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황금빛 가을 들녁

입력 2021-09-28 10:24:50

칠곡 동명 정암사 주지 대현 스님

대현 스님
대현 스님

엊그제 여름이라 더워서 허덕였던 것 같은데 벌써 계절이 지나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것 같다. 하늘은 높이 올라 푸른빛이 더욱더 강해지고, 시원하던 바람은 조금은 서늘한 기운이 돌기도하며, 길가에 코스모스는 어김없이 한들거리며 반긴다. 산의 모습도 조금씩 물들어가고 있으며, 가을 들녘에는 황금빛이 매일 달라지는 모습에 세월을 느낀다.

벼는 알이 차고 익어가니 고개를 숙이면서 마냥 겸손해하고 있다. 벼 씨앗 하나에서 싹을 티워 줄기가 생기고, 줄기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며 열매가 열린다.

그 열매는 주렁주렁 열려있지만, 씨앗으로 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씨앗으로 있을 때도, 그 속에 씨앗이 있고, 싹이 날 때도 씨앗이 있고, 줄기가 날 때도 씨앗이 들어 있으며, 꽃이 필 때도 씨앗이 그 속에 있으며, 열매를 맺을 때도 씨앗을 버린 적이 한 번도 없다. 땅속에 심었던 씨앗과 마지막 맺어진 열매는 조금도 다르지 않는 과정 속에서 벼는 남을 위해서 많은 열매를 베풀고 다음해를 기약한다.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 되었다.

하나의 벼 씨앗 속에 전체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고, 전체 속에 하나의 씨앗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의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고조할아버지가 증조할아버지를, 증조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아버지는 나를 낳아서 기르면서 그 속에 흐르는 피는 같은 씨앗이다. 그것을 우리는 뿌리라고 할 것이다. 전체를 본다면 김해김씨, 밀양박씨 등의 자손이요, 하나로 본다면 나라는 개체로 설명 할 수 있다. 그래서 전체와 개인은 남이 아니다.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라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화엄경에 '一卽一切 多卽一'( 일즉일체 다즉일)이라고 한다. 이러한 근본을 안다면 일가친척, 조상들을 무시하고 살 수 있을까.

집안마다 벌초를 하고 추석을 지내면서 제사, 성묘하는 것도 이젠 어른들의 몫이 된 것 같다. 젊은이들은 명절이 되어 친척을 찾아뵙고 인사하던 문화가 이젠 당연히 여행으로 대처하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거기에다 코로나 이유로 부모들은 마음으로는 보고 싶으면서도, 자식 걱정에 오지 말라고 하니, 근본이 흔들릴까 걱정이 된다. 이젠 사촌, 육촌을 만나기도 어렵다. 가족의 초상이나 결혼식이 아니면 서로 얼굴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바쁜 세월을 살다보니 관심조차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문화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부모님세대는 고령화로 노동력의 상실로 이어지고, 자식들은 맞벌이부부의 육아문제 등으로 여유를 가질 시간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명절이 되면 그나마 시간을 내어 하고 싶었던 여행과 친구들의 만남을 가지고 싶은데, 일가친척을 만날 시간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나마 조상제사라는 명목 아래 양가 부모님들과 친척들을 만났는데, 이젠 제사도 점점 약식으로 변해가고 있다.

젊은이들이 사회 각박한 생활을 염두에 두고, 나이든 어른들을 홀대하는 것은 아닌지 부모들도 자식들의 생각에 응해 주기는 하지만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것은 감출 수가 없다.

들녘에 있는 벼도 자기의 씨앗을 잊지 않고 주렁주렁 똑같은 모양의 열매를 맺어 그 씨앗의 자랑을 뽐낸다. 벼가 익지 않았을 때의 꼿꼿한 고개도 씨가 영글어가면 갈수록 고개를 숙이는 겸손의 마음도 가지면서, 끝내 모든 이에게 베품으로 일생을 끝내듯이 우리 인간들도 근본을 저버리지 말고, 나의 뿌리를 찾아야 한다.

잘났다고, 부자라고 고개를 드는 것보다는 고개를 숙이는 겸손의 마음이야말로 상대를 배려하게 한다. 조상님께 배워왔던 인성을 여러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돼 사회의 양식이 된다면 어두웠던 길은 빛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