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일 경희대 교수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 헌법재판소의 가장 큰 업적이 '자기결정권'의 발견과 확대라고 생각한다. 소비자의 자기결정권, 성적 자기결정권, 학부모의 자기결정권, 연명 치료에 관한 자기결정권,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등에 이어 임신 중단 여부를 결정할 권리도 여성의 자기결정권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한 바 있다.
헌재 결정에 대한 찬반은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결론의 바탕을 이루는 인간관, 세계관이 소중하다는 인식에는 대체로 동의할 것으로 본다. 우리 헌법 질서가 예정하는 인간상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사회관을 바탕으로 사회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생활을 자신의 책임 아래 스스로 결정하고 형성하는 성숙한 민주시민"이라는 선언이다.
한반도 역사 가운데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서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개인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상의 발견이다. 국가의 역할은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국민 개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헌재는 이러한 인간관을 바탕으로 국가권력이 개인의 삶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범위를 축소하고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조금씩 넓혀 왔다. 인간과 사회의 진화나 역사 발전 방향이 바로 그게 아니겠는가.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국민의 삶을 국민이 책임져야지 왜 정부가 책임지느냐?"는 발언을 했을 때 나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국가가 (모든) 국민의 삶을 책임질 수는 없다, 국가가 국민의 (모든) 삶을 책임질 수는 없다"라는 뜻으로. 정부의 고유 임무가 국방, 치안, 사회간접자본 구축, 공정한 경쟁을 위한 기준 마련 등인 것은 변함이 없다.
최근에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강자의 횡포를 억제하기 위한 개입과 규제도 용인되고 있다. 사회적 취약 계층 국민에 대한 두터운 보살핌은 이념을 떠나 당연한 국가의 역할이다.
최 전 원장의 문제 제기는 복지 혜택이 필요한 계층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인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국민의 삶도 모든 영역에서 개입하고 간섭하는 국가의 무분별함을 비판한 것이다. 보수주의자라면, 이른바 진보 정권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해야 할 질문이다.
대척점에 서 있는 여당의 비판은 그래서 당연하다. 놀라운 것은 이른바 보수층 인사들의 반응이다. 다수가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대선 출마를 선언한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그러려면 왜 대통령에 출마했나"라며 비판에 앞장서고 있다.
역시 대선에 출마한 윤희숙 의원만이 "이번 대선의 가장 의미 있는 화두 중 하나"라고 말했다. 윤 의원은 "'국가의 책임'은 '간섭과 통제'와 불가분 관계인지라 무턱대고 확대하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며 "그렇기 때문에 국가 역할에 대한 의미 있는 논쟁은 '국가가 책임지냐 아니냐'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나 역시 이번 대선, 특히 보수 진영 출마자들이 던진 화두 중 가장 의미 있다는 윤 의원의 인식에 동의한다.
최 전 원장 개인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보수 정당과 보수 대선 후보의 정체성을 묻고 싶은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사회관을 바탕으로 사회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생활을 자신의 책임 아래 스스로 결정하고 형성하는 성숙한 민주시민임을 믿는지 질문하는 것이다.
아니면 유아적인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개인 삶의 모든 영역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더 중요한 사실은 '국민의 모든 삶을 책임지는 정부'라는 말의 위험성을 국민이 깨닫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이 확대되어 온 역사 발전 방향과 거꾸로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권력이 국민의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달콤한 말은 무식하기도 하지만, 속뜻은 '내 밑으로 들어와 입 닥치고 있으면 필요한 걸 줄게'에 다름 아니다" "통제받는 것을 망각시키기 위해 '돈 뿌리기'가 수반된다" 역시 윤 의원의 말이다.
숱하게 많은 사례 가운데 한 가지 예만 들자. 국민과 시장을 무시하고 규제 일변도 부동산 정책, 임대차 3법 등을 밀어붙인 결과를 보면서도 모든 삶을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말의 위험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국민은 영원히 정부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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