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논픽션 부문 '88올림픽과 나' - 김종석

입력 2021-07-21 06:30:00

김종석
김종석

〈글을 쓰면서〉

잠실벌에 달아올랐던 올림픽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는 1988년의 가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SLOOC)로부터 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88올림픽 육상경기장을 만든 기술자의 이름과 국적을 말씀해주실까요?"

"한국의 김○○입니다."

"아니요, 감독한 사람 말고 직접 시공한 외국인 기술자 말입니다."

"순수한 한국의 기술로 만들었는데 무슨 말씀인가요?"

"외국사람이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외국인은 한 사람도 동원되지 않았습니다."

"올림픽 백서에 기록하려는데 사실대로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우리 기술로 애써 만든 경기장을 외국사람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참 기가 막힌다. 몇 차례 반복해서 설명을 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이 전화는 결국 끊어져 버리고 다시는 걸려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스스로를 낮추고 과소평가하거나 우리 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특이하고 앞서가는 것을 보면 외국산이라고 서둘러 단정해 버린다. 이것은 겸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올림픽경기장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관심과 이권이 걸려있기 때문에 우리 손으로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IOC의 간섭을 받아야 하고 국내외 언론과 체육인의 방해까지 가세하였다. 경험도 없는 일을 무리하게 강행하다가 올림픽대회를 망칠 수도 있으니 시공경험이 있는 외국인에게 경기장 건설을 맡기라고 야단이다. IOC의 반대, 언론과 체육인의 방해, 기능 인력의 부족 등으로 나는 불안과 긴장 속에서 시달려야만 했다. 무쇠의 몸도 견디지 못할 고통과 시련을 겪다보니 일이 끝날 쯤에는 나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을 때에 조직위원회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일을 시작할 때부터 기술자인 나에게 하늘이 내린 소명(召命)이라 생각하고 사명감으로 일하였다 어려운 난관을 뚫고 필성(必成)의 신념으로 몸을 던져 일군 결과이다. 일은 일꾼이 하고, 그 결과는 정부가 홍보하고, 실상은 언론이 알려야 한다. 그런데 일을 시작할 때에는 그렇게도 불가능하다고 방해만을 일삼던 국내의 언론은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둔 뒤에는 침묵하였고 정부산하조직인 SLOOC는 외국인 기술자 운운하였다.

육상경기장의 평가는 경기에서 얼마나 신기록을 내느냐에 달려있다. 달리는 패션으로 불리는 미국의 여자선수 조이너스는 100미터에서 세계신기록을 내고난 뒤 바닥에 입을 맞추면서 경기장에 고마움을 표했다. 또 '도핑테스트'에서 실격당하기는 했지만 캐나다의 벤 존슨도 올림픽기록을 갱신하였다. 매스컴은 100미터 경기에서 남녀 모두 신기록을 세웠다고만 보도하였다. 이 경기장이 국내기술로 만들어졌다고 알렸으면 국위선양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인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나라는 88올림픽을 통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세계열강의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지정학적 열세를 극복하고 인류의 미래로 비상하여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없는 것도 만들어서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나라들에 비해 한국은 있는 것도 묻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어렵사리 이룩한 실적을 외국의 것으로 돌려버리려는 어처구니없는 일은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거나 역사기록에 누락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이제는 우리 것의 소중함도 그리고 그 우수성도 찾고 보전할 때가 되었다.

올림픽경기장을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 작은 일로 생각될지는 몰라도 내 힘으로 이루고 말겠다는 불굴의 의지와 신념만은 그 무엇에도 뒤지지 않았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책임을 느낀다. 잃었던 건강을 되찾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마무리해야 할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올림픽경기장을 만들면서 겪었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 함께 공유하고 싶다.

〈올림픽유치와 나의 각오〉

제24회 올림픽대회의 개최지가 서울로 결정되는 순간, TV를 지켜보는 많은 국민들은 기쁨과 환호의 도가니 속에 빠져들었다. 나고야와의 경합에서 열세를 보이다가 막판에 뒤집는 이변에 모두들 놀랐다. 한국인의 끈기와 저력이 만들어 낸 노력의 결과이다. 올림픽대회 유치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애를 썼지만 특히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노력은 대단하였다. 올림픽대회를 개최하여 얻는 경제적인 효과는 물론 국격을 높이고 한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6.25 전쟁으로 피폐해진 잿더미 속에서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거듭하여, 이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기회가 되었다.

대통령은 올림픽과 관련되는 산업의 육성과 발전을 위해 경기에 쓰이는 용품과 경기장 시설을 국산화하고 올림픽을 통해 기술한국의 기치를 높이 들고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올림픽은 단군 이래 처음으로 이 땅에 유치된 인류의 제전이다. 국민 모두가 제각기 맡은바 일에 열중하고 역할을 분담하여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우리 국민은 옛날부터 나라에 일이 생기면 자진해서 많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나섰다. 외침을 받으면 스님들이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고 아낙네들까지도 행주치마를 두르고 돌을 날라 외적을 물리쳤다.

올림픽대회의 서울유치가 발표되었을 때, 나는 합성수지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회사의 연구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국민이자 기술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땅이 낳아주고 길러준 은혜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기술자의 본분이고 하늘이 나에게 내린 소명이라 생각하고 88올림픽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곰곰이 찾아보았다. 마침 내가 연구하고 있던 것이 '폴리우레탄 엘라스토머'였다. 이 재료가 전천후 육상경기장에 사용된다는 기술문헌이 있었기에 올림픽육상경기장을 내손으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88올림픽은 내 인생에 큰 획을 그은 대 전환점이었다. 고분자화학에서 토목으로, 연구실에서 공사현장으로 하는 일과 환경이 바뀌는 변화의 물결이었다. 서둘러 필요한 기술 자료를 수집하고 빈틈없는 시공을 위한 체제를 갖추기에 바빴다.

일정한 길이를 얼마나 빠르게, 높게 그리고 멀리, 뛰고, 던지느냐를 겨루는 시합이 육상경기이다. 그러기에 길이가 생명이다. 길이의 허용오차가 4만분의1 이하이다. 또한 전천후 경기장이므로 비가 올 때는 표면으로 물이 잘 빠져야 한다. 작은 구배를 유지하면서 표면배수가 되어야 한다. 한 군데도 물이 고이는 곳이 있어서는 안 된다. 표면 구배의 허용오차는 1000분의 1이하이다.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기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능이다. 사용한 재료의 품질과 시공기술에 따라 성능이 좌우되는 정밀시공이다.

