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시시각각] <52> 한민족 DNA 보여주는 철원 '경상도 마을'

입력 2021-06-01 06:00:00 수정 2021-06-01 06:03:21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 '경상도 마을' 이장 이상경씨 부부가 외국인 직원들과 시설하우스 파프리카 순치기를 하고 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울진에서 66세대가 집단 이주 후 첫둥이로 태어난 이씨는 부모들이 황무지를 피땀으로 일군 이곳에서 파프리카 1만6천500㎡(5천평) 농사로 연 8억원의 조수익을 올리고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파프리카 생육 상태를 살피는 이상경 이장. 그는 전국 파프리카의 3분의 1이 철원에서, 이 중 3분의 1이 이 마을에서 생산한다고 했다. 사람 키보다 더 높게 키워 6월 하순부터 11월 말까지 수확해 98%이상 일본으로 수출하고 나머지는 서울 가락시장으로 보낸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파프리카 생육 상태를 살피는 이상경 이장. 그는 전국 파프리카의 3분의 1이 철원에서, 이 중 3분의 1이 이 마을에서 생산한다고 했다. 사람 키보다 더 높게 키워 6월 하순부터 11월 말까지 수확해 98%이상 일본으로 수출하고 나머지는 서울 가락시장으로 보낸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외출 중 파프리카 시설하우스 개폐 상태를 스마트폰 앱으로 체크하는 이상경 이장. 물을 주거나 보온 덮개를 덮는 일 등을 모두 실시간 앱으로 관리한다고 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외출 중 파프리카 시설하우스 개폐 상태를 스마트폰 앱으로 체크하는 이상경 이장. 물을 주거나 보온 덮개를 덮는 일 등을 모두 실시간 앱으로 관리한다고 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이상경 이장이 마을 주민 11명과 함께 세운 자연촌영농조합법인 파프리카 자동 선별장을 점검하고 있다. 조합 회장을 맡고 있는 이씨는 회원들이 출하한 상품 등급, 가격 등을 매일 실시간 공개해 경영도 혁신하고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이상경 이장이 마을 주민 11명과 함께 세운 자연촌영농조합법인 파프리카 자동 선별장을 점검하고 있다. 조합 회장을 맡고 있는 이씨는 회원들이 출하한 상품 등급, 가격 등을 매일 실시간 공개해 경영도 혁신하고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정호남 할머니의 사진첩에 있는 이주민들의 개척 당시 사진. 수해로 살림을 다 잃어 마을에 카메라는 물론 라디오 한 대도 없어 세상과 단절된 채 세월을 보냈다. 〈사진=정호남 제공〉
정호남 할머니의 사진첩에 있는 이주민들의 개척 당시 사진. 수해로 살림을 다 잃어 마을에 카메라는 물론 라디오 한 대도 없어 세상과 단절된 채 세월을 보냈다. 〈사진=정호남 제공〉
태풍 사라호에 고추장 단지, 도끼 한 자루만 챙겨 이주해 자식들을 키운 정호남 할머니가 그날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태풍 사라호에 고추장 단지, 도끼 한 자루만 챙겨 이주해 자식들을 키운 정호남 할머니가 그날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잡초 황무지를 옥토로 일군 한 할머니(91)의 손. 1960년 군용 트럭을 타고 철원으로 이동하던 당시 화천에서 출산하기도 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잡초 황무지를 옥토로 일군 한 할머니(91)의 손. 1960년 군용 트럭을 타고 철원으로 이동하던 당시 화천에서 출산하기도 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6.25 전쟁 후 수복지역 개발정책으로 울진 사라호 태풍 피해 66세대가 1960년 4월 7일 첫 이주 후 고생 끝에 파프리카 시설재배로 부촌이 된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 경상도 마을.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6.25 전쟁 후 수복지역 개발정책으로 울진 사라호 태풍 피해 66세대가 1960년 4월 7일 첫 이주 후 고생 끝에 파프리카 시설재배로 부촌이 된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 경상도 마을.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입주 기념비 뒷면에 세긴 입주 66세대 명단.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입주 기념비 뒷면에 세긴 입주 66세대 명단.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1989년 이주 2세들이 마현리 마을 입구에 세운 입주 기념비의 비문.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1989년 이주 2세들이 마현리 마을 입구에 세운 입주 기념비의 비문.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1959년 9월 17일 추석날. 난데없는 물벼락

태풍 사라호가 한반도 동쪽을 쓸었습니다.

