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 않을 '소망의 등'〉
나는 숲을 좋아한다. 사색에 잠긴 채 숲속을 산책하는 것은 내 큰 즐거움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숲속을 걸으면서도 평온한 주변을 둘러보기보다 여러 가지 복잡한 현실에 빠져드는 나를 자주 접하곤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문제를 비롯해 생각할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숲속을 걷다 사람들을 만나면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든다.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이 사람들 한 명 한 명은 모두 한 그루의 나무와 같지 않을까. 결국 그런 나무들이 모여 이룬 것이 사회라는 숲일 텐데. 다만 제대로 된 숲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나무들 하나하나가 한마음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움직이는 숲의 일원인 나무 한 그루로서 숲과 함께 행복해질 수는 없을까.
십이지 간 중 첫 번째인 쥐는 영리하고 똑똑한 존재로 여겨진다. 설화에 따르면 자(쥐), 축(소), 인(호랑이), 묘(토끼), 진(용), 사(뱀), 오(말), 미(양), 신(원숭이), 유(닭), 술(개), 해(돼지)가 달리기 시합을 했는데, 소가 일등을 할 뻔 했으나 소뿔에 매달려 있던 쥐가 재빨리 뛰어내려 일등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꾀가 많은 쥐는 '미키마우스'나 '톰과 제리'와 같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친근한 느낌을 주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편이다.
한아름 희망과 기대 속에서 경자 년 새해를 맞았건만 2020년은 기대와 달리 절망의 끔찍한 해로 기록될 것 같다. 해가 바뀐 게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한 해가 저물어간다. 벽두에 머리를 내민 괴물 코로나가 방문을 차고 들어온 뒤, 주인 행세를 하며 여전히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사람들은 쥐가 번식력과 먹을 복을 타고났기에, 올해는 번영의 해가 될 것이라 덕담을 나누며 두 손을 모으지 않았던가. 그런데 분명해진 것은 우리를 위한 경자 년이 아니라 쥐의 경자 년이 되었다.
올여름은 긴 장마와, 또 열흘 새 이어진 태풍 바비, 마이삭 및 하이선의 위세에 시달리지 않았던가. 이들 장마나 태풍은 온난화로 바다 수온이 높아지면서 생긴 이상기온의 산물이다. 거기에다 눈 감고, 귀 막고, 입 닫아야 살 수 있는 정치 현실은 숨을 막히게 한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틈틈이 둘레길을 걸으며 자연이 베푸는 맑은 공기를 마음껏 심호흡하고, 그런 자연의 이타심에서 감사할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도 기분 좋게 둘레길의 예정된 구간을 걸었다. 땀에 젖은 몸을 샤워로 식히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땅거미가 조용히 내린다. 아직도 내 귓가엔 숲 속의 바람소리가 속삭이는 듯하다.
나무 가지가 끊어지면 뱀의 밥이 되는 순간이 바로 눈앞에 다가온다. 이런 아슬아슬한 절명의 순간에 우리 사회는 위기에 처한 것도 잊은 채 나뭇잎에 벌이 만들어 놓은 꿀을 혀로 핥아먹느라 혈안이다. 오늘밤엔 이상하게도 나무 밑동을 갉아 먹는 쥐가, 너나 할 것 없이 찍찍거리며 살길을 찾아 울어대는 우리의 자화상으로 겹쳐 떠오른다. 어느덧 나는 우물 구덩이에 빠져,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쥐가 된다. 낯익은 그 쥐는 2백여 년 전 러시아 땅에 살았던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떠올리며 무언가 열심히 찍찍댄다. 아무리 외쳐대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소리를 가슴에다 적고 적었다.
"당신, 초저녁부터 무슨 잠꼬대야!"
아내가 무슨 꿈을 꾸느냐며, 얼른 저녁 먹으라고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뜨거운 여름날 땀을 쏟으며 둘레길을 도느라 피곤해서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잠깐이었지만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구청장 앞으로 보낼 협조공문 비슷한 것을 구상했던 것 같기는 한데…….
저녁 창가에, 아주 조용히, 하루 종일 햇빛을 머금은 머그잔 모양의 자연조명등(Solar Mason Jar Lid Lights, 자연에너지 가정용 조명등)이 고요로 반짝인다. 집안 가득 평화가 내린다. 투명한 유리잔 속의 텅스텐전구가 달빛보다 은은하게 온몸에 스며든다. 평안이 숨 쉰다. 행복이 핀다.
나는 이를 '소망의 등'이라고 부르는데, 언제 부터인가 이 소망의 등을 거실밖에도 밝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집 앞 생태공원에 '소망의 등' 길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에게 내가 느끼는 이 고요와 평화를 선물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조그만 바람이었다.
정신이 좀 들면서 막연하지만 분명하게 떠오른다. 수신인과 '소망의 등' 설치 의뢰'라는 제목이다.