과거에는 올림픽이 열리는 육상경기장은 흙바닥이었다. 육상경기는 바깥에서 열리는 경기이므로 대회기간 중에 비가 오면 경기장 바닥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서 경기가 어렵게 된다. 그렇다고 많은 비용을 들여 개최하는 대회를 취소하거나 연기할 수도 없기 때문에 날씨와 관계없이 경기를 진행할 수 있는 대안으로 고안된 것이 전천후 육상경기장(all weather track)이다. 가능한 한 흙바닥의 조건에 맞춰 경기장의 기능을 최대한 살리면서 기후변화에 상관없이 경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육상경기장의 성능은 얼마나 경기력을 올릴 수 있느냐에 따라 판가름이 난다. 경기력의 향상은 경기 중에 바닥에서 생기는 반발탄성을 운동역학적으로 응용하는 고도의 이론과 기술이 필요하다.

전천후육상경기장은 1980년대만 해도 시공기술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미국과 독일 두 나라 뿐이었다. 한국이 독자의 기술로 경기장을 만들겠다고 하니 여기저기서 반대가 많았다. 가장 큰 벽은 IOC의 반대였다. IOC는 자기들이 추천하는 대로 경기장을 만들 것을 고집하고 이를 종용하였다. 어느 날 IOC에서 SLOOC에 보내온 전문은 '한국이 IOC의 요구에 불응하여 올림픽경기장을 국내기술로 만드는 것을 고집할 경우, 88올림픽대회의 서울개최권을 박탈하고 다른 나라로 장소를 바꾸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이것은 횡포이다.

〈경기장 국산화를 건의하다〉

육상경기장 국산화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시청을 먼저 노크했다. 우리는 힘이 없으니 상급기관에 가서 상의하라고 발뺌을 한다. IOC의 반대를 의식한 것이다 도리 없이 국무총리실을 찾기로 하고 유창순 국무총리 앞으로 보내는 건의서를 준비하였다.

나는 회사에 들어온 이후, 연구실에서 줄곧 근무하였기 때문에 관청에 출입하는 경험이 전혀 없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다. 미리 설명을 듣고 긴장된 마음으로 건의서를 들고 중앙청으로 가서 서류를 접수하였다. 며칠 후 총리실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행정조정실장실로 오라고 한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비서관의 안내로 행조실장을 만나보니 이웃집 아저씨 같은 분이었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소신을 말했다. "저는 고분자화학을 공부하고 있는 순진한 기술자입니다. 올림픽경기장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목숨을 걸고 성공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경기장을 미리 만들어서 86아시안 게임에 써보고 아시아 육상인 들의 평을 받아서 올림픽경기장으로 쓸 수 있는지 면밀히 검토한 다음, 만약에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나올 때는 저희 회사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여 경기장을 철거하고 IOC가 지정하는 대로 재시공 하겠다는 조건으로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IOC는 반대할 명분이 없어지고 한국정부도 위험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만든 경기장을 철거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나의 진지하고 결의에 찬 말을 끝까지 듣고 난 행조실장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정부를 대표하는 88올림픽 실무준비위원장입니다. 올림픽이 처음 열리는 것이라서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지 걱정하고 있는 중인데 경기장 준비의 대안을 일러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라고 하면서 비서관을 불렀다.

"비서관, 이분 얼굴을 잘 보고 기억하세요. 앞으로 이분이 찾아오면 나를 꼭 만나고 가도록 해주세요." 기상천외의 말이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비서관이 나가고 난 뒤 행조실장은 보다 다정한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외람된 말이지만 내가 세종대왕이라면 당신은 이름도 비슷하니 김종서 장군 하세요. 세종대왕은 김종서와 같은 충신을 두었기에 훌륭한 일을 많이 하여 성군이 될 수 있었고, 김종서 역시 세종대왕 같은 성군을 모셨기에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 장군이 되었습니다. 우리 함께 국가를 위해 힘을 모읍시다."라고 말했다. 나는 과분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이 일이 성사되면 몸이 어스러지도록 일해야겠다는 결심과 각오가 앞선다.

〈반대를 무릅쓰고〉

올림픽경기장의 국산화작업이 총리실을 통해 행정적인 절차를 밟고 있는 동안, 각계에서반대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었다. 국내에서 가장 심하게 반발하는 곳은 체육계이다. 여기에 편승하여 매스컴의 풀무질은 도를 넘었다. 한국의 기술수준이 어디쯤 와 있고, 우리의 기술로서 가능한 일인지는 알아볼 생각조차도 않고 해보지도 않은 일을 못한다고 반대만을 일삼고 있었다. 나는 이들을 설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수없이 설명회를 열어 우리기술로서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역설하여 반대의 아우성을 잠재우기에 바빴다.

총리실을 처음 들어갈 때의 두렵고 망설여지던 나의 수줍음도 일의 어려움 앞에서는 눈 녹듯 없어져버리고 어디서 생겼는지 백절불굴의 투지와 용기가 샘솟듯 일어났다. 마치 열여덟 처녀의 수줍음이 40대 장사꾼 아줌마의 용기와 뱃심으로 변해 버린 것 같다. 여러 사람 앞에서는 말하기를 주저하던 숙맥이 원고도 없이 청중을 사로잡는 설득력도 생겨났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 직원이 마치 신들린 사람 같았다고 뒤에 술회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못 되는데. 내 자신도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하나의 돌파구를 마련해서 총리실과 청와대에 건의하여 해결방안을 찾았다.

말로서만 "할 수 있다. 한국의 기술로 가능하다."는 탁상공론 대신에 전국에 2개 이상의 경기장을 샘플로 만들어서 실제 한국기술로 가능한 것을 보여주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반대여론이 가라앉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가는 기미가 보일 때, 정부고위층과 체육계인사가 모인 자리에서 현황브리핑을 가졌다. 기술적인 내용설명과 한국기술로 올림픽 경기장 건설이 가능하다고 설명한 뒤, 한강의 기적은 잘못된 표현이라는 요지의 말을 곁들였다.

