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남아 있다

입력 2021-08-16 14:40:50

박주연
박주연 '여행자의 책' 공동대표

잔여 백신 알림 신청을 해놓고는 두어 번 놓쳐버렸다. 처음엔 무거운 책 상자를 옮기던 중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한번은 마침 스마트폰을 보던 중이었는데도 망설여졌다. 몸살이 오면 어쩌지, 겁을 내다 예약 버튼을 누르자 그새 한발 늦고 말았다.

그 후 알림이 오지 않길래 알아보려고 포털사이트에 들어갔더니 'ㅈ'만 입력했는데도 곧바로 잔여 백신이라는 추천 검색어가 나온다. 신기해서 'ㅂ'을 누르니 백신 예약, 'ㅁ'을 누르니 모더나가 자동완성된다. 전 국민이 백신을 맞았거나 맞을 예정이거나 백신을 맞은 가족과 지내고 있나 보다. 이제 생년월일에 따른 10부제 예약이 진행 중이니 내 차례도 오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남아 있다. 감기로 콜록대도 주사 맞는 게 싫어서 병원에 가지 않는 나는 사실 '엄살 바이러스 보균자'다. 며칠 전 동네 이비인후과에서는 의사 선생님이 자리에 앉았을 뿐인데 벌써 '아아!' 소리부터 지르다 혼나고 말았다. 선생님은 내가 병원 개원 후 두 번째로 심한 진상 환자라고 말씀하셨다. 겁에 질려 있던 나는 문득 기운을 차리며 "첫 번째 진상은 어땠어요?" 하고 물었다.

돌연 멀쩡해져서 질문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두려움보다 궁금함이 앞서는 이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 병원에서 첫 번째로 꼽히는 진상 환자께서는 의사 선생님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려 안정될 때까지 다 같이 기다렸다고 한다.

진료를 마친 후 병원에서는 혹시 잔여 백신이 생기면 연락받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보셨고, 흔쾌히 동의했다. 나를 위해 백신을 남겨두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남으면 연락해주겠다는 동네 병원이 문득 친근하게 느껴졌다. 어쩌다 들른 먼 친척 집에서 때마침 남은 밥 한 공기를 배불리 얻어먹는 것처럼 때로 정감은 그렇게 의외의 곳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나도, 남도 안전하기 위해 이번에는 감사히 주사 두 대를 맞아야 할 테지만, 나는 고통도 기쁨도 겁내는 증상을 앓고 있다. 분석해보건대 받아들이는 느낌은 남보다 강렬한데 그 느낌을 저장할 공간은 남보다 부족하게 타고난 듯하다. 너무 좋은 상태도 되도록 뒤로 남겨두기 때문에 챙겨보던 드라마도 마지막 회는 안 보는 습관이 있고, 책도 마지막 장은 덮었다가 뒷날 보곤 한다.

심지어 마음산책에서 나온 '보르헤스의 말' 같은 경우는 매번 더 읽기를 미룰 정도다. 한 페이지에도 깊은 구절이 툭, 툭 속출해서 한번에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을 하루 만에 다 살아버릴 수 없듯이 어떤 책은 그렇게 생애를 지속하는 동안 데리고 살아야 한다.

나는 어쩌다 어른이 되도록 이 엄살쟁이 어린이까지 데리고 살게 되었으니, 내면아이와 헤어지는 일을 뒤로 미루다가 지금껏 남겨둔 셈이다. 그러고 보면 '생존'이라는 말에 이미 '살아있다'는 뜻과 '살아남았다'는 의미가 함께 있으므로 우리는 모두 남아 있는 존재들이다. 이만하면 용기 있게 백신 주사를 맞을 수 있을 만도 하지만, 그건 또 엄살쟁이 어린이에게 달렸다는 변수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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