수신 : 구청장님
참조 : 공원녹지과장님
제목 : '소망의 등' 설치 협조 의뢰
어떻게 뭐라고 썼는지 본문을 되살리고 싶지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뿐 종착점에 이르지 못한다. 기억이 아물아물하다가 반갑게도 하나가 더 생각났다. 마지막의 추신 부분이다.
추신 : 생태공원의 역사를 담는 타임캡슐 매설.
아마도 오래 전부터 품고 있던 바람이 꿈에서 실현된 것 같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타임캡슐에 관심이 많았다. 마치 어릴 때 종합선물세트를 받고 그 안의 내용물을 가슴 두근거리며 하나씩 확인하던 느낌을 누구나 타임캡슐을 열면서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안초산 생태공원의 과거와 오늘에 대해 마음먹고 정리했던 글, 유관기관에 보냈던 질의서 및 건의서를 담은 usb, 기록 사진 등, 역사적 자료들을 타임캡슐에 담아 남기고 싶었다. 타임캡슐이 훗날 언제 개봉될지 모르지만 이곳과 관계된 역사가 그냥 잊혀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특히 공휴일이나 주말이면, 주민들이 공원에 활기를 불어넣지만 과연 몇 사람이 공원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 있는지 의문이다. 더구나 훗날을 생각하면 누가 잊힌 진실을 제대로 기억할까. 진실을 usb에 담아 타임캡슐에 넣어 역사의 교훈으로 남기고 싶은 바람이 크다. 그러고 보니 또 하나의 과제가 생겨난다. 무엇을 타임캡슐에 더 담을까 하는 고민이다.
나는 머그잔 모양의 타임캡슐을 만지작거렸다. 여기에 무엇을 넣을까. 이것을 정말 언젠가 땅에 묻을 수 있을까. 어릴 때 소풍을 가면 보물찾기가 빠지지 않았는데, 보물을 찾는 재미 못지않게 보물을 숨기는 기분도 이제 좀 알 것 같다. 타임캡슐에 무엇을 담을까 벌써 가슴이 띈다.
이 밤, 우선 타임캡슐에 첫 번째로 담을 글들을 찾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읽을 것이다. 우리 마을의 자랑스러운 공원을 위해, 자연친화적 환경보전의 한 사례를 제공하는 차원에서, 그 글들의 마지막 교정을 보려한다. 밤이 깊을수록 소망의 등이 더욱 밝게 빛을 발한다. 밤이 깊으니 여명도 가까우리라.
〈까치 가족의 장례식〉
나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가 베란다 유리창을 힐끗힐끗 보곤 한다. 요즘 하루에도 여러 번 이런 행동을 한다. 그날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 생긴 습관이다. 그 사건은 거실에만 앉으면 아직도 두 눈에 선명하게, 유리창 스크린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오래 전, 서울 안초산 자락에서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순응하며 만족스럽게 살던 때에 일어난, 아주 짧지만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사건이다.
어느 청명한 초가을 오후였다. 베란다 밖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상상할 수 없는 까치 이웃의 슬픔이 한 순간에 장엄하게 펼쳐졌다. 놀랍게도 거실 베란다 창 밖에 갑자기 어디서 왔는지 수많은 까치가 떼를 지어 선회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불시에 시작된 까치들의 황급한 울음소리에는 다급함과 긴박함이 느껴졌다. 햇빛으로 환하던 거실이 갑자기 까치 떼로 인해 먹구름이 낀 듯 어두워졌다. 마치 그것은 하나의 검은 숲처럼 보였다. 숲이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창가 가까이 가서야 나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꽤 커다란 까치 한 마리가 아파트 아래 화단 잔디바닥에 날개가 꺾인 채로 너부러져 있었다. 그 위로 마치 까치 가족 친지가 문상이라도 하는 듯 날고 있었다. 아니 가족 뿐 아니라 공원 안팎의 까치란 까치가 다 모인 듯했다. 놀라웠다. '세상에 이런 일이'란 tv 프로에서나 볼 수 있을 만한 일이었다. 안방에 있던 아내가 뛰쳐나와 내 곁에 서서 같이 보았다. 정말 둘이 보기에도 아까운 장면이었다.
"이건 동영상으로 찍어두어야 하는데~ 아쉽다."
"정말,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야."
"어떻게 새들이 의사소통을 하는 거지?"
"정말 놀라와! 얼마나 장엄한 장례식이야."
신나게 숲 공원을 날던 까치가, 솔거의 나무그림이 너무 사실 같아 새가 내려와 앉으려 했듯이, 베란다 유리창에 비친 나무를 사실로 착각하여 날아 앉으려다 유리창에 머리를 들이받고 추락한 모양이었다. 본의 아니게 가해자가 된 듯해서 미안하고,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지우기가 쉽지 않았다.