"6.25 전쟁 때 종군기자였던 캐나다인이 <한국의 발전상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한국 사람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6.25 때 한국을 도우러 온 유엔군은 두 적과 맞서 싸웠습니다. 하나는 북한의 정규 공산군이고 또 하나는 놀랍게도 한국민이었습니다. 화력이 우수한 유엔군은 공산군과의 전쟁보다 이들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더 괴롭고 어려웠습니다. 전쟁의 혼란 속에 살길이 막연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려야만 했습니다. 먹고 입을 것을 구하기 위해 유엔군이 주둔한 병영기지에 구름 같이 몰려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용하게도 군속으로 취직이 되어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호구지책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유엔군은 모든 출전 준비를 다 갖추고 다음날 전투를 계획하고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사이 병기가 귀신도 모르게 없어진 것입니다.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투에 지고 마는 낭패를 맛보았습니다. 한국 사람의 신출귀몰한 머리를 유엔군이 당하지를 못하고 한국민과의 두뇌전쟁에서 형편없이 지고 말았습니다. 전쟁의 포화는 멈추고 휴전이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계획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렇게도 유엔군을 괴롭히던 그 머리가 이제는 경제개발현장으로 호구지책을 찾아 모여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세계는 이것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표현 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기적이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일어나야 하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국사람을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유엔군을 놀라게 만든 그때의 우리들 머리가 만들어낸 하나의 걸작품입니다. 한국사람 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불가능을 모르는 민족입니다.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제철소가 그러했고 자동차, 조선소가 그러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그들은 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온 세계가 안 된다고 말한 것을 한국은 해내고야 말았지 않습니까?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 정도를 한국기술로 못 만든다고 하는 말은 어디다 근거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이 정도의 기술은 한국이 해내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88올림픽대회를 앞두고 3개의 나라에서 올림픽육상경기장을 무상으로 만들어 줄 것을 한국정부에 제의해 왔습니다. 우리의 자존심에 손상이 가는 말입니다. 저는 6.25동란 때, 유엔군이 주둔하는 김해공항 근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낙동강 강둑에 소를 몰고 가서 풀을 먹이며 친구들과 노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강둑을 따라 있는 도로에 멀리서 유엔군 스리쿼터가 달려오면 우리 어린이들은 손을 흔들며 열열이 환영한 후 차가 지나가고 난 뒤 앞이 보이지 않는 먼지 속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았습니다. 유엔군이 던지고 간 씨레이션을 찾기 위해서 입니다. 어떤 흑인은 차를 멈추고 우리들과 잠시 놀다 갑니다. "할로 주잉감 기부미(hello, chewing gum give me)" 입을 가리키며 형들로부터 배운 엉터리 영어를 하면서 흑인이 씹고 있는 껌까지도 얻어먹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씨레이션'을 던져주던 유엔군이 전쟁이 끝나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사업가가 되어 다시 이 땅에 와서는 그 때 씨레이션을 던지던 기분으로 공짜로 경기장을 만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유 없는 공짜가 어디 있겠습니까?> 올림픽메인스타디움의 시공실적을 가지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그 메리트를 우리가 가져야하고 이 기회에 발전된 한국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먼지 속에서 던져주는 씨레이션을 받아먹던 나라가 이제는 아니라는 것을 꼭 보여주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브리핑을 마무리 하였다.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첫 삽을 뜨다〉

한바탕 부산을 떨던 여론은 샘플 경기장을 만들어 우리의 솜씨를 보여주겠다는 나의 제의에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한시 바삐 전열을 가다듬어 공사에 임할 준비를 했다. 건설면허를 구비한 후 공사 장비를 갖추고 일할 사람을 모집하여 새로운 진용을 짜고 나니 내 자신이 막노동꾼이 된 기분이다. 연구실에서 연구에만 몰두하던 일이 옛날이 되어버렸다. 마치 삭발을 하고 출가하는 비구니 스님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총리실의 권고로 대구에 급히 내려갔다. 대구시민운동장의 바닥을 개조하여 전천후 육상경기장으로 만드는 일에 참여하기 위해서이다. 대구의 대영건설이 원청공사를 맡아서 전문시공자를 찾고 있었다. 이미 독일회사가 대구에 있는 에젠트를 앞세워 입김을 넣고 있었다. 뒤늦게 한판 끼어드는 입장에다가 서울에서 내려갔으니 텃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육척 장신의 거구에 주먹이 솥뚜껑만한 깡패 녀석이 노골적으로 폭언을 쓰고 폭력을 휘두르며 포기할 것을 강요한다. 공사판이 이런 걸 미리 들어서 알고 있는 터라 여기서 밀리면 아무것도 안되겠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주먹이면 주먹, 기술적인 능력이면 능력, 어느 것이라도 좋으니 한번 해보자고 맞받아쳤다. 혈혈단신으로 사즉필생의 처절한 경쟁 끝에 결국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결국 기초바닥 콘크리트는 원청회사인 대영건설이 직영하고 전천후포장재의 포설과 전체적인 기술 감리를 우리가 맡기로 하고 하청계약을 체결하였다.

가운을 벗고 대구로 내려갔을 때, 처음에는 황량하고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국산화에 반대하는 것은 비단 체육인과 언론만이 아니었다. 놀라운 것은 적극적이어야 할 회사가 극력 반대를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시공경험이 없어서 성공할 확률이 적고 실패하면 회사가 곤경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가죽은 탐이 나는데 범의 발톱이 무서운 것이다. 안 된다는 결론으로 보면 회사의 말이 맞다. 할 수 있다는 말은 나 혼자 밖에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를 미친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 회장을 포함해서 모두들 관심이 없다. 도울 생각도, 돕는 사람도 없다. 혼자서 하다가 살아서 돌아오면 내 자식으로 인정하겠다는 식이다. 스프링은 누르면 누를수록 위로 튄다. 반대를 하면 할수록 내 마음은 굳어만 갔다. 뼈를 깎는 아픔이 있더라도 꼭 이 일은 내 손으로 해내고 말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회사의 지원은 전무한 상태이다. 기동성이 있어야할 공사현장에 차량한대 지원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잔일은 자전거를 준비하여 처리하였다. 한마디로 찬밥신세가 되었다.

포설기 대신 나무로 포설용 도구를 만들어서 공사를 하고 있는데 감독관인 운동장장이 한마디 한다. "독일사람들은 자동포설기(paving machine)를 가지고 공사를 한다고 하는데 일하는 걸 보니까 너무 원시적이다."라고 한다. 나는 이말을 받아서 즉시 장장에게 되물었다. "구두가 두 켤레 있는데 하나는 기계화이고 또 한 켤레는 수제화라면 같은 가격 일 때 장장님은 어느 구두를 고르시겠습니까?" "그거야 수제화를 고르지요."

