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학 대륜중·고校 개교 100주년…'항일·호국 바탕 아래 더 나은 미래로'

입력 2021-08-16 06:30:00 수정 2021-08-16 08:42:25

대구 우현서루→남산동→수성동 거쳐 '만촌동 시대' 열며 도약
1921년 홍주일·김영서·정운기 등 우국지사 3인이 세운 교남학원에서 출발
1940년 대륜학교로 개명
교남·대륜 출신 독립운동가 15명…김점학·이덕주·김후식·송명근·백춘갑·이갑상
김영수·이육사·장적우·상무상·조재만·이상쾌·김승기·김명인·조흥로 동문

대구 대륜중·고등학교 전경. 이곳은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우현서루에서
대구 대륜중·고등학교 전경. 이곳은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우현서루에서 '민족사학' 교남학교로 시작해 한 세기를 이어오며 저항시인 이상화와 이육사 등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재를 여럿 배출한 명문 학교다. 대륜고 제공

'태백산이 높솟고 낙동강 내다른 곳에' 터를 잡고는 '오는 세기 앞잡이들 손에 손을 잡'은지 한 세기가 흘렀다(대륜중·고등학교 교가 중 일부 인용).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민족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1921년 설립된 '민족사학' 대구 대륜중·고교가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홍주일, 김영서, 정운기 등 민족지사 3인이 세운 교남학원(嶠南學院)이 100년 역사의 출발점. 우현서루(友弦書樓)가 첫 교사(校舍)였다. 1940년엔 교명을 대륜학교로 바꿨다. 남산동과 수성동을 거쳐 1988년 만촌동에 둥지를 틀었다. 교가를 지은 이상화 시인을 비롯해 대륜을 거쳐 한국 근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도 여럿이다. 지난 한 세기 대륜의 발자취를 더듬어봤다.

대륜고가 소장하다 최근 독립기념관에 위탁 기증, 일반에 공개된 옛 사진 자료들. 교남학원 제1회 졸업식(1923) 기념사진 등 학교 관련 사진. 대륜고 제공
대륜고가 소장하다 최근 독립기념관에 위탁 기증, 일반에 공개된 옛 사진 자료들. 교남학원 제1회 졸업식(1923) 기념사진 등 학교 관련 사진. 대륜고 제공

◆항일과 호국 :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다

민족지사 3인 세운 교남학교서 출발, 이상화 시인 교사로 부임·교가 작사
일제경축일 행사 않고 신사참배 반대, 이육사 등 독립운동가 15명 배출

교남학교 시대에는 학생들이 주도한 항일결사운동이 많았다. 1928년 일부 재학생이 대구 다른 학교 학생과 학생 비밀결사를 조직, 지하 항일운동을 하다 검거됐다. 독서회를 조직, 일제의 눈엔 불온서적이라 할 책을 읽으며 민족정신을 일깨우기도 했다. 문자(한글)보급운동에는 재학생 116명이 참가했다.

민족시인 이상화는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잘 알려진 인물. 1933년 교남학교에 교사로 부임, 무보수로 작문과 영어를 가르쳤다. 현재 교가이기도 한 교남학교 교가를 작사한 이가 이상화 시인이다. 그는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며 교내 권투부를 창설하는 데도 앞장섰다.

이상화 시인의 이력서(위)와 교원 임용 허가서. 대륜고 제공
이상화 시인의 이력서(위)와 교원 임용 허가서. 대륜고 제공
이상화 시인의 친형인 독립운동가 이상정 장군의 친필 이력서. 대륜고 제공
이상화 시인의 친형인 독립운동가 이상정 장군의 친필 이력서. 대륜고 제공

교남학교는 일제의 경축일엔 아무런 기념식, 행사를 열지 않고 평일과 다름없이 지냈다. 일왕의 생일 때도 마찬가지. 거짓 연극으로 식을 올리는 시늉만 한 적도 있었다. 일제 학무당국 관계자가 학교를 찾아 직접 식 거행 여부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신사참배에 반대, 참가하지 않기도 했다.

민족시인 독립운동가 이육사 (본명 이원록).
민족시인 독립운동가 이육사 (본명 이원록).