까치들이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다는 걸 상상인들 할 수 있으랴. 나는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을 목격한 것이다. 1992년 가을, 지금의 아파트에 이사와 30여 년을 살면서 내 생애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상적이고도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아름다운 슬픔이었다고 해야 할까.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동영상을 찍어 놓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얼마 전 이런 일이 2층 우리집 베란다 창문에 또 일어났다. 깃털자국이 창에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유리문을 열었다. 깃털이 붙은 부분에 손이 닿을 것 같았다. 팔을 뻗어 창에 붙은 깃털 하나를 간신히 떼어냈다. 깃털 하나. 너무도 가벼워 존재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이를 소중히 보관하고 싶었다.
예전에 음식점에서 서두르다가 무심코 머리로 유리벽을 들이받은 일이 있었다. 큰 사고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얼마나 당황스럽고 아파했던가. 남의 눈을 의식하며 참느라 정말 혼이 났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까치의 주검은 단순히 한 생명체의 죽음이 아니라 동네 숲 정원의 죽음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생태계의 죽음을 미리 알리는 순교자적 조종이었다.
나는 거실 장식장 안에 놓아둔 작은 종이상자 속에서 깃털을 꺼냈다. 여전히 너무도 가볍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아주 무겁게 느껴지는 가벼움이었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의 숲이 남긴 소중한 흔적이 아닌가. 슬픈 기억이지만 깃털 또한 상징적인 의미에서 타임캡슐에 2호로 넣을 수 있는 목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식만 갖추는 공청회〉
지난해에 구청 공원녹지과에서 개최했던 '안초산근린공원' 발전을 위한 주민 설명회가 있었다. 일시는 9월 3일 월요일 저녁 7시 30분, ㅊ중학교 정문에서부터 구청 직원들이 친절하게 안내하고, 회의장 입구에서 구의원들이 반갑게 악수를 청하며 맞아주었다. 선거의 표를 의식한 가면의 얼굴에 익숙하다 보니 감동은 있을 리 없었다.
의례적으로 인사를 나누고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공원 문제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고마운 얼굴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하지만 서로가 앉은 자리에서 가벼운 목례 정도만 나눌 뿐 모두가 비장한 표정이었다. 한바탕 결전을 치르려는 것처럼 분위기가 무거웠다. 처음부터 이 행사의 취지나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참석 자체가 유쾌할 리 없기 때문이었다.
계획을 수립하고 예산을 확보하기까지 들인 담당자들의 일련의 노고와 공은 인정한다. 하지만 설명회의 절차나 기획의 내용에는 아쉬움이 많다. 이 모임 자체가 주민의 의견을 수렴했다는 명분을 쌓기 위한 요식행위임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량한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공원 운영의 내실을 위한 충정의 마음은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다.
나는 어디를 가나 표시 나지 않게 지내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다. 가능하면 말을 아끼며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려고 한다. 그럼에도 오늘은 앞자리에 앉아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시력이 좋지 않아 파워포인트의 내용을 제대로 읽기 위함이기도 했다.
구청 직원의 상투적인 인사말이 끝나자 용역회사 사장이 단상에 오르고 정면 스크린에 화면이 켜졌다. '동네 뒷산 공원화 사업'이라는 큼지막한 자막이 떠올랐다. 시작부터 이래선 안 되지만 불신의 마음이 일었다. 설명을 듣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발표자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참았던 손이 올라갔다.
우선 진행의 문제점부터 지적하기로 했다.
"수고 많으십니다.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설명회의 주체가 누구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용역회사에 의존해 설명회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구청 담당자가 설명을 하고, 혹시 기술적인 면에서 보완설명이 필요하다면 그 때나 발언했어야 했습니다."
'사업'이란 제목부터 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공원화 사업'이라는 제목도 문제입니다. '사업'이란 용어는 여기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기획을 용역회사에게 맡긴 것인지, 아니면 용역회사가 주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업이란 용어는 회사의 입장에서 사용하는 말 아닙니까. 이 지역, 세금을 내는 주민의 입장에서 선택한 용어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 배경과 저의에 대해 의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주최 측의 당혹스러움이 엿보였다.
"제목의 '동네 뒷산'도 귀에 거슬립니다. '동네 뒷산' 공원화가 아닙니다. 이 공원은 우리 주민에게 단순한 뒷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의 공원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설 때부터 주민의 앞마당이자, 얼굴이요, 허파입니다. 남의 동네 이야기하듯 그저 동네 뒷산이 아닙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담당자나 용역회사의 머리에서 무슨 애정 어린 발전 방안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사업인지 묻고 싶었다. 이렇게 시작된 질의는 몇 가지 건의하는 수준에서 끝났다. 진심을 담은 주민들의 항변이 마이동풍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부디 계획안에 반영하고, 반의반이라도 참고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누가 봐도 순진하다 하겠지만.