"맞아요, 자동포설기는 적은 인력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률 위주의 장비이지 품질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품질은 손으로 꼼꼼하게 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포설기를 구비할 돈이 없어서 손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이해가 가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그것은 궁지에 몰린 나의 임기응변이었다. 회사에서는 반대를 하고 있으니 값비싼 포설기를 구비하는 것은 엄두도 못내는 일이었다. 바로가든 모로가든 무사하게 서울에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가는 방법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어려운 여건 속에서 천신만고 끝에 한국사람의 손에 의해 처음으로 제1종 전천후육상경기장이 탄생하게 되었다. 육상경기장은 대한육상 경기연맹의 공인 검사에 합격하여야 사용할 수 있고 경기의 기록이 공식적으로 인정이 된다. 공인검사를 나온 대한육상경기연맹의 김용덕 기술이사는 각 부분을 꼼꼼히 살펴보고는 우리 손으로 이런 훌륭한 경기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체육인의 한 사람으로 너무나 기쁘고 긍지를 느낀다고 말한다. 단 한 번의 검사로 합격판정을 받았다. 이것으로 1차적인 관문이 통과된 셈이다. 체육계도 만족하였다.

그제서야 회사는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었고 행조실장도 매우 기뻐했다. 경기장 공사에는 회사가 직접 생산한 고가의 합성수지재료만도 백 톤이 훨씬 넘어서 새로운 판매신장과 함께 올림픽을 통해 회사의 선전효과도 기대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회장은 물론 기뻐한 사람은 경리 부장이었다. 당시의 제조업은 물건을 팔아서 받는 물품 대는 거의가 약속어음으로 결제되는데 관공사는 모두가 현찰결제이다. 거기에다 공사 진도에 따라 선급금까지 받으니 자금난을 해소하는 데는 금상첨화이다. 돈도 벌고 자금난도 해결하고 명예까지 얻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니 회장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대구시민운동장의 공사로 인하여 구겨졌던 나의 회사 내 이미지는 확 달라져서 그 공로로 부장에서 승진하여 나는 그룹에서 최연소 이사가 되었다


〈전주공설운동장 공사〉

전주시청에서 연락이 왔다. 대구의 성공사례를 듣고 미리 시공업체를 마음에 두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샘플 시공의 효과가 이처럼 대단한 것에 놀랐다.

난생 처음으로 해보는 생소한 분야의 공사인지라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담당 공무원은 무척 반가워했다. 내역설계자료를 만들어주었더니 고맙다고 인사까지 한다. 금방이라도 계약이 이뤄질 것 같은 분위기다. 여관으로 돌아와서 며칠을 기다렸는데도 시청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다. 곧 결재를 받는 대로 연락을 하겠다고 했는데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다. 청사에 들어가서 담당 직원을 만났더니 한참을 망설이다가 천만 뜻밖의 말을 한다.

결재과정에서 도지사의 특별지시가 떨어져 일이 보류 되었다고 한다.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암초에 걸려버렸다. 이 정도 규모의 공사를 도지사가 직접 관여하는 일은 드문 일이다. 여러 사람을 통해 그 내막을 알아보니 참 어렵게 얽혀있었다. 1년 전에 광주의 무등경기장을 일본의 회사가 시공하였는데 전남도청에서 전북지사에게 시공업체를 소개한 것이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도지사를 만났다. 전북지사는 김제 사람으로 육사 8기생이다. 마침, 그룹에 임원 한 사람이 육사 8기생이 있어서 도움을 청하여 함께 만나 보았으나 점잖게 거절당하였다. 속된 말로 손톱도 안 들어간다. 눌러진 스프링이 또 다시 튀어 오르기 시작한다. 지사와 단판을 지을 생각으로 지사관사로 찾아가기로 했다. 지사가 출근하기 전에 아침 식사시간에 맞춰 가기로 했다. 식사시간을 이용하면 좀 심한 말을 해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하는 계산에서 이다. 예정시간에 맞춰서 관사에 도착하였다. 아침부터 불청객이 들이닥치니 다소 의아한 표정이지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식사를 준비하던 사모님이 "아직 식사 전이지요?" 하면서 같이 상을 차린다. 지사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나는 요점을 간추려서 짧은 시간에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했다.

"지사님, 저는 지금 대통령의 국산화 시책에 따라 올림픽경기장을 우리 손으로 만들기 위해 총리실을 통해 건의서를 제출하고 그 가능성을 입증시키기 위해 대구에 샘플경기장을 시공하여 체육계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외국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올림픽경기장을 우리기술로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전주가 나서 주십시오. 그 길이 대통령의 국산화지시에 따르고 나라를 위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우리와 감정이 많은 과거사를 가지고 있는 일본인에게 공사를 맡기는 것은 국민정서에 반하는 일이라 감히 말씀 드립니다." 지사님의 반응은 냉담했다. 기어이 일본에게 일을 맡기겠다는 것이다. 나는 드디어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는 국가관 하나는 철저하게 교육시키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지사님은 육군사관학교를 정식으로 졸업하신 게 맞습니까? 며칠 후에 전주 실내체육관에서 WBA 세계 복싱 타이틀의 한일전이 열리는데 지사님은 일본 선수를 응원하실 거지요? 우리나라에서 없어지지 않고 발전하고 있는 세 개의 단체모임이 있습니다. 해병대 전우회, 고대동창회, 호남향우회가 그것입니다. 우리 국민은 전라도 사람에게 하나는 꼭 배워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향을 생각하고 결집하는 애향심 말입니다. 가족 사랑하는 마음이 커져서 내 고향을 사랑하게 되고 그 애향심이 모여서 애국심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향을 사랑하고 국가와 민족을 누구보다 먼저 생각하시는 지사님, 제 청을 들어주십시오. 지사님의 앞날에 도움이 되도록 저도 일조를 하겠습니다."

듣거나 말거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실례를 무릅쓰고 생각나는 대로 말해 버리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관사를 빠져나왔다. 그 날 도 건설국장이 나를 찾았다.

"지사님이 대노하여 김 이사의 청사출입을 금지하라는 지시가 있습니다."

충격요법으로 지사를 움직이려던 나의 계획은 역효과를 내면서 수포로 돌아가는 듯 했다.시청 실무부서에 내려갔더니 이미 일본회사와 상담이 많이 진행된 상태 같았다. 나는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을 직감한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편치 않은 며칠을 보내고 있는데 총리실에서 연락이 왔다. 제1행정조정관의 전화이다.

"전주일은 잘되어가고 있지요?"

"잘되어 가다가 지사님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서 포기했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지금 당장 총리실로 들어와 주세요."

행정조정관은 도지사보다는 직급이 낮고 나이도 많이 아래인 고향 후배이다. 자초지종을 듣고는 내가 있는 앞에서 전북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사님 안녕하세요. 총리실입니다." 조정관은 지사와 평소에 잘 아는 사이 같았다.

