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여름의 맛

입력 2021-08-09 11:35:38

박주연
박주연 '여행자의 책' 공동대표

정말 덥다. 아침에 서점 문을 열면 오디오보다 에어컨을 먼저 켜줘야만 책들이 생기를 띤다. 뒷마당에도 물을 뿌려보지만, 의자 몇 개 내놓는 사이 물기는 2배속으로 증발해버린다. 나뭇잎이 흔들리기에 좀 시원해졌나 싶어 나가보면 실외기 앞에 선 듯한 후끈함에 오래 있기도 힘들다.

이런 날씨에 밥이 맛있기는 어렵다. 어떻게든 한 끼 때워야 한다. 하성란의 소설 '여름의 맛'에는 복숭아와 평양냉면, 콩국이 등장하지만 그런 별미만 내내 먹을 수는 없다. 매 끼니 입맛을 지켜줄 아이템이 필요하다.

매운 건 못 먹으면서 꼭 고추는 청양만 고집한다. 간혹 오이고추같이 풋풋한 고추를 먹고 나면 속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입맛 없는 여름날, 밥 한 숟갈에 국 한 모금 삼키는 이유는 청양고추를 맛있게 먹기 위해서다. 비 오는 날 부추전을 먹는 것도 총총 썰어 넣은 고추의 알싸함을 맛보기 위해서다. 잔치국수에는 양념장을 줄여 그 심심함 속에서 청양고추와 된장의 맛을 느껴야 한다.

식탁에 올라온 고추 중에 단 하나면 족하므로 제법 고심해 고르는 편이다. 적당히 칼칼한 녀석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끝이 뭉툭한 경우 실망스러운 경험이 여럿 있다. 성격이 너무 못돼빠져서 끝이 꼬부라진 녀석을 볼 때면 제 성질 못 이기는 사람을 보는 듯 겁이 난다.

한때 지극히도 아껴주시던 선생님께서는 늘 내 성격을 염려하셨다. 사람이 매운 데가 좀 있어야지, 하는 말씀이었다. 매번 "네, 네" 하던 나는 그럴 때조차 "아, 네…" 하고 말았지만 맵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수없는 여름이 흘러갔다. 여전히 그런 성격은 못 가졌지만 대신 청양고추의 맵싸함만 알아버렸다.

충남 청양에서 재배돼 청양고추라는 말도 있고 경북 청송의 '청(靑)'자와 영양의 '양(陽)'자를 따왔다는 설명도 있다. 지금은 경남 밀양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데 종자권은 이미 외국기업에 있다니 청양고추를 먹을 때는 혀만 얼얼한 것이 아니다. 그저 매운 고추의 대명사로서 청양이라 불러왔지만 나는 언젠가부터 '청량고추'라 발음하고 있다.

달면서 매운 것도, 짜면서 매운 것도 아닌 순수한 매움의 단계가 몹시 청량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확실한 매움, 그 깔끔한 마무리에는 분명 내가 갖지 못한 성향을 받아들일 때의 쾌감 같은 것이 있다.

무엇보다 일순간 입안을 가득 채우는 홧홧함은 오로지 매움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렇게 한바탕 눈물짓게 만들고는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 간다. 때로 통증에 속까지 쓰리지만, 다음번 끼니 때 냉장고에서 가장 먼저 끄집어내는 것은 역시 청양고추다. 어쩌면 모든 매력적인 것의 특성인지도 모른다. 집중하게 만들고, 눈물 흘리게 하고, 끝내 사라져가지만, 다시 생각나는 것.

그러니까 청양고추는 여름 그 자체를 닮았다. 온 몸속을 뜨겁게 만들어놓는 초록색 불길. 결국엔 가버릴 여름이다. 그리고 다시 그리워하겠지. 그래도, 정말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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