공청회가 주민들의 불만에 찬 성토의 장으로 이어졌다. 특히 공원 조성계획 속에 엉뚱한 목재체험장 및 정원학교 건립에 따른 위치 재고의 목소리가 높았다. 사회자가 폐회를 선언하려는 순간에 뒷좌석에서 "긴급발언이요!" 하는 날카로운 고성이 터졌다. 뒤돌아보니 골프연습장 건립을 앞서 반대 했던 부녀회의 논리적인 김 여사였다.
"공원에 한강의 폐 유람선을 옮겨온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입니까?"
"네, 먼저 말씀 드린다고 했는데 깜빡했습니다. 늦게라도 보고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상으로 기증 받는 것입니다. 산자락에 배가 떠오르니 기발한 역발상으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비가 올 때나 추운 겨울에도 아이들의 놀이터가 될 것입니다."
"여기는 주민의 의견을 묻는 자리이니, 반대합니다. 무상이라고 하셨는데, 배 자체는 무상일지 몰라도 운반비만 5천만 원, 여기에 개조 및 내부 시설비용이 2억 원이라고 들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의미가 없습니다. 나아가 생태공원 정면 한가운데에 위치해 공원 전체의 시야를 가리고, 기존의 나무들을 베어가며, 꼭 그렇게 자연을 거슬러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경제성을 따져도, 미관상으로도 상식 이하의 결정입니다. 절대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실내 공간도 비좁아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에도 비현실적입니다. 꼭 재고하시어 취소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타깝지만 근래 공원 입구 안쪽으로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폐유람선이 자리 잡아 경관을 해치고 있다. 주민들이 그토록 설치를 반대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내부를 아이들 놀이터로 개조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노란 테이프를 둘러 접근을 금하고 있다.
문학 수사법에서 부조화의 극치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적합한 예가 공원 속의 이 폐유람선일 것이다. 늦은 밤에 공원을 지나갈 때면 유령선을 지나는 것만 같은 기분 나쁜 느낌마저 든다. 멋진 공원을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들여 망치는 행정당국의 안목이라니!
주민 설명회가 끝나고 내 발길은 무의식적으로 공원으로 향했다, 생각해보니 공원 조성 전부터, 이미 잘려나간 나무들이 마치 인간의 잘린 팔다리처럼 느껴져 잠시 소름이 돋는다. 나는 걸음을 멈춘다. 발아래 떨어진 나뭇잎이 나무의 실망한 마음 같이 느껴져 안쓰럽다. 성형 광고에서 볼 수 있는 수술 전‧후 사진의 대비처럼 타임캡슐에 공원 조성 전‧후 그리고 가로수길 전‧후 사진과 함께 이 잎사귀를 3호로 넣기로 하자.
〈주민이 바라는 공원〉
십여 년 전만 해도 아름다웠던 배밭은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생태공원'으로 둔갑했다. 벌써 옛날이야기가 되어 아련한 향수만 자아낸다. 그 과정은 주민들이 온몸으로 이루어낸 슬픈 역사이다. 과오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후대의 교훈으로 오래 기억되어야 한다.
당시의 아름드리나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인가. 과거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생태공원'이라 하면 말 그대로 사람과 자연 또는 환경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공생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춘 공원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조성된 생태공원은 자연과 환경을 송두리째 갈아엎고 인위적으로 꾸며낸 특색 없는 공원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번에 생태공원을 야심차게 확장 발전시키겠단다. 예를 들면, 허브식물 재배 단지를 만들고, 장미공원을 조성하고, 분수를 만들고, 쉼터를 꾸미고, 정원학교를 세우고, 텃밭을 만들고, 둘레길을 조성하겠단다. 조성만 하면 끝나는 것인지, 유지 관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 묻고 싶다.
안초산 자락에 위치한 도심 속 '숲정원'은 거부감 없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그 이름에 걸맞은 공원 조성을 주문하고 싶다. 철학이 있는 공원, 자연과 어우르는 공원, 지역의 특색이 느껴지는 수준 높은 공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안초산 높이 오르지 않더라도 안초산을 느낄 수 있는, 안초산 숲이 마을로 마실 내려온 것 같은 자연 그대로의 '숲정원'이 조성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민은 유지비가 적게 들면서, 인공적이지 않은 공원, 사람 냄새가 적게 나는 공원, 자연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을 갖춘 공원을 갈망한다. 위치가 지역의 정보문화도서관 바로 옆이니 도서관이 책을 읽는 도서관이라면, '숲정원'은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읽는 사색의 공간으로 조성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안초산 숲이 마실 내려온 '숲정원'을 유일무이한 공원의 모델로 가꾸고 싶은 의향은 없는지 묻고 싶다. 공중화장실에도 상을 주는데, 아직 공원에 주는 상은 없는 거 같다. 아름다운 건축물에 건축상을 수여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공원에 수여하는 대한민국 첫 '아름다운 공원 대상' 수상의 꿈을 숲정원 조성에 실어본다.
나는 공원을 가로질러 시내에 나가거나,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약간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문득 순교자적 모습으로 죽은 까치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한 편으론 코로나가 발붙일 수 없는 행복한 동네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마을은 꽃밭이고, 공원은 꽃다발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다.