"총리실에서는 대통령의 국산화 시책에 따라 경기장 국산화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주에서도 동참하시겠지요?"

"아직 국산기술을 믿을 수 없으니 전주는 위험부담을 안고는 따를 수 없습니다. 조정관께서 고향의 행사가 대과 없이 성공적으로 치러질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지요."

"저도 그런 점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국산화에 우리 전북이 앞장서야지요. 대구에서 좋은 평가가 나왔으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두 사람의 공방은 점점 심해가면서 서로의 음성이 커졌다. 조정관은 마지막으로 "총리실의 지시입니다. 국산으로 하세요."라고 잘라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김 이사, 오늘 당장 전주로 내려가세요. 그리고 그 결과를 급히 보고해주세요." 총리실과 도지사 사이에서 나는 난처한 입장이 되었지만 마음은 후련하였다.

〈오뚝이처럼 일어나다〉

총리실의 지시를 받고 급히 전주로 내려갔다. 먼저 시청을 들러서 그 동안의 진척 상황을 알아보았다. 지사의 열화 같은 지시에 따라 이미 일본회사와 계약이 체결되어 공사가 시작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지사를 만나야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냥 돌아서서 서울로 가려다가 총리실에 보고하는데도 필요하고 미련이라도 떨쳐 버릴 생각으로 그 동안 사이가 가까워진 담당자에게 공사계약서를 보여줄 것을 간청했다. 내 눈으로 직접 계약서를 확인하고 싶었다. 어렵사리 보여주는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 보던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랐다. 마지막에 있어야 될 시공자의 인감이 찍혀있지 않은 것이 아닌가. 천재일우의 기회이다. 계약 시에 인감을 잊고 온 것이다. 계약서의 날인을 뒤로 미루고 우선 일을 시작하고 있는 중에 내가 나타난 것이다. 하늘이 도운 일이다. 처음부터 우리가 일하기를 바라던 담당자에게 총리실의 지시사항을 귀띔하고 시공자의 날인을 보류해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부리나케 지사실로 달려갔다. 비서를 통해 내가 왔다는 말을 들은 지사는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대갈일성으로 고함을 지른다.

"나가시오. 당신은 보기도 싫소. 총리실에 가서 정치나 하고 다니는 당신이 기술자요?"

손가락질을 하면서 야단을 치는 지사의 뒤를 따라 나는 막무가내로 지사실로 밀치고 들어갔다. 펄펄 뛰는 지사를 모셔서 소파에 억지로 앉히면서 차근히 말했다.

"지사님, 노여움을 푸십시오. 저는 지사님을 괴롭힐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 총리실과 청와대는 국산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사님 혼자만 엇길을 걸으시고 있습니다. 저가 서울에 올라가서 정치한 적이 없습니다. 총리실에서 불러서 들어갔습니다. 제가 지사님 편에 서서 지사님을 돕겠습니다. 다시 한 번 다른 눈으로 저를 봐주십시오."

눈물을 글썽이면서 호소하는 저에게 지사는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말을 한다.

"늦었소, 이미 계약이 체결되었소."

"아닙니다. 저가 공사계약서를 확인했습니다. 아직 시공자가 인감을 찍지 않았습니다. 법적으로 효력이 없는 계약서입니다."

"그래요? 그런데 공사를 시작했는데."

"지금도 계약을 파기할 수 있습니다. 뒷수습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드디어 지사는 경기장 국산화를 지시하고 후선으로 물러났다. 다행히 작성한 계약서 2부를 모두 발주청이 보관 중이어서 계약취소는 간단 하지만 사전 공사를 묵인한 것 때문에 약간의 시비가 있었으나 그 비용을 지불하고 일을 매끄럽게 해결하였다. 기사회생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나는 오뚝이처럼 우뚝 서게 되었다.

서둘러 계약을 끝내고 공사에 들어갔다. 이제 공사에 지장을 주는 문제점도 없어지고 날씨도 좋아서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지사도 자주 현장에 들러서 진행과정을 지켜본다. 어느 날 엎드려서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지사가 웃으면서 작업하는 나를 보고 있다. 악수를 청하기에 붉은 재료가 묻은 손이라서 안 된다고 하니까. "그 재료, 나도 한번 묻혀보고 싶다."고 하면서 억지로 손을 잡는다. 처음의 매정하고 서먹하던 사이가 완전히 달라졌다. 공사현장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필사적으로 일하는 나를 보고 나의 진심을 읽었기 때문이다.

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는 어느 날, 운동장 주차장에 헬기 한 대가 날아와 앉았다. 이영호 체육부 장관과 정주영 대한 체육회장이 소년체전의 준비 상황을 살피러 온 것이다. 현장소장인 내가 두 분을 안내하여 공사 진행 상황을 설명하는데 뒤를 따르던 대한육상경기연맹 김용덕 기술이사가 "회장님, 저가 년 초에 독일에 출장을 가서 독일의 육상경기장을 전부 돌아보고 왔는데 이만한 운동장을 보지 못했습니다. 완공이 되면 스탠드의 수용인원을 빼고는 당장 올림픽을 개최해도 손색이 없습니다."라고 보고한다. 정 회장은 "수고합니다." 라고 하면서 나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옆에 서 있던 지사가 나를 쳐다보면서 "이 친구 처음에는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괴롭힐 때는 몹시 미웠는데 이제는 미움이 사랑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라는 말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렇게 숱한 문제점과 난항을 겪으면서 전주공설운동장은 성공적으로 만들어졌다. 우리가 만든 국산재료를 사용하여 외국의 손을 하나도 빌리지 않고 순수한 우리의 기술로서 만든 또 하나의 1종 전천후 육상경기장이 완성되었다.

