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연구자
날씨가 점점 무더워진다. 요즘은 손풍기도 유행이지만 더위를 물리칠 기품 있는 여름 소지품이라면 전주 합죽선이 최고로 꼽힐 것이다. 합죽선 중에서도 보통의 한지 대신 특수하게 물들인 검은색 종이인 묵지(墨紙)에 금가루를 아교에 갠 금니(金泥)로 그린 그림부채는 가장 귀품(貴品)이다. 금은 원래 왕이나 부처와 관련되는 그림이나 글씨에 사용한 고급 재료였다.
강세황의 '단청금취(丹靑金翠)'는 묵지금니의 흔치 않은 귀한 재료를 사용한데다 그림과 글씨도 정성스러워 각별한 귀인을 위한 부채였을 것 같다. 화제는 중국 금나라 원호문의 시 '십삼일도악령(十三日度岳嶺)'에 나오는 '단청만목추풍노(丹靑萬木秋風老) 금취천봉낙조개(金翠千峯落照開)', 곧 "붉고 푸른 수만 그루 가을바람에 시들고, 금색 비취색 수천 봉우리 석양빛에 펼쳐지네"이다. 가을 바람소리 들으며 황금빛 낙조를 바라보는 공감각적인 심상이 서늘하면서도 장엄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근경의 언덕에 몇 그루 나무와 초가지붕을 이은 정자 하나가 있고, 강을 사이에 두고 원경에 산봉우리가 연이어진다. 강에는 배 한척이 떠 있다. 강세황이 자주 활용한 일수양안(一水兩岸), 격수양안(隔水兩岸) 구도를 부채꼴에 맞추어 넓게 펼쳐 그렸다. '표암(豹菴)'으로 서명하고, '광지(光之)'라는 자(字)를 새긴 인장을 찍었다. 강세황은 이 인장을 즐겨 사용했는데 강세황의 자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증손자뻘 되는 귤산(橘山)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에 실려 전한다.
광지의 '지(之)'자에 착안해 자나 이름에 지(之)가 들어가는 역사적 대가에 강세황을 빗대 인물평을 한 것으로 사람들이 '십지평(十之評)'이라고 했다. '문지퇴지(文之退之) 필지희지(筆之羲之) 화지개지(畵之愷之) 인지목지(人之牧之) 광지겸지(光之兼之)' 곧 "글은 한퇴지(韓退之)요,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요, 그림은 고개지(顧愷之)요, 사람은 두목지(杜牧之)니, 광지(光之)가 모두 겸했네"라고 한 것이다. 세어보면 지(之)가 열 번 나온다. 한유와 같은 문장, 왕희지 같은 글씨, 고개지 같은 그림, 두목과 같은 분방한 인물됨을 광지(光之) 한 사람이 모두 겸했다는 찬사를 강세황이 북경에서 명사들과 사귈 때 어떤 이가 써주었다.
평생을 재야의 지식인으로 살다 남들은 은퇴할 나이인 환갑에 능참봉으로 첫 벼슬을 시작해 72세의 나이로 건륭제 천수연 축하 사행단의 부사로 온 강세황의 남다른 이력과 재능에 중국인들도 감탄했다. 76세 때 금강산 유람까지 다녀왔다. 70대 강세황의 노익장(老益壯)은 젊은 시절 궁익견(窮益堅)에서 나왔다. 부채의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시원하시기를 빌며….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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