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 아는 만큼 보인다

입력 2021-08-12 16:26:52 수정 2021-08-13 06:33:31

근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일제 강점기 희귀 자료들. 대구 대륜고가 소장하다 독립기념관에 위탁 기증한 것들이다. 대륜고 제공
근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일제 강점기 희귀 자료들. 대구 대륜고가 소장하다 독립기념관에 위탁 기증한 것들이다. 대륜고 제공

독립기념관은 제76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10일 대구 대륜고로부터 기증받은 희귀 일제강점기 역사 자료 30여점을 공개했다. 사진은 교남학원 제1회 졸업식 기념사진 등 학교 관련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연합뉴스
독립기념관은 제76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10일 대구 대륜고로부터 기증받은 희귀 일제강점기 역사 자료 30여점을 공개했다. 사진은 교남학원 제1회 졸업식 기념사진 등 학교 관련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연합뉴스

채정민 기자
채정민 기자

"솔직히 말해야지. 일본 덕분에 우리가 잘살게 된 건 사실 아니야? 우리가 쓰는 철도만 해도 일제 치하 일본 아이들이 깔아준 거잖아. 걔들이 통치하면서 우리가 근대화된 것도 사실이지. 한일 청구권 협정(1965년) 때 받은 돈으로 경제 발전 이뤘고. 이런데도 일본을 무조건 배척하는 게 맞아?"

난데없다. 며칠 전 버스를 탔다가 들은 얘기다. 60대 아저씨 승객이 버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듣다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내뱉은 말이다. 그러면서 동의를 구하려는 건지, 같이 얘기를 하자는 건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입을 계속 놀렸다. 비슷한 연령대의 승객 한 명이 맞장구를 치자 말이 점점 더 길어졌다. 흥(?)이 나는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듣기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가끔 이런 경우를 마주한다.(왜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그러는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그럴 때 '조용히 가자' '목소리를 좀 낮추자'고 하면 시비로 번지는 일이 적잖다. 애초 대중교통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나 배려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이런 경우 화를 삭이고 잠시 눈을 감는 게 답이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저씨는 결국엔 정부를 비난하는 데로 화살을 돌렸다. '기-승-전-정부 욕'이다. "이건 물에 빠진 놈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거와 뭐가 달라? 반일 감정을 정부가 조장해 정권을 연장하려는 거잖아. 일본보다 지금 정부 놈들이 더 나빠." 이성적, 논리적인 척하지만 허술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정부를 '까려고' 뒤틀린 역사 인식마저 정당화하는 꼴이다.

한술 더 보탠다. 자신의 말에 무게를 실으려면 '배운 사람'이란 티도 내야 했을 터. "내가 인맥도 넓힐 겸 경영특수대학원 한 곳을 다녀 보니 다들 내 생각과 비슷해. 일본을 대하는 정부 태도가 문제래. 아직 어린 녀석들은 뭘 잘 몰라. 지들이 크면서 배고파 봤냐고. 그저 감정에만 휘둘려 '일본산 불매운동'이니 뭐니 떠들어대잖아."

'대학원 물'까지 좀 먹었다는 아저씨가 뱉은 말은 결국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 식민 지배한 게 결과적으로 조선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논리다. 수탈을 위해 조선이란 지역을 개발한 것과 조선인의,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개발과는 다르다는 걸 외면하는 주장이다. 이건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국내에도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자신들은 용기 있는 행동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이 논거로 드는 통계(농업 생산력 향상, GDP 증가, 인구 증가 등)가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의문인 데다 광복 직전 몇 해 이야기는 다루지 않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답답한 얘기만 들렸던 건 아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기분 좋은 소식을 하나 접했다. 대구 대륜고등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맞아 소장 중인 희귀 자료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이 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이상화 시인과 그의 친형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상정 장군의 이력서, 저항시인 이육사 형제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인 조재만 선생 관련 자료 등이 포함됐다고 한다.

인재를 키우는 학교가 그런 일에 앞장섰다니 반갑다. 마침 며칠 뒤가 광복절이어서 더욱 뜻깊다. 천박한 역사 인식을 가진 이들이 있지만 학교는 '살아 있어' 다행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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