〈전국소년체전이 열리고〉

83년 5월 21일, 전주공설 운동장에서 대통령 내외분이 참석한 가운데 제12회 전국소년체전이 성대하게 열렸다. 대통령은 하루 전에 미리 내려와서 업무보고를 받은 뒤 저녁에 만찬회를 가지고 지사 관사에서 하룻밤을 지낸 다음 날 개회식에 참석하였다. 관계자가 전해주는 말에 의하면 업무보고에서부터 만찬석에 이르기까지 전주 종합운동장에 대한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고 한다. 전북지사는 업무보고에서

"대통령 각하의 국산화시책에 따라 다소의 위험을 감소하고 경기장을 국내기술로 만들었더니 전 세계 어디서에도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경기장이라는 대한육상경기연맹의 평가를 얻었습니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은 스탠드의 수용능력을 제외하고는 당장 올림픽을 개최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이번에 경기장을 만들면서 국내기술의 우수성이 입증 되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대통령은 만면에 희색을 띄우며 수행관계관에게 전북지사와 같이 소신을 가지고 업무를 처리해야 된다고 강조하면서 올림픽경기장도 전주와 같이 국내기술로 만들 것을 검토하라고 지시하였다. 내가 처음부터 예상하고 바라던 그대로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나는 개회식에 초대되어 본부석에서 개회식 광경을 지켜보았다. 대통령내외분이 앉아 있는 탁자 위에는 내가 마련한 공사 때의 공정 사진첩이 놓여 있었다. 대통령이 수시로 그 사진첩을 펼쳐보는 모습을 가까운 거리에 앉아 보면서 나는 무한한 보람과 희열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렇게도 반대를 하면서 나를 홀대하던 지사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운동장공사로 인하여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일이 너무나 좋아 보였다. 지사는 소년체전이 끝나고 나서 보훈처장을 거쳐 노동부장관으로 승진하였다.

소년 체전이 끝나는 날, MBC의 이종성 기자가, 병석에 계셨던 아버님의 안부를 묻는다. "아버님은 그동안 건강이 회복되셔서 아들이 만든 운동장을 보시고 싶다기에 여기에 모셨습니다."고 했더니 카메라를 돌려 한 컷을 찍어 준다. 아들과 함께 TV카메라에 얼굴을 보이시면서 흐뭇해하시던 아버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제 공사도, 체전도 끝나고 전주를 떠나야하는데 소감이 어떠냐?"고 묻길래 나는 이렇게 말했다.

"문화와 예술의 도시, 전주에 와서 전주시민 내지는 전북 도민의 순박하고 진실함에 홀딱 반해서 여러분께서 들으시는 대로 이 무뚝뚝한 경상도 사투리의 사나이는 돌아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동안 보살피고 아껴주신 따뜻한 정을 제 가슴속에 오래오래 간직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이 말은 그냥 입버릇처럼 한 인사말이 아니다. 공사과정에서 느낀 그대로를 말한 것이다. 그 지방의 인심을 보려면 공사판에서 인부들을 일을 시켜 보면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지금도 전주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맞이한다.

다음날 서울로 떠나기에 앞서 인사차 도청에 들렀다. 마침 국장들과 회의를 마친 후여서 다들 같이 있었다.

"김소장, 서울 가지마소. 여기서 국회의원 나오면 틀림없소. 어제 TV인터뷰를 보고 우리국장들도 모두 다 이구동성이요."

"에이, 무슨 말씀을요. 저는 그런 거는 관심이 없습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요."

유종의 미를 거두고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그간의 경과를 회장님께 보고 드리고 한 가지 진언을 하였다.

"그 동안 전주시민과 지사님에게 심려도 많이 끼치고 또 전주에 사업체도 가지고 있으니 한번 인사를 가셔야겠습니다."고 했더니 흔쾌히 승낙하였다. 며칠 후 지사실과 미리 약속된 시간에 맞춰서 회장님 전용 벤츠를 타고 전주로 내려갔다. 난생 처음 타보는 벤츠는 굴러가는지 미끄러지는지 분간을 못하겠다. 회장님과 그간에 있었던 숨은 얘기를 나누다 보니 금방 전주에 도착했다.

지사는 몇 사람의 국장들과 함께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준다. 회장이 인사말을 한다.

"그동안 여러모로 보살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김 이사가 지사님을 많이 괴롭혔지요? 진작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몸이 불편하여 오지 못하다가 오늘 무리를 해서 내려와 지사님을 뵈니 아프던 병이 어디론가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는 말에 지사는

"오늘 회장님을 뵈니 큰 산 밑에 유명한 장수가 난다더니, 회장님 밑에 김 이사 같은 사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고 화답하고는 우리 회사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다. "회장님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이번의 공로를 인정하여 김 이사를 진급시켜 주십시오."라고 엉뚱한 부탁을 한다. 마치 나의 출세를 위해 회장과 지사를 만나게 한 것 같아서 좌불안석이 되어버렸다.

웃음 띈 얼굴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전북도청을 나섰다. 서울에 올라온 다음날 회장은 성급하게 나를 상무이사로 승진발령 하였다. 나는 강력하게 사양했다.

"회장님, 저는 일을 하는데 승진이 필요치 않습니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저를 이사로 그대로 두는 것이 일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동료들의 시기 질투를 염려한 말이다.

"아니야, 이번의 자네 승진은 나라가 시키는 것이니 여러 말 말고 받아드려야 한다. 내가 40여년 사업을 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다."고 하면서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이사가 된지 1년 만에 파격적으로 상무이사로 승진하였다.

〈잠실주경기장 공사〉

대구, 전주의 운동장을 차례로 만들면서 국내기술로도 충분히 올림픽경기장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입증되었다. 그렇게도 방해를 일삼던 반대여론은 봄볕에 눈 녹듯 가라앉고 IOC도 반대의 명분을 잃고 이성을 찾는 분위기가 되었다. 마치 태풍이 지나간 뒤의 맑은 하늘을 보는 기분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실감난다. 어제의 적군이 모두 우군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

전쟁터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수가 제집을 찾아가듯 아무런 저항도, 장해물도 없이 나는 자연스럽게 올림픽경기장을 만드는 주역이 되었다.

올림픽메인스타디움의 설계는 한국건축계의 1세대라 불리는 김수근의 공간연구소가 맡고, 공사는 공개경쟁입찰에 의해 대림건설로 결정되었다. 이조백자의 모형을 따서 설계한 올림픽메인스타디움의 설계도면에는 육상경기장 부분은 공백으로 있는 상태였다. 이 공백을 전천후육상경기장으로 꾸며서 채우는 작업은 나의 몫이었다. 공간사옥을 수없이 들락거리면서 공사에 필요한 설계도면을 완성하였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김수근은 올림픽메인스타디움을 설계한 직후 향년5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육상트랙을 설계, 시공한 나는 죽음직전까지 갈 정도로 오랜 동안 병마에 시달렸다. 남이 안하는 일을 하면 신이 노한다는 징크스일까. 사람들은 이를 두고 천기누설로 받는 형벌이라고도 하고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도 부른다.

