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기록여행] 포항 ‘최 부호의 악행’

입력 2021-07-16 13:30:00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9년 8월 23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9년 8월 23일 자

'황금만능이 빚어낸 사실인지 인정도 의리도 없는 기괴하고도 몰염치한 부호의 비인간적 행위를 한 것이 드러나 당지 인사들의 분노를 격화시키고 있다. 즉 포항시에 거주하는 최라는 부호 집에서 키우고 있는 개가 갑자기 광견화 하여 약 3주일 전에 동부호의 아들과 이웃의 빈한한 강씨 장남을 일시에 교상한 사실이 있었다는데~'(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9년 8월 23일 자)

사람이 개에 물리는 일은 낯설지 않았다. 늦더위가 가시지 않은 1949년 8월 하순 포항에서는 최씨 성을 가진 부잣집 앞에서 동네 아이 둘이 개에 물려 큰 상처가 났다. 그런데 인정도 의리도 없는 기괴하고도 몰염치한 '최 부호의 악행'은 뭐였을까. 두 아이 중에 1명은 부잣집 주인인 최씨의 아들이었고, 다른 1명은 동네 가난한 집인 강씨 집 장남이었다. 개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서울에 수소문해 약재를 구해 오는 등 치료에 온 힘을 쏟았다. 반면에 남의 집 아이는 나 몰라라 했다. 결국 치료를 받지 못한 가난한 집 아이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예전에 부잣집과 개는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으레 덩치가 큰 셰퍼드가 방문객을 맞았다.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크고 넓은 집의 방범을 위해 맹견을 키웠다. 해방 직후 이런 집에 괴한이 들이닥쳐 개를 급살한 일이 더러 있었다. 일제 당시 민중을 약탈하며 번 돈을 건국사업에 내어놓으라는 협박장이 뒤따랐다. 대구의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살았다는 남정(진골목)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해방 이전부터 광견이라고 부르는 미친개는 누구에게나 위협의 존재였다. 광견들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보이는 대로 공격을 했다. 1939년 여름에 대구부 동성정에서는 길 가던 행인이 미친개에 물려 사경을 헤매는 일이 벌어졌다. 부호의 집 앞이나 길을 가다가 개에 물려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늘자 당국은 광견 퇴치운동에 나섰다. 비싼 사냥개라도 집안에 매어 두지 않으면 퇴치하겠다는 이른바 '개 박살운동'을 벌였다.

개를 키우는 집이 하나둘 늘다 보니 사고도 끊이지 않았지만 사람 먹을 것도 없는 식량을 축낸다는 불만 또한 컸다. 한편으로는 기운을 보충하는 영양식으로 개고기를 먹는 인구도 꾸준히 늘었다. 토속음식 마냥 개장국을 찾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여름 복날에 개장국을 먹고 더위를 물리친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퍼져 있었다. 개고기의 인기에 돌아다니는 개를 붙잡아 개장국 집에 헐값으로 팔다 붙잡히는 사례도 생겼다. 심지어 집안에 매어놓은 개를 몰래 끌고 나오는 개 도둑이 성행하기도 했다.

논란 끝에 1954년에는 개장국 판매가 금지됐다. 비위생적이고 비문화적이라는 이유였다. 판매 금지의 눈을 피해 나온 이름이 보신탕이었다. 하지만 동물학대와 보신탕 문화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차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이제는 보신탕집을 찾기가 예전 같지 않다. 게다가 행여 먹었다손 치더라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 되고 말았다.

개장국을 즐기던 해방 전후 백성들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경찰에 종사하며 충견 노릇을 했던 경찰을 주구(走狗)에 빗대기도 했다. 주구는 사냥할 때 부리는 개를 일컫는다. 일제의 사주를 받고 끄나풀 노릇을 했다는 성토였다. 시대는 바뀌어도 주구의 유혹은 개 주인인 '최 부호의 악행'처럼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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