〈자연 그대로의 행복〉
작년 주민 설명회를 거의 잊고 있던 나는 최근 구청으로부터 주민 의견수렴이라는 공문을 전달받았다. 제목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도로다이어트 사업'이라니, 도로에 다이어트라니, 용어부터 궁금증을 자아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주민 설명회가 어려우므로 동별로 게시판 홍보를 통하여 의견수렴을 한다는 말도 박스로 처리하여 시선을 끌었다.
사업내용은 간선도로 4길 4차로를 2차로로 축소하고 보도를 확장하는 것이다. 곡선형 차도를 조성하여 차량의 통행속도들 늦추어 보행자의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란다, 보행 안전성 및 경관을 고려한 색채 블록을 설치하여 차량과 보행자를 분리하고, 차도 횡단거리를 줄여 어린이 등 교통약자의 사고위험을 감소시키겠단다.
기특한 발상이다. 인사동이나 명동의 걷는 길처럼 차량이 통제되는 보행 길이 연상되어 낭만적이기도 하다. 도로 양쪽의 인도가 좁고, 인도에는 보통 10미터 간격으로 심어진 가로수로 인해 마주 오는 사람과 맞닥뜨리기도 한다. 특히 비오는 날엔 우산을 쓰고 혼자 걷기도 불편하다. 따라서 반대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개선안을 자세히 살펴보니 문제점이 적지 않다. 발상 시점도 다분히 의심스럽다. 지난해 시월, 주민 설명회에서 이미 제기되었던 문제의 유람선과 무관하지 않았다. 꼴불견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제2의 결단이 바로 도로 다이어트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누군가의 배를 채워주고, 주민들에게 생색이나 내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역시 주민들의 반발이 이어졌다.
"잘못된 다이어트는 건강을 해칩니다."
"행정의 비효율을 규탄합니다."
"관료는 자기 주머닛돈 쓰듯, 가정경제를 꾸리듯 해야 합니다. 세금으로 무슨 선심 쓰듯, 이건 아니지요."
"돈 들이지 않는 다이어트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불평은 여기저기,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 동네라고 예외가 될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협조요청이라는 말은 보통 의견수렴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계획대로 시행한다는 통보이기에 많이 염려스럽다.
우리 동네는 숲이 좋고, 사통오달 터널을 이루는 가로수가 일품이었다. 4~5층의 저층 아파트와 초등학교 및 중학교가 주를 이루고 있는 주택 단지에 가로수가 터널을 이루니 어쩌다 택시를 타면 기사들이 부러워할 정도였다. 가로수는 주민의 자부심이고 자랑이었다. 학교 앞이니 자동차 속도를 줄이라 하지 않아도, 경관을 즐기기 위해 스스로 속도를 줄일 만큼 아름다운 거리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가로수 가지치기라는 미명하에 수형도 멋졌던 그 나무들이 불구가 되어 있었다. 30여 년 자란 그 멋진 느티나무들은 큰 가지들까지 무지 막지 잘려나가 초라한 행색으로 변해 있었다. 여름에 그늘도 충분히 주지 못하는 빈약한 가로수들이 된 것이다. 공원 녹지과에 항의하니 원래 가로수 가지치기를 제대로 하려면 30억이 필요한 데 10억 밖에 없어 유감이라는 대답이어 기가 막혔다.
언젠가 택시기사가 이런 말을 했었다.
"이 길도 이제 다 망가졌네요."
"그렇죠. 안타깝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속도를 줄이고 경관을 즐길 정도로 아름다운 거리였는데요."
운전기사의 말을 듣는 동안 마음이 착잡했다.
수령 30년의 가로수는 한여름의 온도를 5도나 낮추어 준다. 또 가로수가 내뿜는 피톤치드는 절정을 이룬다. 그런데 간판을 가린다는 민원 때문이라며 가로수에 단발령을 내렸던 것이다.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겐 가로수의 장점이나 지역적 특성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곳은 누가 봐도 학교가 두 개나 있는 주택가가 아닌가. 어이가 없다. 도로 다이어트를 하기 전에 가로수 터널부터 복원하려는 자세를 보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가로수길이 내뿜던 피톤치드와 서늘한 그늘을 타임캡슐에 넣고 싶다.
어쨌든 나는 자연이 어우러진 지역에서 안초산이 내뿜는 공기를 마시며 녹지의 혜택을 푸짐하게 누리고 있다. 간간이 구청 공원녹지과에 아쉬움과 불평을 토로하면서도, 이것이 내가 안초산 자락에 기쁨으로 사는 이유이다. 북한산과 도봉산을 올려다보며 지역의 시골스러운 자연과 환경에 감사한다.
