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화력덕후 포방부

입력 2021-05-26 05:00:00

김해용 논설실장
김해용 논설실장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선조에게 올린 이순신 장군의 장계에 나온 명언이다. 여기서 12척의 배는 판옥선(板屋船)을 뜻한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133척의 왜군 함선을 격퇴한다.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첩이다. 조선 수군(水軍)의 주력함인 판옥선은 포격전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배였다. 바닥이 평평해 속도가 떨어지지만 제자리 급선회가 가능해 왜군이 대응하기 전에 화포를 퍼부었다.

왜군들은 판옥선 모습만 봐도 겁에 질렸다고 한다. 판옥선은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등 조선의 대표적 화포를 비롯해 세계 최초의 다연장 로켓포인 신기전 등 24문 이상의 화포를 탑재할 수 있었다. 판옥선은 일반 포탄은 물론이고 쇠구슬을 넣은 산탄형 포탄 '조란환'과 조선판 관통형 로켓탄인 '대장군전'까지 발사했다.(해군사관학교가 재현한 대장군전은 400m 거리를 날아가 화강암 틈새에 80㎝를 파고들 정도로 강력했으니 왜군이 혼비백산할 만하다.)

임진왜란 당시 전체적 전력이 왜국에 밀렸지만 화포만큼은 조선이 우세했다. 이는 우리 조상들의 화포 지상주의 덕분이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 지형 특성상 우리 조상들은 평야 전면전을 피하고 요충지 산성(山城)에서의 방어전에 치중했다. 원거리 투사 무기인 활과 쇠뇌, 화포의 발달은 필연적 결과였다.

화포 지상주의 유전자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우리 군(軍)은 포병 중심의 지상군 화력 강화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왔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군사력 세계 6위 수준이지만 포병 전력만큼은 세계 1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 3천 문의 155㎜ 곡사포(자주포+견인포)를 보유하고 있으며 155㎜ 자주포 최대 운용 국가다. 이런저런 이유로 밀리터리 동호인들 사이에서 우리나라 국방부는 '화력덕후', '포방부'(화포+국방부)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최근 우리나라에 낭보가 날아들었다. '한미 미사일 지침'의 종료다. 800㎞로 묶여 있던 최대 사거리 제한이 풀림에 따라 우리나라도 이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개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40년간 갈망해 온 미사일 주권의 회복이다. 날개까지 단 화력덕후 포방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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