올림픽메인스타디움의 공사는 서울시가 발주하여 대림건설이 일괄 도급하였다. 발주관청에 들락거릴 필요 없이 원청회사인 대림건설과 하청계약을 맺으면 그만이다. 수주과정에서 겪었던 번거로움이 줄어들게 된 것이다. 대림산업의 연락을 받고 임경빈 현장소장을 만났다. 오랜 시간 수주상담을 벌일 필요도 없이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이미 완료한 샘플시공단가를 적용하여 공사계약이 맺어졌다. 쉽게 그리고 너무나 간단하게 일이 처리 되어가니 불안을 느낄 정도였다.

계약이 끝나고 난 뒤 임 소장이 혼자말처럼 되뇌인다. "30년이 가깝도록 건설회사에 근무했지만 대통령이 하청업자를 정해주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인데.... !"

실제 실무적인 일을 해왔던 내 자신도 놀랄 정도로 나도 모르고 있는 사이에 감쪽같이 일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총리실의 올림픽경기장국산화에 대한 상신, 전북지사의 국산화성공사례보고와 소년체전에서 대통령이 직접 보고, 듣고, 확인한 것에 따라 내린 국가최고책임자로서의 결심이지 정실이나 청탁에 의해 이뤄진 일이 전혀 아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비뚤어진 관념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이번 일을 하면서 특히 느낀 점은 청와대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곳이라고 생각한 나의 고정관념과는 전혀 딴판이라는 것이다. 원리원칙만 내세우는 하급관청에 비해 대의명분만 있으면 일처리가 훨씬 쉽고 빠름을 보았다. 받아들이는 공무원의 자세부터가 다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이라면 약간의 규정을 비껴서라도 해결해 줄려는 열의와 적극성이 있었다. 물론 어두운 부분도 있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접한 청와대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대림건설로부터 잠실 주경기장과 보조경기장, 두 건의 공사를 수주하여 시공하게 되었다. 그간의 샘플시공을 통해 닦은 경험과 기술을 토대로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원청회사인 대림건설과는 호흡이 잘 맞았다. 바닥의 아스팔트포장공사는 표면배수구배와 평탄성이 생명이다.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내가 지적하는 대로 아무런 거부감 없이 수정하여 보완하면서 시공하였다. 누가 원청회사인지 하청회사인지 갑,을의 구분도 없이 한마음 한 몸이 되어 한곳에 올인 하였다. 대한육상경기연맹도 공사 도중에 하나하나씩 체크하면서 공정을 진행하였다. 모두다 올림픽경기장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춰서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였다.

이른 봄에 시작된 공사는 여름을 넘기면서 공기에 여유를 가지고 세심하게 다듬어져 1984년 9월에 공사를 마무리하여 준공되었다. 이로서 올림픽 역사상 3번째로 전천후올림픽육상경기장을 만드는 실적을 한국이 가지게 되었다. 하늘의 별을 딴 기분이다.

86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올림픽을 열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AGF)의 평가를 받았다. 실로 힘들었던 대장정이었다. 망망대해에서 파선된 널빤지 하나를 부여잡고 표류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조난자의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인생이 이런 것인가 보다, 피나는 노력 끝에 머리에 씌워지는 아폴론 신의 월계관, 이 희열의 순간을 얻기 위해 그 험한 준령을 넘어와서 지금 여기에 나는 서 있는 것이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뜻 깊은 일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희열의 산마루에서 지난날 내가 걸어왔던 험한 길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때는 괴롭기만 했던 순간들이지만 지나고 보니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다. 그 인고(忍苦)의 과정 속에 내가 있고 나의 삶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어떤 동물학자는 말한다. 먹이를 쫓는 사자는 얼룩말을 쫓을 때나 토끼 한 마리를 쫓을 때나 뒷다리에 주는 힘은 같다고 했다.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지혜를 모두 쏟아서 이룬 결과이다 .

〈병마와의 처절한 싸움〉

올림픽경기장이 성공리에 마무리되고 몸과 마음이 한가롭게 되니 기다렸다는 듯이 병마가 찾아온다. 이미 예상하고 각오는 하고 있었다. 병원에 가서 의사의 문진에 답하다 보니 증상이 30가지가 넘는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여론에 시달리면서 힘든 공사를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기가 빠져 병이 된 것이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우울증 보다 무서운 공황장애였다. 심한 스트레스와 압박감에서 생긴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병이다.

어느 날 거래처의 임원을 초대하여 식사를 하는데 아프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니 어김없이 컨디션이 나빠진다. 걱정하는 자체가 부담이 되어 병을 불러오게 된다. 이럴 때는 모든 일을 중단하고 혼자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 식사를 하다 말고 화장실에 가는 척 하고 자리를 빠져나와 식당주위를 배회하면서 불안을 가라앉힌다. 그러는 사이에 손님은 식사를 끝내고 일어나서 먼저 식대를 지불하고 나를 찾고 있다. 이만 저만한 실례가 아니다.

버스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가 없다. 가다가 불안을 느끼면 차를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을 떠올리면 영락없이 진통이 찾아온다. 한번은 버스를 타고 가다기 졸도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는 마음대로 갈 수 있는 택시나 자가용차만 이용하였다. 진통이 올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회사에서 회의를 하다가 말도 없이 사라진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우선 내가 살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회사에 출근하면 서둘러서 대충 결재를 끝내고 도망을 치듯 기사와 함께 차를 타고 하루 종일 헤맨다. 아무런 실적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으니 승진은커녕 해고당하지 않은 것만도 천만 다행이다. 상무이사를 13년간 달고 있었다.

월급쟁이는 몸이 자산이다. 몸이 망가지면 모든 것이 함께 망가지게 된다. 유명한 약방, 병원을 전전하면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았다. 민간요법도 공부하였다. 영험이 있다는 기도처를 다니면서 부처님께 빌어도 보았다. 수차례 구병시식(救病施食)도 받았다. 카이로프랙틱 이라는 생면부지의 물리치료, 요가, 단전호흡 등 좋다는 것은 모두 찾아서 해봤다.

국선도 단전호흡을 다니는데 원장이 단식을 권한다. 체질이 바뀌면서 웬만한 병은 낫는다는 말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단식을 하기로 작심했다. 예비 단식을 끝내고 본 단식에 들어가는 초기단계가 어려웠다. 생수만 마시면서 아침마다 1킬로미터의 야산을 오르내린다. 몸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난다. 빠져나가는 노폐물의 냄새라고 한다. 체내에 쌓인 수십 년간의 쓰레기가 모두 제거되는 기분이다. 병도 함께 나가는 기분이다. 단식을 시작할 때 일주일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우려는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편안해 지면서 여유가 생긴다. 나는 단식을 하는 동안 매일 회사에 출근하였다. 가능한 한 아프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기 싫었다. 원장은 아주 모범적인 단식이라고 한다. 21일 만에 단식을 끝냈으나 안타깝게도 병은 낫지 않았다.

