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태우의 새론새평] 새로운 보수의 탄생을 그리며

입력 2021-06-09 12:48:45 수정 2021-06-09 19:27:39

도태우 변호사

도태우 변호사
도태우 변호사

34년 전 오늘, 1987년 6월 10일은 1987년 헌법 개정의 물꼬를 튼 대규모 도심 시위가 처음 벌어진 날이다. 그때만큼은 아니라 할지라도 현재 우리나라에는 기존 정치에 대한 변화의 열망이 거세게 표출되고 있다. 내 삶의 문제에 반응하지 않는 정체된 기존 정치에 대한 항의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이러한 정치 혁신의 갈망에 부응하는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일까? 짧게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대구경북은 '보수의 심장'이라 불린다. 이 지역과 연이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삼성 이병철 회장이 거둔 독보적인 성공 속에 기존 보수 정치의 중요한 특징이 녹아 있다고 생각된다.

1960년대 초 이병철 회장으로 대표되는 기업가 집단과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신진 정치 세력은 차관을 도입하여 대규모 공장을 세움으로써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혁신적인 방안을 시작했다. 후대는 이를 '공학적 접근'이라 부르게 되었다. 수치화된 목표를 설정하고, 효율적인 관리를 통해 그 목표를 달성하며, 세계 경영을 지향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우리는 1950년 100만 달러에서 2020년 5천억 달러로 수출액이 증가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공학적 접근을 통한 성공이 어느 지점을 지나면, 더 이상 새로운 목표가 달성되어도 삶의 질과 정신적인 충만감이 자동으로 향상되지 않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진정한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넘어서야 하는 높은 문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진보 정치'를 표방하는 세력은 이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또한 역(逆)공학적 접근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수십 년간 은밀한 조직과 운동 이념,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기존의 공학적 접근을 공격했다. 효율적인 국가기구, 유능한 관리 체계, 합리적인 수치 계산이 이들의 계획적인 공격 아래 다 무너져 내렸다. 그들의 공학은 파괴의 공학이었고, 선전 선동 조작의 공학이었으며, 결국 권력의 공학으로 귀결되었다. 모든 것이 권력의 쟁취와 유지를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수십 년을 지나오면서 진보 운동권의 민낯이 드러났다. 그들이 박 전 대통령의 공학적 접근을 비판하며 내걸었던 삶의 여러 가치들은 결국 채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태생적인 권력만능주의로 인해 공동체의 삶에 더 큰 황폐함이 초래되었다.

보수 정치의 본산 대구경북에서 이제 새로운 보수의 노선이 제안될 필요가 있다. 새로운 보수 노선은 기존의 공학적 접근을 격상시킨 형태가 되어야 한다. 공학적 접근을 극복한다면서 기만적으로 나타난 여론 몰이, 대중 조작과 같은 역공학적 접근을 단호히 거부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보수 정치는 시민과 국가의 동반 성장, 선순환을 지향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기존에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진 시민의 성장에 특히 강조점을 두어야 한다. 시민은 개인성과 국민성을 동시에 겸비한 존재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개인성과 국민성을 함께 발전시키는 길 속에 근대 국민국가의 활로가 놓여 있을 것이다.

파편적인 수당, 금전 복지를 넘어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생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시되어야 한다. 각급 단위의 일등 교육으로 일등 시민을 성장시켜 국가를 발전시키며, 다시 그 국가가 미래 시민을 더 훌륭하게 성장시키는 선순환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이는 동서고금의 선도 국가들이 걸어간 고전적인 경로이기도 하다.

변화의 열망이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할 때, 사회는 더 큰 실패와 좌절을 겪게 된다. 성숙한 시민, 성숙한 국가로의 도약이 절실히 요망된다. '쇼'(show)가 아니라 '삶'을 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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