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클라라가 사랑한 슈만
피아니스트 클라라는(1819~96)은 그 방식은 달랐지만 두 번의 뜨거운 사랑을 했다. 첫 번째는 슈만, 두 번째는 브람스였다. 낭만주의 시대를 풍미한 세 음악가의 얽히고설킨 사랑은 '세기의 사랑'으로 덧씌워져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은 한 편의 드라마이다. 클라라는 유명한 피아노 교사였던 비크의 딸로 태어났다. 클라라는 9세 때인 1828년 라이프치히의 게반트 하우스에서 공식 연주회를 가질 정도로 피아노에 대한 재능이 탁월했다. 비크는 딸을 유럽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키우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비크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비크의 제자 중에는 슈만이 있었다. 법을 공부하다 피아니스트로 방향을 튼 슈만은 약지의 움직임이 만족스럽지 못해 끈에 손가락을 매달아 피아노를 치는 특이한 방법을 고안할 정도로 연습에 매달리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슈만은 과도한 연습으로 손가락을 다쳐 연주자로서 꿈을 접었다.
비크 집에서 살았던 슈만은 클라라에 마음을 빼앗겼다. 두 사람은 평생을 함께할 약속을 한다. 그러나 비크는 미래가 불투명한 작곡가 슈만에게 자신의 딸과의 만남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피아니스트의 생명이랄 수 있는 손이 성치 않은데다 장래도 불투명한 슈만에게 딸을 절대로 줄 수 없다며 완강하게 반대했다. 당시 클라라의 나이는 18세, 슈만은 그보다 9살 많은 27세였다.
슈만과 클라라는 법에 호소하기로 하고 비크를 상대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슈만과 클라라의 손을 들어줬고, 두 사람은 1840년 결혼했다.
이후 슈만은 행복한 결혼생활에 영감을 받아서인지 100여 곡의 가곡을 작곡하는 등 왕성한 창작열을 과시했다. 비크는 3년이 흐른 후 딸과 사위에게 용서의 편지를 썼고, 슈만은 그 용서를 받아들였다.
안정을 찾은 슈만은 1843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는가 하면 1850년 뒤셀도르프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는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때부터 정신착란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망상과 환청에 시달리며 심령술에 의지한 슈만은 결국 1853년 뒤셀도르프 관현악단 지휘자 자리를 내놨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리고 1854년 2월 , 슈만은 가족들 모르게 집을 나와 라인강 다리 위에서 몸을 던졌다. 요행히 뱃사람의 도움으로 구조되었지만 정신병원에서 요양하다 1856년,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슈만 사후 클라라는 피아노 연주를 하며 6명의 아이를 키우며 살았는데, 그의 옆에는 항상 브람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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