〈이 동네를 못 떠나는 이유〉
정년을 하면서부터 내가 바라던 삶이 있었다. 나무를 닮는 삶이었다. 나무는 움직이지 않고도 온갖 세상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세월을 이기고 자신을 성찰한다. 나무는 한 자리에 조용히 뿌리내리고 서 있지만 바람으로 새들을 불러들이고, 열매로 짐승을 불러 모으고, 그늘로 사람을 끌어들인다.
날짐승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젊음을 구가했던 나는 이제 안초산 자락에서 노구를 이끌며 나무를 닮아가며 산다. 틈틈이 안초산을 산책하며 나무들과 대화를 나누노라면 마음이 편안하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다 오랜 친구처럼 친근하고 편안하다.
어쩌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섶에 작은 꽃나무를 보면 밟히거나 다칠까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주변의 돌을 가져다가 주위에 돌담을 쌓아 울타리를 쳐준다. 옆으로 길을 넓혀주고, 내가 마실 생수도 부어준다. 몇 년을 오르내리다 보니 이미 모두가 가족이다. 지나칠 때마다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눈다.
이곳 제2의 고향, 안초산 자락에 터전을 잡은 지는 벌써 삼십여 년이 되었다. 거리에 나설 때마다 북한산 인수봉이 손짓을 하고, 거실에서는 이웃과 백운대가 창문을 통해 반긴다. 동네가 처음부터 어릴 때 고향 같은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사는 이 동네를 사랑하고,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앞으로도 내 삶이 다하는 날까지 살다가, 마치 나무가 대지에 뿌리를 내리듯, 이 동네에 뼈를 묻겠다는 생각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정년을 마치고 왔어도 늦지 않았을 텐데. 내 자신이 너무 일찍 이곳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잘못된 결정이다. 생각하기 싫지만 경제적으로 보면 얼마나 바보짓을 했는지 후회스럽다. 거기에다 분당과 판교로 출가한 딸들이 가까운 곳으로 이사 오라고 보챈다. 하지만 여기를 쉽게 떠날 것 같지는 않다. 그 이유는 바로 이곳 아름다운 녹지 환경을 처절한 몸부림으로 지켜내며, 내 스스로가 공원의 분신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예전에 DJ정부가 들어서면서 많은 공약이 앞 다투어 시행되었다. 그중 하나가 일부 그린벨트지역의 해제였다. 그 바람이 평온하게 살고 있던 우리 마을에도 불어 닥쳤다. 그동안 우리 집 정원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던 안초산 자락에, 갑자기 체육시설이 들어선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법적으로 묶여있던 그린벨트 내에 최소의 공공시설 건립이 허용된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도로 변에 3층 건물로 수영장과 헬스클럽이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그 정도는 환영할 만 했다. 인근에 헬스 센터가 생긴다는 것은 크게 나쁠 것이 없었다. 얼마 후 반장이 소문으로만 들리던 내용을 활자화한 주민 동의서를 들고 가가호호 서명을 받았다. 주민들은 거의가 기꺼이 서명하였다. 선의의 피해자인 녹지 소유주에 대한 연민의 정과 일말의 미안함도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가 바뀌자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동의서 내용이 둔갑하여 엉뚱한 사태가 벌어졌다. 헬스 센터가 골프연습장으로 둔갑하여 당국의 인가가 났다. 펜스가 쳐지고 황무지 개발 같은 무자비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근린 생활공간에 골프연습장이 들어설 수 없음은 상식이다. 법적으로 문외한인 사람도 알만한 사실이다. 주민의 터전임은 물론, 울타리를 경계로 ㅊ중학교와 ㅊ초등학교가 인접해 있다. 거기에 300미터 거리에 다른 골프연습장이 이미 운영되고 있다. 그러니 골프연습장 건립 허가는 그야말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후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인가를 해준 공무원은 감사원의 지적과 함께 시정 공고를 받았다. 하지만 시정은 이행되지 않았다. 해당 공무원은 서울시청으로 영전하였고, 얼마 동안 근무하다가 정년을 마쳤다.
사업주는 법적 권리를 주장하며 공사를 강행하였다. 주민들은 법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대법원까지 항소가 이어졌고, 법원은 업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판결문의 95%는 주민의 주장을 인용하면서도, 마지막 결론은 이미 인가 받은 업자의 권리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법정의 긴 싸움에서 억대의 수임료를 받는 변호사와 몇 백만 원의 국선 변호사와의 싸움은 이미 결론이 나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파트 부녀회를 중심으로 골프연습장 추진 반대위원회가 결성되고, 부녀회장을 중심으로 주민들의 처절한 투쟁이 이어졌다. 아파트 외각에 '골프장 건설 추진 반대'를 분명히 하는 현수막을 제작하여 간선 도로변에 걸었다. 수시로 주민 전체회의를 개최하며 정보를 나누며 행동에 옮겼다. 시청, 구청은 물론, 교육청 및 인근 학교 등 유관기관을 방문해 주민들의 의견을 전하고 시정을 요청하였다. 야간에 거리로 나가 촛불 행진을 하고 환경평가위원을 개별적으로 만나 자문을 받았다. 공사 현장 앞에 텐트를 치고 24시간 감시체제에 돌입하기도 하였다. 회사에서 동원한 용역회사의 등치 좋은 검은 양복의 사람들과 숱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잊을 수 없는 어제〉
그러던 어느 날 골프연습장 관련 많은 자료와 기록 사진을 저장했던 컴퓨터 파일이 바이러스로 날아갔었다. 여간 낙담이 큰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한번 제대로 정리해 보겠다고 벼르던 것이어서 아쉽기 그지없었는데, 다행이도 '아주 작은 기록 하나'가 usb 하나에 사진과 함께 남아 있어서 큰 위안이 되었다. 이 자체만으로도 타임캡슐의 내용물로 손색이 없는 홈런타자 4호였다.
