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대구(邱郡) 남녀분들도 애도했답니다

입력 2021-07-06 05:00:00 수정 2021-07-06 06:08:03

[그래픽] 대구~광주
[그래픽] 대구~광주 '달빛내륙철도' 건설 계획. 연합뉴스
정인열 논설위원
정인열 논설위원

"숙부 이름은 규홍이고… 자호를 담산이라 하는 것은 낮은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몸을 바쳐 살신성인으로 성패와 이해를 가리지 않고 오직 국가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대구 주위(邱郡) 남녀분도 슬픔으로 애도하였다 합니다.… 그곳 뜻있는 유지들이 염장(斂葬)하여 칭송도 하였다고 합니다.… 저의 숙부는 한 점 혈육도 없고 출생부터 가난하여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습니다.… 언덕 기슭 황야에서 풍우를 맞으며 영혼이 외롭게 떠돌고 있습니다.… 무덤이 없으니 조문도 받지 못합니다.… 외딴 곳에서 애처롭고 불쌍하게 떠도는 영혼과 무덤을 고향에서 모실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지난주 필자는 전남 보성군 조성면 산정마을에서 보낸 봉투를 받았다. 봉투 속에는 '대구반장시부의록'(大邱返葬時賻儀錄)이란 표지와 함께 한문 글과 350여 명의 이름 등 자료가 들어 있었다. 대구화랑의 고서연구가 김항회 대표를 통해 파악한 결과, 1923년 2월의 한 장례와 관련된 사연이 적혀 있었다. 부의록은 반장(返葬·객지에서 죽은 이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김) 때 정성을 보낸 사람들 명단이었다.

약 100년 전의 자료는 사연을 담고 있었다. 호남의 유명한 안규홍(安圭洪) 의병장의 죽음에 얽힌 일이었다. 1879년 태어나 1910년 6월 22일, 32세로 대구감옥에서 사형된 그의 시신은 버려졌다. 대구 사람들은 그를 거두어 산기슭에 묻었다. 유족들은 1911년 5월 5일 사형 집행 사실을 통보받고 급히 달려가 감옥 주변 여관 주인 등 대구 사람들을 통해 겨우 묘를 찾았다.

조카 안종연 등 유족이 남강과 영산강을 건너 여러 날이 걸려 도착한 대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대구 사람들이 죄수 번호로 표시한 묘지 확인과 뒷날 반장의 기약이었다. 1923년 2월, 마침내 조카 안종연의 애절한 호소와 함께 보성향교를 통해 350여 이웃의 부의로 반장을 할 수 있었다. 부의록은 머슴살이 의병장 안규홍의 참혹한 죽음과 이후 시신을 거둔 대구 사람들의 애틋한 사연을 간직한 기록이었다.

자료를 보낸 사람은 안 의병장의 증손자(안병진)였다. "시신을 거두어 묻어 주신 대구 사람들이 정말 고맙지요!" 그는 최근 대구의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에서 펴낸 대구감옥 자료집(개정판 「묻힌 순국의 터, 대구형무소」)을 통해 의병장 할아버지가 갇혀 사형당한 감옥에 대해 이제야 알게 됐다고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할아버지가 갇히고 돌아가셨던 대구감옥이 너무 궁금했거든요."

불과 100년 전 남쪽 전라도(보성군 조성면 경우)에서는 산 넘고, 강 건너 여러 날(증손자는 10일쯤이라 증언)이 걸려야 대구에 이를 수 있었다. 이런 두 곳을 오가는 시간은 1984년 광주~대구 고속도로 개통으로 3시간에서, 다시 2시간 30분으로 줄었다. 이어 지난달 29일 발표된 정부 계획처럼 두 도시를 잇는 달빛내륙철도가 놓이면 1시간대로 준다. 영호남 교류사에 새 이정표가 될 달빛철도에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이처럼 두 지역을 잇는 길이 앞으로 뭍길과 철길로 늘게 됐다. 이를 통한 교류 활기와 두 지역이 함께 동반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를 위해서 안 의병장 장례에 얽힌 가슴 저린 사연처럼 과거 일제강점기 흑역사와 현대사의 민주화 투쟁 경험을 비롯한 근현대사에서 두 지역이 간직한 역사 자산을 공유하자. 이는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두 지역 역사 자산을 살피고 아는 교류, 이제라도 나서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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