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연구자
신윤복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너무도 익숙한 명작 '단오풍정'이다. 단오를 맞아 몸도 씻고 그네도 타며 바람을 쐬고 있는 기생의 모습이다. 그네를 맨 큰 나무가 있는 언덕과 계곡을 배경으로 설정해 10명이나 되는 인물을 자연스럽게 그려냈다. 바위 뒤에 숨어 반라(半裸)의 물가 여인들을 엿보고 있는 두 명의 불청객이 어린 동자승이어서 화면에 웃음을 더한다.
언덕 위는 자주 회장의 노란 저고리와 다홍치마, 하얀 속바지를 입은 이 화면의 주인공이 그네에 막 오르는 순간이고, 오른쪽 아래는 음식상을 머리에 인 심부름꾼이 다가오는 장면이다. 묶어놓은 보자기 위로 술병이 삐죽 솟아 있어 이 여성들의 정체가 더욱 실감난다.
인물과 배경이 찰떡같이 어울린 화면 구성력의 탁월함 뿐 아니라 화사한 원색과 은은한 담채가 조화되며 서로의 색조를 빛내 주는 색채의 아름다움 또한 유감없이 발휘된 일류의 솜씨이다. 예리한 관찰력과 정확한 묘사력으로 잡아낸 동작의 선묘 또한 깔끔해 이 한 장면에 단오날 풍경을 설득력 넘치게 담았다.
'단오풍정'은 신윤복의 '혜원전신'에 들어있는 작품이고 이 첩의 주제는 춘의(春意)와 여성의 아름다운 자태인 여색(女色)의 형상화이다. 신윤복은 음양의 원리가 작동하는 다양한 상황을 맵시 나는 기녀와 멋쟁이 양반남성을 통해 실감나게 전해 준다. 신윤복의 특별함은 뚜렷한 주제의식에서 더욱 돋보인다. 신윤복처럼 탁월한 실력으로 남녀상열지사의 애정 풍속을 다양한 장면으로 그림화한 화가는 없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철저한 무시였다. 그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당대나 또는 이후라도 신윤복을 모를 리 없었을 텐데 그의 존재나 그림 이야기가 문자화된 예를 찾기 어렵다. 신윤복은 식자층의 기록에서 외면당했다. 아버지 신한평처럼 그도 화원을 지냈으나 비속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100여 년을 전해 내려오다 1935년 활자화 되었을 뿐이다. 그의 주제 자체가 시대의 금기였기 때문이다. 아예 함구할 만큼 조선사회는 남녀 사이의 일에 대해서는 담론 자체가 형성되지 못했다.
18세기 후반 이구환의 저술로 추정되는 '청구화사'에 신윤복이 젊은 시절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 사방불(似彷佛) 방외인(方外人) 교결여항인(交結閭巷人)" 했다는 짧은 글이 있다고 한다.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살았고, 당시 사회의 네모난 규격 밖에 있는 '방외인'이었으며, 시정의 사람들과 친했다는 것이다. 아웃사이더인 신윤복을 인정하고 그에게 30점이나 되는 '혜원전신첩'을 주문해 단오날 이렇게 멋진 그림을 향유할 수 있게 해 준 그 분은 과연 누구였을까?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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