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박채아(경상북도 도의원) 씨 할머니 故 이덕상 씨

입력 2021-11-28 13:12:56 수정 2021-11-28 17:58:51

가을에는 우리 집에 오셔서 곡식을 다듬으며 농사 도와주셨습니다
6개월만 더 기다려 주셨다면 손녀 합격 모습 보실 수 있었을 텐데요

30여년 전 제주도에서 찍은 박채아 씨 할머니 이덕상 씨와 할아버지의 모습. 가족제공
30여년 전 제주도에서 찍은 박채아 씨 할머니 이덕상 씨와 할아버지의 모습. 가족제공

할머니! 늘 당신을 떠올리면 소녀처럼 수줍게 웃던 모습과 고목에 내리쬐는 햇살의 내음이 생각난다.

합천에서 같이 오랫동안 살아서 그런지 아니면 4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시끌벅적함이 좋아서인지 할머니는 7형제의 집 중에서도 우리 집에 머무시는 것을 제일 좋아하셨다. 1년에 반은 우리 집에 오셔서 농사짓는 것도 도와주시고, 가을내 곡식을 다듬으며 지내셨다. 어릴 적 할머니가 오시면 다른 아이들처럼 주시는 용돈이 좋아서, 엄마가 혼내지 않는 것이 좋아서, 할머니가 오시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햇빛에 말린 이불을 덮고 할머니 옆에 누우면 절로 노곤노곤 잠이 오는 그 모든 포근한 공기가 좋았다.

어느 아이들이 그렇듯 커가면서, 학교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할머니와의 관계는 조금씩 소원해졌다. 고시를 준비하면서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기를 몇 년, 할머니의 모습은 늘 마루에 앉아 땅콩을 손질하시던 모습으로만 기억이 된다. 가족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아침에 나가 늦게 들어오면 종일 혼자 TV를 친구삼아 외로이 집을 지키시던 할머니... 공부하는 핑계로 할머니와 다정히 놀러 다니지도,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지도 못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을 걷는 것 같은 수험생활, 늘 스트레스와 불안의 연속이었던 수험기간에는 할머니가 귀찮기만 했다. 생각해보면 참 나쁜 손녀였다.

늘 곁에 계실 것만 같았던, 기다려 주실 것만 같았던 할머니가 아프고 나신 다음에야 왜 시간을 내어 함께 하지 못했을까? 내 시간과 할머니의 시간이 다른 것을,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매주 아빠와 함께 할머니 병원 면회를 갔다 오면 죄송함에 도서관 책상 앞에 앉아서 숨죽여 눈물만 흘렸다. 또 공부하러 가냐는 할머니의 말에 아쉬움이 묻어났는데도 그럼 공부해야지 짜증만 냈었던…. 기억들이 몰려왔다. 참 나쁜 손녀였다.

1년 아니 6개월만 더 기다려 주셨다면 손녀들이 합격하는 모습을 보실 수도 있었을 텐데, 흔한 용돈 한번 드리지도 못하고 더 열심히 공부해서 빨리 합격할 걸 너무 후회가 되었다. 말괄량이 손녀가 자라서 돈도 벌고 사회에 큰 일꾼이 되어 텔레비전에 나오는 걸 보면 할머니가 좋아하셨을까? 물음에는 답할 사람은 없는데 그래도 괜스레 되뇌며 물어보고 싶다.

'중국집에서 짜장면 말고 처음 볶음밥 시켜드리니 이런 건 처음 먹었다며 맛있다며 웃으시던 할머니. 예쁜 모양의 싸구려 구두를 사드려도 아까워서 몇 번 신지도 않고 친구들에게 손녀가 사줬다고 자랑하시던 할머니. 손톱에 분홍색 매니큐어를 발라 드리면 묘하다 하시며 아이처럼 좋아하시던 할머니, 나에게는 당연한 그런 소소한 것들이 할머니에게는 행복이었나 보다. 아니면 손녀들과 함께인 그 순간들이 좋았던 것이었을까.

'하루는 공부하기 싫다는 핑계 삼아 할머니랑 맛있는 거 먹고 예쁜 옷 사러 갈걸... 또 하루는 날씨 핑계 삼아 할머니랑 마루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할걸...' 지나고 보니 단 하루도 온전히 시간 내 할머니랑 있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할머니~! 이제는 할머니한테 좋은 구두도, 볶음밥보다 더 맛있는 밥도 사드릴 수 있는데 너무 보고 싶습니다.

할머니가 주신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란 제가 이제야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진정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밥 굶는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대청마루에 밥상을 차리던 할머니를 닮아, 늘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주신 사랑을 타인에게 나눠줄 수 있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겠습니다.

할머니 사랑해요. 사실 늘 사랑하고 있었는데 몰라서 이야기 못했나 봐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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