병원에 가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한의사에게 침도 맞아보고 뜸, 한약도 많이 먹었으나 간에 부담만 될 뿐 효과가 없었다. 그나마 단전호흡과 참선이 좋았다. 새벽에 가까운 봉은사에 가서 참선기도를 하였다. 전국의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두루 찾아다녔다. 사자산법흥사와 오대산월정사, 정선정암사의 적멸보궁, 관음도량, 낙산사, 구인사....

한약방에서 흙 침대를 이용해보라고 권한다. 멀리 미아리에서 황토를 가져와서 작은 방에 조그마한 흙 침대를 손수 만들었다. 운이 나쁘면 만나는 사람마다 악연이고 하는 일마다 안 될 일만 한다고 한다. 정말 해서는 안 될 일이 흙 침대인 것을 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흙 침대를 사용하면서 불면증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더니 꿈자리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한다. 깊게 잠은 들지 않고 비몽사몽간에 눈만 감으면 요괴(妖怪)가 나타나서 괴롭힌다. 아내는 대낮에도 그 방을 보면 무섭다고 하소연한다. 급기야 수소문해서 흙을 파온 곳을 알아봤더니 과거에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참 기가 막히는 노릇이다. 주위에 알아보니 놀랍게도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도 옛날에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서둘러 집을 팔고 근처에 전셋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여러 가지 증세 중에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구내염이라고 불리는 소위 베체트병이다.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세브란스병원에 갔다. 베체트 클리닉이라는 전문 파트가 따로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나 밖에 없는 곳이다. 베체트란 스페인 의사의 이름이다. 병명치고 사람이름이 붙은 병은 불치병이 아닌 것이 없다. 검사를 받고 일주일 뒤에 결과를 보러 오라고 한다. 검사결과는 베체트 병 같다고 한다. 확진도 아니고 추측성 진단결과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 진료를 온 아주머니를 잡고 물어보니 20년 넘게 치료를 받았는데 낫지 않는다고 한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는 구내염환자 중에서도 중증 환자이다. 장기에서 발병하여 입안으로 나타났다가 국부를 거쳐 눈으로 가면 실명되어 결국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병이다. 나는 이미 국부까지 병이 심하게 진행되고 눈도 약간 침침해지는 상태이다. 입안이 헐어서 밥 먹기가 힘들고 국부에 생긴 것은 심해져서 걸음 걷기에도 불편할 정도이다. 이러다가 죽는가보다는 불안감이 생긴다.

하루는 아내의 감기약을 사러 동네 약방에 들렀다. 약을 조제하는 사이에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내 병을 고칠 사람은 어디에 있는지." 예사로 하는 말이지만 절규에 가까웠다.

"어디가 아프신데요?" 나는 대답대신 "베체트라고 들어보셨어요?" 라고 반문했다.

"네 알지요. 제가 한 번 고쳐 볼가요?" 기회만 주면 자신 있게 고칠 수 있다는 결의에 찬 표정이다. "그런데 병이 나을 때는 고통이 심한 호전반응이 오는데 참을 수 있을까가 걱정입니다." 워낙 아픈 데가 많은 나는 자포자기 상태였다. 죽음까지 각오한 나는 약사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결심하였다.

약을 먹기 시작한 50일까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호전반응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목에 고기 뼈가 걸린 것처럼 몹시 아프고 심장이 심하게 뛰면서 통증이 온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다. 죽기보다 더 괴로운 시간이 6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진통이 멈추었다. 이제는 끝났구나 생각하는 사이에 다시 시작된다. 그치고 시작하기를 반복하더니 그 간격이 늘어지면서 서서히 진통이 사라졌다. 거짓 같은 기적이 나에게 일어났다. 지옥에서 살아나온 기분이다. 나와 가족은 물론, 좋아하는 사람은 약사였다. 이로써 베체트의 지독한 병과의 처절한 싸움은 끝이 났다. 윗불은 꺼지게 되었지만 그 밖의 증상은 그대로 남았다.

그후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겨서 나는 더 이상 근무를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농장으로 내려와서 자연을 벗 삼아 종교에 의지하면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어느 날 아들 친구가 와서는 "아버님, 별 다른 계획이 없으면 캠핑장을 하는 게 어떻습니까? 저는 대장암으로 4번의 수술을 받았는데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그 비결은 캠핑을 많이 한 것 밖에 없습니다. 주치의도 놀래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건강관리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고했다

몸이 건강해진다면 뭐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데 눈이 번쩍 띄는 말이다. 땅의 한켠에 작은 호수를 만들고 캠핑시설을 꾸몄다. 캠핑을 하면서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니 남아있던 병이 거짓말처럼 서서히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만나는 사람마다 나이에 비해 젊고 건강하게 보인다고 말한다. 나는 건강을 되찾아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 고마운 이 땅에 죠이너스 처럼 키스를 해 주고 싶다.

〈올림픽대회 개막〉

1988년 9월 17일. 역사적인 제 24회 서울올림픽 대회가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에서 십만여 관중과 수십억 인구가 TV화면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올림픽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애국가가 연주되면서 태극기와 오륜기가 게양되고 올림픽 성화가 점화되었다. 올림픽을 통한 세계평화와 전진의 기치 아래 160개국의 선수와 임원이 입장하였다. 올림픽 역사상 최다 참가국의 기록을 세우면서 세계가 하나 되는 화합의 역사적 순간을 맞았다. 단군 이래 한반도에서 처음 열리는 인류의 제전이 우리민족에게 큰 영광을 안겨주는 역사적인 쾌거였다. 동서냉전의 후유증으로 생긴 반쪽짜리 올림픽을 종식시켜 세계평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함은 물론 미수교국을 대거 참가시켜 우의를 두텁게 하고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어린이가 굴렁쇠를 굴리면서 경기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정적'은 잠에서 깨어나는 발전한국을 연상하게 하였다. 60여 년 전에 인도의 타고르는 이미 이때를 예견하고 '동방의 등불'이라는 한 편의 시를 동아일보에 기고하였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나는 병든 몸으로 거실의 소파에서 개회식 광경을 TV로 지켜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 얼마나 바라고 기다리던 광경이었던가. 내 손으로 만든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건각들의 파노라마를 보는 순간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날을 보냈던가! 필설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 나는 절며절며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한 떨기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꼭 할 일을 했다는 보람과 행복이 느껴진다.

행복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때 얻어지는 성취감과 자기만족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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