오늘의 공원은 십 몇 년의 진통 끝에 배꽃 향기 그윽하던 동산에 새롭게 조성된 것이다. 이는, 관의 비호 아래 세워지는 골프연습장 건설을 저지하는 데모만 7~8년, 주민들의 처절하고 끈질긴 몸부림으로 되돌린 결실이다. 하지만 '생태'라는 수식어를 앞세운 공원은 그저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도심의 평범한 공원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살려달라고 외치던 아름드리나무들은 뿌리 채 뽑혀 보이지 않는다. 참담했던 당시의 천막과 현수막 사진이 타임캡슐의 5호 내용물이 될 것이다.
마침내 2012년 4월 6일, 고대하던 '생태공원'의 준공식이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서울시장과 구청장의 축사는 결과의 포장에만 장황했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없었다. 오늘이 있기까지 주민들의 가슴 찢어지는 심적 고통은 안중에 없었다. 박수를 치는 주민들의 손길에 힘이 없었다. 뒤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이러려고 우리가 그렇게 긴 싸움을 했던 건가!"
먼발치에서 행사를 지켜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겪지 않아도 좋을 갈등으로 서로 부딪치고, 시간을 빼앗겼는가. 얼마나 많은 예산이 낭비되었는가. 똑같은 실수를 또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되는데. 시행착오를 통해 교훈을 배워야 하는데.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특히 후대를 위해서라도, 기록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자체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교훈 말이다.
유관기관에 자문을 구하고 협조를 구했지만, 가장 실망스러웠던 곳은 교육기관이었다. ㅊ중학교와 ㅊ초등학교가 골프연습장 반대의 제1선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학교의 책임자들이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면담 성사조차도 쉽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글짓기와 그림을 통해서 환경 교육을 하고, 그 뜻을 서울시나 구청에 전달한다면 효과가 클 텐데 무슨 이유인지 몸을 사렸다.
당시 서울시 북부교육청에도 ㅊ초‧중학교 인근의 골프장 설치로 인한 타구 소음에 따른 집중력 저해 등 수업 방해와 늘어날 교통 체증과 사고 위험에 대한 예방책에 대해 질의를 하였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학생들의 학습권 피해예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는 형식적이고 무책임한 답변이 전부였다.
이러한 자료들 또한 타임캡슐에 보관할 6호의 목록이다. 타임캡슐도 좋지만, 교육청과 학교를 운운하다 보니 세계를 놀라게 한 파키스탄의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떠오른다. 말랄라는 탈레반의 총탄에 맞서며 17세의 나이에 여성인권 사각지대인 이슬람권에서 여성의 교육 받을 권리를 목숨 걸고 사수하여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한편, 만 17세의 스웨덴의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는 전 세계적인 기후 관련 동맹휴학 운동을 이끈 인물로 2019년 타임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다. 툰베리는 작년 4월 22일 '지구의 날' 50주년을 기념해 열린 UN총회 기후행동정상회의에서 연설을 한 바, 우리 청소년 교육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미 들어본 적이 있겠지만, 다시 한 번 새겨보아도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와 기후변화라는 두 가지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기후변화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감염증 만큼이나 심각한 문제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가 확실하게 알려준 것은, 우리 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좋든 싫든 세계는 몇 달 전과 확연히 다르게 변했습니다. 다시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므로 이제 새로운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정신 차리고 변화해야 할 때입니다."
〈후대에 빌려 쓰는 자연〉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에서 확인된 분명한 사실은, 그 원인이 자연파괴에서 기인하였다는 것이다. 먼 동굴 속 깊은 곳, 박쥐의 서식지가 파괴되며 서로의 성역이 무너진 탓이다. 그 경계선을 누가 허물었는가, 인간의 자승자박이 아닌가. 툰베리가 말하는 새로운 길은 너무나 평범한 데 있다. 우리가 지금껏 배운 과오의 교훈을 한마음으로 실천하는 길이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우리가 후대에게 잠시 빌려 쓰는 것일 뿐"이라는 박경리 선생의 말씀과 삶이 떠오른다. 오늘을 아끼고 아끼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자연에 떳떳하고, 후대에 부끄럽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유지하는 자세와 노력을 활자로 남겨놓아야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겠지만, 그래야 후대들이 고마워하고 원망을 덜하지 않을까. 이러한 자세를 후손이 물려가며 전한다면 세상이 보다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그렇게 '온고이지신'이 이루어지리라.
