슈베르트의 음악에는 고전기의 전형과 복잡한 전개형식에서 벗어나 풍부한 서정성과 넘치는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베토벤을 존경하는 뜻으로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제14번 '월광' 제1악장의 오른손 아르페지오를 슈베르트는 가곡 '달에게'에서 반주로 사용하기도 했다.

슈베르트는 서른 한 살의 짧은 생애에서 총 1천여 곡 이상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600곡 넘는 가곡을 남겨 '가곡의 왕'이라 부른다. 단지 방대한 양의 가곡을 남겼기 때문에 그러한 칭호를 붙이는 것이 아니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이나 이전의 작곡가들의 가곡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가곡에서 가사의 내용과 운율이 일치하도록 선율과 리듬을 사용했고 보다 섬세하고 세련된 악상을 추구했다. 단순히 반주가 노래를 보조하던 데서 벗어나 반주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 노래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도록 했다. 이전에는 시가 잘 전달되기 위해 반주를 붙였다면 슈베르트는 시의 음악적 반주가 아닌 '시의 해석가'로 등장한다. 시와 노래, 반주가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예술가곡'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열일곱 살 때 작곡한 괴테 시의 '실 잣는 그레첸'과 이듬해 작곡한 '마왕'에서 시적 현상과 행간에 담겨진 분위기를 피아노 반주에서 표현하고 있다. 반주는 시가 지닌 표현과 분위기를 개별적 또는 전체적으로 암시하고 전주·간주·후주를 통해 슈베르트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시적이면서 상징적인 암시를 펼쳐 보인다.

그가 남긴 작품 중 연가곡 '겨울 나그네',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백조의 노래'는 불후의 명작이다. "성문 앞 샘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겨울 나그네'의 다섯 번째 곡 '보리수'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쉽지 않겠지만 원어인 독일어로 불리어진 가곡을 들으면 '예술가곡'의 참 맛을 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구시합창연합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