현재 파악된 교남·대륜 출신 독립운동가는 15명. 김점학, 이덕주, 김후식, 송명근, 백춘갑, 이갑상, 김영수, 이육사, 장적우, 상무상, 조재만, 이상쾌, 김승기, 김명인, 조흥로 동문이 그들이다. 이육사란 이름이 낯익다. 유명한 저항시인 이육사가 맞다. 그는 동생 이원조, 이원창(학적부엔 '이원도'로 기재)와 함께 교남학교에서 수학했다.

1997년 대륜고 제70회 졸업식에서 65세이던 최오영 동문이 44년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1950년, 당시 6년제였던 대륜중 졸업을 앞두고 학도병으로 입대하는 바람에 손에 쥐지 못했던 졸업장이었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학업을 그만두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건 대륜인이 적지 않았다.

6·25전쟁 당시 UN군은 1951년에 접어들면서 전쟁을 종식시키려고 공산군과 휴전 협정을 체결할 심산이었다. 이에 분노한 재학생들은 그 해 12월 15일 '통일 없는 휴전은 반대한다'는 플래카드를 높이 들고 궐기대회에 참가, 길거리 행진에 나서기도 했다.

1966년 베트남전에서 적이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부하들을 구한 해병대 이인호 소령의 흉상. 대륜고 교정에 세워졌다./대륜고 제공
1966년 베트남전에서 적이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부하들을 구한 해병대 이인호 소령의 흉상. 대륜고 교정에 세워졌다./대륜고 제공

이인호 동문은 대륜고 2회 졸업생.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베트남전쟁에서 전사했다. 적이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많은 부하를 살리는 대신 자신은 장렬하게 산화한 것이다. 그의 살신성인 정신을 기리려고 당시 국회의원이던 이만섭 동문이 앞장서 성금을 모았다. 이어 1966년 12월 이인호 동문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대륜중·고등학교에 기념비를 세웠다.

◆민주: 신념으로 세상을 일으키다

1946년 쌀 수급정책 실패 대책 시위, 대륜중 교사·학생 10·1사건에 동참
김덕룡 8대 재단이사장 재정난 극복, 대건중 등 5개교 신입생들에 장학금

1946년 10월 1일 대구부청 앞에서 쌀 수급 정책 실패에 대해 대책을 마련하라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무고한 시민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대구 10·1사건 때 대륜중 교사인 정희준은 시위대 대표단 중 한 명이었고, 배일천 학생 등은 시위 현장에 직접 동참했다.

당시 대륜중은 대구의 다른 학교들과 함께 시대의 문제에 침묵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양심을 갖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어온 민족교육의 영향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의 불의와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고 행동한 양심의 대가는 휴교 조치였다.

재정난을 겪던 대륜중·고를 인수한 8대 김덕룡 재단이사장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1958년 대구 칠성동에 성당(현 고성성당)을 지어 봉헌한 데 이어 경북 고령성당 대지 헌납, 경북 경산 용성공소(현 용성성당) 봉헌 등 영남 일대 교회의 확장과 발전에 큰 힘을 보탰다. 그런 공로로 1965년엔 로마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그는 한때 신문사도 경영했다. 대구 매일신문사가 운영난에 봉착하자 사주였던 천주교회의 요청을 받아 1955년부터 신문사를 이끌었다. 매일신문사는 당시 자유당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는 데 앞장서 대구 2·28민주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김 선생은 1963년 사재를 털어 대륜교육재단을 인수했다. 아호를 따 석강장학회를 설립해 천주교회가 경영하는 효성여중, 효성여고, 대건중, 대건고, 근화여중 등 5개 학교 신입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장학금을 받는 학생은 점차 늘어 경북 일원 9개교 170여명에 이르게 됐다.

이걸로 그친 게 아니다. 영남지방에선 처음이자 전국에서도 드문 장학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 1964년 석강장학회를 대신하는 석강장학재단을 세우고 당시 시가로 2천만원에 달하는 대화빌딩을 이 재단에 희사했다. 사업이 부진하거나 세상을 뜬 뒤에도 가난한 수재들이 공부할 수 있는 길을 터놓겠다며 펼친 일이다. 이 재단은 결국 대륜교육재단에 병합돼 대륜중·고가 발전해나가는 데 기여했다.