혼자서, 또는 손을 잡고, 유모차를 밀고, 강아지를 데리고 삼삼오오 공원을 찾는 수많은 발걸음들이 한번쯤 멈추어 공원의 아팠던 과거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지금도 공원 내 대형주차장을 동반한 목재문화 체험 공방, 정원학교 설립 등 크고 작은 문제가 속출되고 진행 중이다. 상처를 어루만지며 장기적인 안목에서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내 집 정원에서처럼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를 아끼고, 휴지 한 장 버리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시민의식이 빛나고, 어제의 지난한 문제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위정자의 미래지향적 가치가 빛을 발하는 공원을 꿈꾼다. 나는 언젠가 숲길에서 내 발에 차였던 솔방울들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들은 마치 나무들 하나하나가 떨어뜨린, 미래를 향한 그들의 간절한 마음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것들도 타임캡슐에 넣고 싶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지만 가까이에서 생태공원을 마음으로 아끼고 몸으로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우리의 자부심'이라는 헌시를 기쁨으로 지어 바치기로 한다. 공원 한쪽에 시화전을 위한 상설 전시장을 꾸며, 아름다운 자연과 공원을 노래하는 감동의 시들을 함께 전시했으면 하는 바람도 갖는다. 몇 밤의 궁리 끝에 기쁨으로 태어날 헌시는 타임캡슐에 넣을 럭키 세븐, 행운의 7호가 될 것이다.
아니, 가능하다면 동네 주민의 이름으로 쓴 헌시가 '숲공원' 개원 만 10주년이 되는 날 공원 안내판 옆에 나란히 걸개의 형식으로 소박하게 소개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헌시) 〈우리 공원의 자부심〉
여기 주민의 아름다운 공원이 있습니다.
눈물과 땀과 함성으로 지어진 '꿈꾸는 공원'입니다.
1. after
온갖 풀꽃 꽃나무가 철철이 옷 갈아입고
귀한 새들 찾아와 동네의 아침을 깨우고
광장에 전망 데크 생태연못에 잣나무 숲
여름엔 발 담글 수 있는 물길도 흐릅니다
유모차 아가들이 산책로 드라이브하고
온 동네 아이들이 까르르 뛰어놀고
어르신들 잔디밭에서 손주 자랑 펼치고
강아지가 사람 가족을 끌고 다닙니다
하지만 공원이 진짜 아름다운 이유는
주민의 뿌듯한 자부심이 서려있음에
주민의 주민에 의한 공원이어서 입니다
땅바닥을 지켜온 잔디가 산 증인입니다
1. before
업자와 담당자의 결탁이 만든 이권은
학교 근처는 금한다는 법을 초월하여
밤사이에 철탑을 높게 세워 올립니다
주민 후생 위한 골프연습장이라면서요
자라는 아이들에게 숲을 물려주고 싶다!
동네의 허파를 살리자 안초산을 살리자!
새들 노래 소리 맹꽁이 소리 듣고 싶다!
스러진 나무들의 울부짖음을 기억합니다
8년 가까이 주민이 업자와 몸싸움하고
대법원까지 법으로 투쟁을 벌였지만
일단 허가 난 업자는 보호한다 합니다
그동안 아름드리나무들은 죽어갔지요
개장 10주년에 붙여
숲을 사랑하는 주민들의 함성으로 지켜낸 우리들의 공원
자랑스러눈 공원, ‛숲소리 공원, 꿈꾸는 공원' 영원하여라!
2022. 4. 6.
자랑스러운 주민 일동
x x x
숲정원을 거닐다 내가 눈여겨 본 큰 나무 하나가 있다. 만일 생태공원 입간판 아래에 타임캡슐을 묻을 수 없다면, 그 나무 아래에 꼭 타임캡슐을 묻고 싶다. 그리고 나무 둥치에 손을 대고 나무에게 속삭이리라, 내가 숨을 거둔 뒤라도 네가 숲이 되고 그렇게 우리의 미래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언제 타임캡슐이 개봉될까. 누가 이 이야기를 읽을까. 그 때는 공원이 어떻게 변해 있을까. 또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해 있을까.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에 누군가 타임캡슐을 열었을 때, 내가 넣어둔 물건들을 보게 된다면 그것들은 마치 어린 시절 보물찾기를 한 기쁨이 되어, 숲정원의 몇 십 년 전 전설로 피어올라 사람들의 뇌리에 오래 기억되지 않을까. 그러면 내 소망의 등은 미래의 꿈꾸는 숲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고 밝게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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