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한민영 씨 외조부 故 박봉천 씨

입력 2021-09-16 14:30:00 수정 2021-09-16 15:55:47

한민영 씨 외조부 故 박봉천 씨 생전모습. 가족제공.
한민영 씨 외조부 故 박봉천 씨 생전모습. 가족제공.

할아버지께

항상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지 불평만하며 지내다 보니 벌써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요. 저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서 맥주도 한두 병쯤 먹을 줄 알구요. 오로지 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많이 예뻐졌답니다. 아, 넷째 이모가 애를 낳았어요. 막내 이모도요. 이제 이모들도 어디 나가서 아줌마라고 불려도 어색함 없는 꽉 찬 나이가 되어서 다들 육아가 벅찬 것 같아요. 이제 다음 갓난아기는 제가 결혼해야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집 유전자는 어떻게 된 건지 성비가 안 맞아. 둘 다 딸이에요.

삼촌이 할아버지 제사상에 올리겠다고 굳이 직접 잡아 온 생선을 보면서, 그리고 그걸 늘 그랬듯 투박하게 구워낸 할머니를 보면서 갑자기 많은 기억이 떠올랐어요. 예전에 할아버지 병원 따라갔다가 헬륨 풍선을 얻은 일, 그리고 그걸 집 앞에서 하늘 위로 놓친 일, 할아버지가 그물을 추릴 때 담벼락에 물총으로 낙서한 일, 가을밤에 마당에서 연탄불에 전어 구워 먹던 일, 9시 뉴스 소리에 할아버지가 깰까봐 만화보고 싶어서 소리 줄인 일, 할아버지 눈썹 옆 사마귀가 신기했던 일, 할아버지가 기어가는 파리를 두 손가락으로 잡은 일, 덩치는 산만해서 바퀴벌레 하나 못잡냐고 구박받은 일, 붓펜으로 한자 배우고 집에 돌아와 연습한 일.

할아버지 당뇨 나으라고 엄청 큰 봉지 사탕 선물한 일, 할아버지가 새벽 내내 뜬 눈으로 허공에 총을 쏜 일, 사진을 찍어야겠다며 모자까지 갖춰 쓰고 포즈잡은 일, 체중계에 오르겠다며 단단히 붙잡으라고 한 일, 할아버지가 화장실에서 중심을 잃어서 세면대 밑에서 눈이 마주친 일, 병실에서 가쁜 숨을 쉬는 할아버지를 보며 늘 그렇듯 곧 집으로 돌아오실 거라고 생각했던 일.

그날은 알람을 맞추지 않았는데도 이유 없이 눈을 뜨자마자 천장이 보였어요. 그리고 3분도 되지 않아 걸려온 전화 너머로 엄마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낯선 공간, 낯선 옷차림, 낯선 사람들이 미웠던 기억이 떠올라요. 화가 났던 것 같아요. 왜 할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에 술판을 벌이고 밤새도록 고스톱을 치는지에 대해서요. 장례식에서는 당연히 울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술에 잔뜩 취한 아저씨들의 뒤통수를 열심히 째려보는 것뿐이었거든요. 그래도 이제는 그 나름대로 어른들의 이별 방식이었다는 것을 조금 알 것 같아요. 그래서 더더욱 할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게 가장 아쉬워요.

어릴 적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할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채로 목기를 닦는 조카 등 아이들을 보면서 할아버지와 함께 나눈 추억이 있음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어요. 할아버지 가요무대 볼 때 한번 시원하게 노래나 불러볼 걸 하는 의미 없고 하찮은 후회가 남는 새벽이고, 항상 묵묵히 따뜻하게 거실을 지키던 할아버지가 꽤 그리운 밤입니다. 엄마도, 삼촌도, 이모들도 일상에 치여서 이제는 무뎌졌다고들 해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미안해하는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이해해주세요. 아직 여기는 먹고 살기에 급급한 세상인가 봐요. 오늘 제사 끝나고 남은 밤 제가 다 까먹은 것도 이해해주세요. 제가 그거 제일 좋아하는 거 아시잖아요. 할아버지, 나중에 진짜 다시 만나게 되면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말씀드릴게요. 꽤 재밌을 거예요. 그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추신)할아버지, 다음주가 민족 최대명절인 즐거운 한가위입니다. 코로나로 많은 가족이 모일수 있는 형편이 안되지만 마음만은 할아버지를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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