장학재단으로 발족한 이후 장학금 지급 대상 학교 수와 지급 대상 인원은 해가 갈수록 늘어났다. 대륜중·고만 해도 장학금을 받은 인원 수가 많을 때는 연간 갑종(입학금 및 공납금 전액 지급) 60명, 을종(입학금 및 공납금 반액 지급) 120명에 달했다. 장학금을 받는 학교의 수도 1971년도 당시 27개교(시내 25개교, 지방 2개교)로 불어났으니 재단의 사업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대륜고가 소장 중이던 일제 강점기, 1950년대 전후 자료들. 최근 독립기념관에 위탁 기증해 일반에 공개됐다. 국어 교과서, 미군정청 관보, 공문서철, 대한민국관보 등. 대륜고 제공
대륜고가 소장 중이던 일제 강점기, 1950년대 전후 자료들. 최근 독립기념관에 위탁 기증해 일반에 공개됐다. 국어 교과서, 미군정청 관보, 공문서철, 대한민국관보 등. 대륜고 제공
대륜중고校 교가, 응원가
대륜중고校 교가, 응원가

◆혁신: 변화로 교육을 이끌다

도서관·과학관·수영장·박물관 건립, 1988년 만촌동 옮기며 '수성구 핵심'
이상화·이육사 시인 형제 자료 기증, 이달 10일 독립기념관서 일반 공개

"고 난사 선생의 유업을 계승, 본인의 열과 성을 다해서 더욱 보람된 학교로 육성할 것을 다짐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단시일 내에 전국에서 제일 시설이 좋은 학교로 만들 계획입니다." 김덕룡 재단이사장의 취임사 첫 머리다.

이에 따라 예능관을 시작으로 다양한 학교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도서관도 신축, 이전했다. 장서 수가 1만2천여권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중·고교 도서관으로선 상당히 큰 규모였다. 헤드셋이 설치된 언어실, 과학관에다 수영장도 만들어졌다. 서울 여국탄광사장이던 채기엽 동문이 500만원을 학교에 기증, 완성된 공간이었다. 박물관인 고신관도 들어섰다.

좋은 시설도 세월의 흐름은 거스르기 어려운 법. 교사가 점차 낡고 공간이 부족해졌다. 1983년 취임한 김영진 재단이사장(9대)은 새 학교 부지를 선정하기 위해 수차례 현장을 답사하면서 고민을 거듭했다. 번화한 수성동에서 외진 만촌동 끝자락으로 옮겨가는 게 당시로선 쉽지 않은 선택. 이 시도는 대륜이 '명문 민족사학'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김 이사장의 결단이 '신의 한 수'가 된 셈이다.

수성동 교사는 역사의 질곡만큼이나 고단하고 한이 서린 추억이 담긴 곳. 그런 보금자리를 뒤로 하고 1988년 12월 만촌동 교사로 옮겼다. 이곳에서 대륜중·고, 특히 대륜고는 대구 교육에 혁신을 불러왔다. 2012년과 2013년 일반계 고교 종합평가에서 2년 연속 대구 1위에 오르는 등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현재도 대구 수성구의 핵심 학교로 꼽힌다.

이상화 고택. 매일신문DB
이상화 고택. 매일신문DB

대륜중·고의 100년 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6·25전쟁, 민주화와 근대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대륜중·고는 한국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뛰어난 학력과 교육환경에다 이 같은 역사를 품고 있어 '민족사학' 대륜중·고가 명문 학교로 꼽히는 것이다.

대륜중·고는 개교 100주년을 맞아 각종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 지난 3월 10대 김의용 재단이사장은 독립기념관과 일제 강점기 학생운동 및 학교사 자료 위탁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학교 측은 소장 중이던 이상화 시인 형제, 이육사 시인 형제 등과 관련된 자료도 독립기념관에 위탁 기증했다. 8월 10일 일반에 공개하는 행사도 열렸다.

이상화 시인.
이상화 시인.

지난 4월 21일엔 이상화 시인 탄생 120주기 추모식을 열었다. 6·25전쟁 참전 학도의용군 발굴 사업도 추진 중이다. 학교 100년의 역사를 정리한 '대륜백년사'도 발간을 앞두고 있다. 9월 15일엔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열고, 새로운 천년 역사를 위해 도약을 다짐한다.

도움말=대륜고 석은동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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