울진의 근남·기성·온정·평해도 다 잃었습니다.

으스러진 초가집마져 둥둥 떠내려갔습니다.

"땅 줄 테니 울진 사람들 철원으로 오시오"

이듬해 4월 7일, 오갈데 없는 66세대 3백여 명이

군 트럭으로 3박4일 눈물로 달려 도착한 곳은

전쟁통에 버려진 휴전선 아래 민통선(민간인 통제선) 땅.

정호남 할머니(88)는 그때 스물일곱이었습니다.

가져온 건 고추장 항아리와 도끼 한자루.

보이는 건 휑한 벌판에 덩그렁 한 군용 천막 뿐.

구들을 놓고 가마니를 장판으로, 모포 한 장으로

다섯 식구가 칼바람을 피했습니다.

4·19혁명으로 지원 약속도 식량 배급도 물거품.

주린 배를 소나무 속껍질로, 풀뿌리로 채웠습니다.

오늘을 넘기면 내일이 또 보릿고개였습니다. ​

탄피 한 관(3.75㎏)에 보리쌀이 세 말.

모진 단속에 주운 탄피를 속옷에 숨겼습니다.

쉰 살도, 예순 살도 임산부처럼 시장가서

출산(?)하고 바꾼 보리쌀로 식구를 살렸습니다. ​

지뢰 반 흙 반인 황무지를 호미·괭이로 일궜습니다.

조별로 땅을 공동 개간해 제비뽑기로 나눴습니다.

정부 지원군 열집 당 1마리, 말귀도 모르던

부림소는 마을 다랑논 최고 용병이었습니다.

악으로 깡으로 일군 20여 년. 또 날벼락이 쳤습니다.

1982년 수복지역 특별조치법에 따라

너도 나도 '땅 임자'라며 쑥쑥 내민 종잇장에

주민들은 개간 농지 70%를 뺐겼습니다.

이주 마을 첫둥이 이상경(61)씨도 그 시절이 생생합니다.

타지서 기죽지 않으려니 억세고 드세졌습니다.

학교 가면 싸움을 하고서야 수업을 했습니다.

버스 타면 시끄럽다고 '솰라쟁이'로 통했습니다.

면민 체육대회는 언제나 결승, 마을 잔칫날이었습니다.

비가 와서 쉬는 날은 남을 따라 잡는 날.

왜 안오냐며 쨍한 하늘을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아내는 이런 남편만 보고 경주서 시집왔습니다.

전 재산 버섯사가 두번이나 불타고도 이를 물었습니다.

밤중에 손을 씻고 새벽에 또 장화를 신었습니다.

돈이 모일때 마다 '눈물의 그 땅'을 다시 사들였습니다.

벼, 옥수수, 노지 오이, 시설 오이, 버섯, 토마토….

마침내 십수 년 공들인 파프리카가 대박났습니다.

이 씨 부부는 1만6천500㎡(5천평)에 연 조수익(粗收益) 8억원.

마현리 132가구 연 평균 조수익 3억원….

일본도 알아주는 파프리카 부자마을, 어려운 이웃에

매년 수백만원씩 내 놓는 의리 있는 동네가 됐습니다.

태풍에 싹 쓸리고 잡초 벌판에서 끝내 희망을 찾은,

질경이 같은 한민족 DNA를 보여준 철원 경상도 마을.

은근과 끈기의 한민족이라 했습니다.

코로나19보다 더한 IMF, 6·25도 헤쳐온 우리입니다.

포시랍게 자라는 시대라지만 피는 못 속입니다.

힘들면, 부모세대가 물려준 그 DNA를 떠올려 볼 일입니다.

마을 어귀 입주 기념 비문은 그 교훈을 일깨웁니다.

"그대들은 알아야 한다! 황무지를 옥토로 가꾼,

무에서 유를 창조한 조상들의 숭고한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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