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드문, 신선한, 재미있는, 혹은 유익한 체험에서 감동을 발견하면 글로 옮겨야겠다는 충동이 생긴다. 이러한 감동은 어디까지나 글감 그 자체이지 수필이 될 수는 없다.
"무료하면 오동나무를 쳐다보게 되고, 그럴 때마다 찌든 내 집에 와 뿌리를 내린 오동나무가 그저 고맙기만 하다." (윤모촌, '오음실 주인(梧陰室 主人)'의 결미)
좋은 집 뜰 다 제쳐두고 자신의 좁은 집 수돗가에 날아와 자생한 오동나무가 고맙기만 하다는 작가의 맺음말은 결국 손톱 치장 한번 한 일 없이 푸른 세월을 다 보낸 아내를 향한 고마움이 아닐까.
글의 표층에는 관찰을 통한 대상 자체의 드러난 모습과 속성을 표현하고 있어도, 글의 심층에는 통찰에서 얻은 인생의 의미를 문학적으로 함축한다.
"제 살고자 남 해치는 일이 바로 '저 잡이'라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그대의 주인이 쇠하는 날, 그대가 지금 누리고 있는 안식도, 공급되는 자양분도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게. 그대와 그대의 착한 주인은 서로 쓰러뜨려야 할 적이 아니네. 그래서, 그래서 말일세. 그대의 주인이 태만하거나 교만에 빠질 때 따끔하게 일깨워주는 진정한 동반자는 될 수 없겠는가. 그대를 품어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녀네. 부탁컨대 그대의 주인과 오래오래 친구 하시게." (졸작 '불청객' 중에서)
생명체들이 삶을 유지해가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더불어'의 원리이다. 암은 자신의 숙주를 무너뜨림으로써 궁극에는 자신도 파멸의 길을 간다. 지나친 욕심으로 자신의 먹이사슬을 파괴해 마침내 지구상에서 사라진 공룡이 있다. 암세포를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다.
모든 개체는 유일자로서 독특한 존재방식을 취한다. 메를로 퐁티는 이 무수한 개체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사물은 모든 다른 사물들의 거울'로서 서로에게 자신을 넘겨주고 받는다고 했다. 이들 각각의 개체가 상호 관련해 만들어내는 현상들은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이루며, 그 대부분은 연결과 해석을 기다리는 카오스다. 글을 쓴다는 것은 개별적 카오스들의 합종연횡에서 로고스, 삶의 이치를 읽어내는 일이다.
부모형제를 떠나 생판 남이었던 시집에서 인생 2막을 펼쳐야 하는 여자의 숙명은 짠하지만, 보리와 벼의 속성을 생각해보면 이내 수긍이 간다. 익어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보리가 수염을 가진 남성성이라면 부드러운 벼는 여성성이다. 제자리에서 열매를 맺는 보리와는 반대로 벼는 옮겨 심어야 한다.
이처럼 독자의 머리 속에 든 이미지를 끌어낸다. 개체와 개체, 개체와 전체가 상호 소통하면서 현상과 본질이 취하는 합일의 구조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보편적 질서이자, 우리 삶의 원리이다.
수필이 허구를 인정하지 않는 체험의 문학, 자기 고백이면서도 창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비유나 상징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문학적 텍스트로 담아내기 때문이다.
장호병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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